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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한백록(忠壯公 韓百祿),부호군 한몽룡(韓夢龍),중추부사 한옥(韓沃),수문장 한백영(韓百英),봉직랑 한근(韓瑾),첨지중추부사 한백붕(韓百朋),절충장군 한우건(韓佑乾)

구름에 달

by 碧巖 2015. 11. 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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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첫 해전 승리 이끈 주역-

충장공(忠壯公) 한백록(韓百祿,1555-1592) 장군

본관 청주(淸州) 춘천 서면 당산리(棠山里) 출생

() 백록(百祿),   () 수지(綬之). 몽계공(夢漢公 哲沖) 6대손으로 조선조 명종(明宗) 10(1555)생.

 

 

아버지는 선비 굉()이며, 할아버지는 경인(敬仁).

한백록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다했으며, 경전과 병서 읽기에 익숙했다.

특히 장성해서는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무인의 길을 걸었다.

 

 

 

  ▲忠壯公韓百祿將軍 墓域入口

 

임진왜란 초전에서 조선군이 육지에서 잇달아 패하고 있을 때

남쪽 바다에서는 조선수군이 잇달아 승리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승리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30여년 전인

명종때의 수군강화책을 들 수 있다.   

특히 접경지방의 유민들과 교류하며 화포기술과 선진 조선술을 습득하여 해상 전투력의 증강이 있었다.

명종 10(1555)에 발발한 을묘왜변에서 조선 조정은 변화된 왜침의 실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은 수군력 확보에 주력하여 판옥선의 개발과 화포의 개량 및 확보에 주력하는 등

무기체제를 충실히 하여 방위 태세를 확립하였다.

 

 

 

이 시기에 한백록은 무예를 익혀 선조(宣祖) 13(1580) 25세로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북쪽 변경에 오랑캐들이 우리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 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와 달리 나라안에서는 붕당정치의 폐해로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한백록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문신보다는 무인의 길을 결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한백록은 25세 되던 해, 알성무과에 응시하였다.

바로 그는 진잠현감(鎭岑縣監)으로 배명(拜命)을 받고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며

병기를 수리보완하여 사졸훈련에 힘쓰던 중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에 제수(除授)된다.

 

 

忠壯公 韓百祿將軍 齎室 忠節閣

 

 

 

한백록 장군이 활동했던 임진왜란의 상황은 대개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선조 25(1592) 4월 왜군의 부산진 침략으로 시작되어 서울, 평양, 함경도로 왜군이 침공한 시기이고,

2단계는 선조 26(1593) 1월 전세가 역전되어 왜군이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하고,

강화회담이 계속된 약 4년간 전쟁의 소강상태 시기이다.

3단계는 선조 30(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라도로 침공하여 남원 등을 함락하였으나,

조선·명군의 반격을 받고 남해안으로 총퇴각하고 다시 농성하다가 선조 31(1598) 8월 풍신수길이 죽자

철수하기 시작하여 11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시기이다.

1단계의 상황에서 임진왜란 첫 해전(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바로 한백록 장군이다.

 

세계 해전사에서 패자의 상황을 살펴보면,

걸출한 지휘관이 없으면 우수한 수군 편제와 전함·화포도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마도 한백록 장군은 뛰어난 전술과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휘하 장병과 함께 압도적인 화력으로서 일본 수군을 격멸하였으리라.

초기해전의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한백록 장군 등의 활약과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59254일 전라좌수군은 주전함인 판옥선 24척과 협선 15,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여수 본영으로부터 거제 앞바다를 향하여 출동하였다.

이틀 후 한산도에서 경상우수군(판옥선 4척과 협선 2)과 합류한 뒤,

7일 아침 마침내 옥포에서 일본수군과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 날 30여척의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26척을 격파하고

이어 합포와 적진포 등지에서 다시 16척을 불사름으로써 모두 40여척의 적선을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忠壯公 韓百祿將軍 旌閭門

 

이 임진왜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 전황을 김영기 논설고문은

`강원의 인맥-'(전국문화원협의회 강원도지회)에서 생생하게 적고 있다.

 “옥포선창으로 57일 소리없이 조선수군은 다가갔다. 왜군은 분탕질에 정신이 없었다.

조선판옥선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구들은 갈팡질팡했다.

왜군의 대장은 등당고호(藤堂高虎) 굴내씨선(掘內氏善) 등이었다.

포를 맞은 왜선이 침몰하자 굴내씨선이 물에 뛰어 들었는데 신호가 칼을 휘둘러 목을 잘랐다.

