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공 검재 김유선생 묘역 文敬公 儉齋 金楺先生 墓域 1653(효종 4)∼1719(숙종45).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8
文敬公 金楺先生 문경공 김유선생1653(효종 4)∼1719(숙종45).
본관은 청풍(淸風). 字 사직(士直), 號 검재(儉齋). 諡號 문경(文敬)
일찍이 학문에 조예가 깊어 박세채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며, 송시열도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겼다.
1674년(현종 15)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둘러싸고 제2차 예송(禮訟)이 벌어져,
송시열·박세채 등이 화를 입게 되자 과거를 포기하고 경기도 이천에 은거하였다.
1683년(숙종 9) 사마시에 합격, 경학(經學)으로 추천받아 창릉참봉에 등용되었고,
이후 정랑을 거쳐 1699년(숙종 2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찬수낭관으로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했다.
1701년에 고양군수,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 장례원사평, 한성부서윤, 부평현감,
1707년 황해도 연안현감시절 선정(善政)을 베푼 공으로 명주옷감 안팎의 하사(下賜)를 받고,
1708년에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
1712년에는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1713년에는 봉조하(奉朝賀)직을 띠고 사헌부장령, 사간원사간, 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고
1714년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수원부사(水原府使)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1715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를 수명하고 품계가 가선대부에 올랐다.
평안도에서 돌아와 홍문관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우윤에서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이르렀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전생서제조등을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에 있던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 『소학집주(小學集註)』·『증보주자외기(增補朱子外記)』·『존주록(尊周錄)』·『검재집(儉齋集)』 등이 있다.
曾祖父 김인백(金仁伯)
祖父 김극형(金克亨) 좌찬성
父 관찰사 김징(金澄) 영의정
母 이의길(李義吉)의 딸 함평이씨. 박세채(朴世采)·송시열(宋時烈)의 문인 .
어머니 : 이조참판 이완사의 딸
형님 : 김구(金構)우의정
조카 : 김희로(金希魯)
종손 : 김치만(金致萬)
조카 : 김재로(金在魯)영의정 손자 : 김치일(金致一) 김치인(金致仁)영의정
동생 : 김무(金楙)
조카 : 김흥로(金興魯) 손자 : 김치복(金致福)
文敬公 金楺先生
初配 : 호군 이명운의 딸 전주이씨 무후
繼配 : 송박의 딸 여산송씨
장남 : 김정로(金正魯)
차남 : 김취로(金取魯) 손자 : 김치영(金致永) - 생부 김상로(金尙魯)
삼남 : 김성로(金省魯)
사남 : 김약로(金若魯)좌의정 손자 : 김치공(金致恭)
오남 : 김상로(金尙魯)영의정 손자 : 김치양(金致讓)
左 貞敬夫人礪山宋氏 祔 좌 정경부인여산송씨 부
右 贈貞敬夫人全州李氏 祔 우 증정경부인 전주이씨 부
文敬公儉齋金先生諱楺墓 贈貞敬夫人全州李氏祔右 貞敬夫人礪山宋氏祔左
문경공검재김선생휘유묘 증정경부인전주이씨부우 정경부인여산송씨부좌
文敬公 金楺先生 墓域 문경공 김유선생 묘역 후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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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오산인 김종수夢梧山人 金鍾秀 墓域
경기 의왕시 고천동 산 31
김종수(金鍾秀,1728,영조4∼1799,정조23)는 조선 후기의 벽파(僻派)의 명수.
字 정부(定夫) 號 몽오(夢梧) 본관 청풍(淸風)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자.
정내교(鄭來僑)에게서 배우고, 1750년 생원진사과에 급제하여, 1758년 翊衛司洗馬익위사세마,
1760년 공조좌랑, 호조정랑, 강서현령, 1763년 면천군수가 되었다.
1768년(영조44)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부수찬, 필선이 되어, 왕세손의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 교리, 응교,
1770년 동부승지, 곡산부사, 1772년 당파를 주도했다고 경상도 기장에 유배되었다.
1776년 공조참의, 정조 즉위 후, 우부승지, 부제학, 공조참판, 강화유수가 되었다.
1777년(정조1) 경기감사, 병조․이조판서, 제학, 이듬해 우참찬, 평안감사를 거쳐,
1779년 예조판서, 수어사, 이듬해 공조판서,
1780년 다시 이조 판서가 되어 홍국영(洪國榮)의 죄를 논하여 전리방축(田里放逐)케 했다.