왜장의 목을 칼 끝으로 꽂아 올렸다. 왜장 등당고호의 배도 황자포를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조선수군은 좌충우돌 왜군을 섬멸했다. 바다에 왜구의 시체가 자그마한 산을 이루었다.

이날 결투에 조선수군은 한사람도 상한자가 없었다. 왜적의 배 26척을 부쉈다.

이어서 합포(合浦) 앞바다에서 5, 적진포(赤珍浦)에서 13척을 쳐부수었다.

첫 해전에 승리로 이끌었던 그 현장에 춘천출신의 한백록 장군이 있었다.”

 

이 옥포해전의 전승이야말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감을 갖게 해 준 중요한 일전이었다.

양측 수군의  초전에서 대승을 거둔 사실은 곧 조선수군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반면에 일본수군으로서는 초전 패퇴의 충격으로 인해 크게 전의가 손상되었음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심리적 부담 또한 차후의 작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 해(1592) 4월부터 6월까지 옥포·당포·부산 등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것을 참작하여,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후임으로 한백록 장군은 부산병마첨절제사에 특별 제수되었다.

이것은 남해의 보루를 더욱 확고히 하자는 조정의 뜻과 장군의 능력이 그만큼 특출했음을 보여준다.

 

忠臣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 知義禁府訓鍊院事 行 折衝將軍釜山鎭兵馬僉節制使

   충신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 지의금부훈련원사 행 절충장군부산진병마첨절제사

 

 

▲충장공 한백록장군 재실 정려문

 

이 후 전쟁이 더욱 치열하여 선조 25(1592) 717일 미조항(彌助項) 싸움에서

공이 전사하였으니 충장공(忠壯公)의 나이 겨우 38세였다.

 

`선조실록'258월 신해조에서는 만호 한백록의 전후의 공이 가장 많았는데,

장군이 적에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후에 장군의 군중(軍中) 노복(奴僕)인 득충(得忠)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춘천군 서면 금산3리 관음동으로 반장(返葬)하였다.

충장공 한백록의 묘역과 정려각(旌閭閣)은 춘천시 서면 금산리 산64, 방동리 406-2에 소재하고 있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31호이다.

 

한백록 장군은 `여지도서(輿地圖書)'`강원도 춘천현 인물조'

유일한 충신으로 정표(旌表)된 춘천의 인물로 나타난다.

장군에게는 선조 38(1605)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으로 책록(策錄)되었고,

영조 28(1752)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순조 8(1808)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증작(贈爵)되었다.

그리고 순조 11(1811) 619일에 `증 병조판서 한백록에게는 충장(忠壯)으로 증시(贈諡)하였다'

`순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배위(配位) 창녕 성()씨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라는 가자(加資)가 내렸다.

아들은 우천(佑天)으로 선조 41(1608)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 都事)를 지냈다.

이로 볼 때 한백록 장군은 임진년 이래 춘천에서 유림들에게 중요한 충신으로 추모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유성선(강원대 교수·한국철학)

 

 

 

              충장공 묘역

 

 

 

 

 

 

 

                            忠壯公韓百祿將軍 墓域

 

 

 

   贈資憲大夫兵曹判書釜山僉使諡忠壯公韓百祿 贈貞夫人昌寧咸氏

       증자헌대부병조판서부산첨사시충장공한백록 증정부인창령함씨

 

 

 

 

           군중(軍中) 노복(奴僕)인 득충(得忠)의 墓域

 

 

 

주변의 후손묘역들

 

通政大夫僉樞折衝將軍行龍驤衛 副護軍靑州韓公諱夢龍 淑夫人鎭川宋氏

   통정대부첨추절충장군행용양위 부호군청주한공휘몽룡 숙부인진천송씨

 

 

 

 

 

 

資憲大夫行龍驤衛 大護軍同知中樞府知事 淸州韓公 諱沃 貞夫人全州李氏

   자헌대부행용양위 대호군동지중추부지사 청주한공 휘옥 정부인전주이씨

 

 

守門將淸州韓公諱百英 配恭人延安李氏 之壇

   수문장청주한공휘백영 배공인연안이씨 지단

 

 

 

 

 奉直郞參奉淸州韓公諱瑾 配恭人安東金氏

    봉직랑참봉청주한공휘근 배공인안동김씨

 

 

 

 

 

 

 

 

 

折衝將軍行龍驤衛 副護軍僉知中樞府事 淸州韓公諱百朋  配淑夫人鎭川宋氏

   절충장군행용양위 부호군첨지중추부사 청주한공휘백붕  배숙부인진천송씨

 

 

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 淸州韓公諱佑乾 淑夫人咸陽呂氏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 청주한공휘우건 숙부인함양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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