1781년 좌참찬, 대제학, 이듬해 대사헌,
1783년 이조․병조판서, 이듬해 걸군(乞郡)하여 양주목사가 되고,
우참찬(右參贊)·병조 판서를 거치며 시세에 따라 처세가 능란했으며,
심환지(沈煥之)와 더불어 반대당인 홍씨(洪氏) 일파에 대한 공격에 앞장을 섰다.
1785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788년 형조판서, 이어 대제학
1789년 우의정, 17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1794년 척신인 김구주(金龜柱) 및 심환지(沈煥之)들과 당파를 이루어
영상 채제공(蔡濟恭)과 양립할 수 없다고 하여 평해와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이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정조 때 《경연고사(經筵故事)》·《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秦議)》를 지어 바쳤다.
諡號는 문충(文忠), 정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또한, 학문의 스승 역할을 하여 군사가 되어라 가르친 건
그대들 노론의 당수요, 나의 세손궁 스승이었던 몽오 김종수가 아니오?"
김종수(金鍾秀, 1728년 ~ 1799년 1월 7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이며 사상가이다.
세손 시절의 정조의 스승으로 당론에 반하여 세손을 옹호하였으며,
그 뒤 정조 즉위 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조에게 도의정치를 역설하며 임금이면서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될 것을 건의하였다.
당색은 노론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온건파에 가담하였다.
세손 시절의 정조의 사부이기도 했다. 대의명분에 입각한 군사부일체론을 주창하였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자(字)는 정부(定夫), 호는 몽오(夢梧)·진솔(眞率)이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김종수는 정조가 왕세손일 때부터 정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그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다.
정조 역시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받아들였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하다고 교육했다.
즉 이상적 시대인 하, 은, 주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이후 시기부터는 신하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탕평이 표방된 지금의 시대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개혁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곧,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것이다.
그는 통치자는 통치자이면서 스승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임무를 스스로 맡아서 실천에 옮길 때,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그는 군주는 만인을 감싸안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 건의는 후일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후일 모든 신하들이 정조야말로 군주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한 위대한 성인이라고 추모할 정도로 효과가 나타났다.
그는 노론에서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할 때 이천보, 유척기 등 소수의 인사들과 함께 세손을 지지하였다.
그의 진정성은 세손을 감화시켰다.
夢梧山人金公諱鍾秀墓 貞敬夫人海平尹氏祔左
몽오산인김공휘종수묘 정경부인해평윤씨부좌
김종수金鍾秀의 생애와 활동
김종수는 1728년(영조 4) 2월 8일 한성부 서부의 미장동 집에서 태어났다.
본관 淸風, 字 定夫정부, 號 夢梧몽오 率翁솔옹, 諡號 文忠문충.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으로 조부인 김희로金希魯는 판서, 부친 김치만金致萬은 목사를 지냈다.
종조부 김재로金在魯와 종숙 김치인金致仁은 영의정을 지냈고, 형 김종후金鍾厚는
산림으로 명성이 있었던 명문가 출신이었다.
김종수는 1758년(영조 34)에 세자익위사 세마洗馬가 되어 사도세자를 보필한 적이
있었다. 또한 1761년 4월에 사도세자가 평양에 잠행하였을 때에는 강서현령인 김종수와
영유현령 조정이 함께 평양으로 가서 사도세자를 만나 직간을 했다. 서울에 돌아온
사도세자는 정조에게 “내가 이번 행차에서 강직한 신하 둘을 얻었다.”고 하였고,
이로 인해 정조는 김종수를 신임하게 되었다.
김종수는 1768년(영조 44) 문과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인 관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768년부터 1770년까지 세손 정조를 가르치는 시강관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때에 그는 척신 정치를 비판하고 청류에 바탕을 둔 정치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여 정조의 마음에 들었다.
김종수는 1772년(영조 48)에 청명당淸明黨 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기장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방면되었다. 당시 노론 중에는 청명淸名을 존중하고 공론公論을
회복하여 사림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정치적 결사가 있었는데, 이조판서
정존겸이 대사성을 추천하면서 이에 속하는 김종수, 조돈, 서명천 세 사람만 추천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당시 영조는 당파를 없애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사건에 연루된
청명당 인사들을 대거 유배시켰다.
1776년 영조가 사망하자 김종수는 영조의 행장行狀을 편찬했고, 이후 승지, 경기
관찰사, 평안 관찰사를 거쳐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다.
홍국영의 축출(1780)
홍국영洪國榮은 영조 말년에 세손 정조를 보호한 공로로 정조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었다.
특히 그는 1776년에 홍상간, 홍인한, 윤양로 등이 세손을 모해하려는 사건을 적발하였으며,
정조가 국왕이 되자 동부승지, 숙위대장, 도승지가 되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홍국영은 1778년(정조 2)에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으로 들여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1779년에 원빈이 사망하자
홍국영은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그 제사를 지내게 했다.
담(완풍군, 상계군)을 정조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김종수는 노론 청류계 인사로 척신 정치를 비판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영조 말년에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는 세력에 맞설 때 김종수과 홍국영은 동지였고,
정조가 즉위한 후 만든 동덕회同德會의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홍국영이 척신이 되어 특권 세력화하자 김종수는 그에 맞섰다.
김종수는 1780년 2월에 홍국영을 귀양시킬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홍국영이 인사를 농단하고 부정 축재를 하였으며, 왕실의 후계자 문제까지 개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지적이었다.
김종수는 홍국영이 정조를 국왕으로 옹립한 공과 국왕의 후사 문제에 개입한 죄가 있음을 구분하고,
죄는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자는 그(홍국영)가 국가에 공훈이 있어
?명의록?의 주인과 같은데 하루아침에 죄를 주면 ?명의록?의 의리에 손상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명의록明義錄?이란 대리청정 시기의 의리를 천명한 책이고,
국영을 죄주는 것은 광저사廣儲嗣에 대한 의리를 천명하는 일입니다.
공적이 있어 공적을 기록하고 죄가 있어 죄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사건을 비록 다르지만 의리를 천명하는 것은 같습니다.
또 진실로 공이 높다고 해서 그 죄를 벌하지 않는다면
심기원 같이 역적 짓을 해도 공이 있다는 것 때문에 벌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니, 천하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홍국영은 정조의 즉위에 공이 컸으므로 정조로서도 그를 내치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정조는 자신을 대신해 홍국영을 은퇴시킬 사람을 물색하였고, 김종수가 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김종수가 홍국영의 귀양을 요청한 것은 정조가 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종수의 상소가 자발적인 것이든 정조의 명령에 의한 것이든 이후 김종수는 중앙의 요직에서 승승장구했다.
규장각에서의 활동(1780~1784)
김종수는 1778년 4월에 예문관 제학으로 「경연고사經筵故事」를 작성하여 정조에게 올렸다.
이는 경연에 관한 사항을 18개 조목으로 정리한 것으로,
세손 시강관이었던 김종수가 이제 경연관을 맡으면서 정조에게 학문에 열중하기를 당부하는 의미가 있었다.
정조는 김종수의 간곡한 심정을 엿볼 수가 있다며, 그중 두세 조목은 자신의 병통을 적중했다고 칭찬했다.
신이 지금 경연經筵에서 대죄待罪하고 있기에
고사故事의 전례를 모방하여 18조목條目으로나누어 배열하고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머리를 감고 손수 써서 위에서 살피시는데 대비합니다.
대개 지난 해 주연胄筵에서 항상 아뢰던 말과 요즈음 탑전榻前 자리에서 아뢰던 뜻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만
전하께서 때로 보아 주시며 정신을 들여 살펴주신다면,
이 어찌 미천한 신臣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실로 국가의 다행입니다.
김종수는 1780년 3월에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고
규장각고사奎章閣故事 6조목,
역대명신주의요략歷代名臣奏議要略 8권,
국조명신주의國朝名臣奏議 6권을 차례로 작성하여 정조에게 올렸다.
「규장각고사」는 역대명신주의요략 을 편찬하던 중 참고할만한 구절과
성학집요聖學輯要?의 핵심 구절을 뽑은 것이며,
나머지 두 책은 중국과 조선의 신하들이 올린 주의奏議에서 귀감이 되는 것을 정리한 책자였다.
김종수는 1784년에 간행된 ?규장각지奎章閣志?의 발문을 작성했다.
함께 발문을 작성한 사람은 원임 제학이었던 이복원李福源, 이휘지李徽之, 황경원黃景源, 서명응徐命膺이었다.
다음은 김종수가 작성한 발문으로,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한 의도를 잘 알고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각閣(규장각)은 멀리 송宋과 명明의 고사를 살피고 가까이는 광묘光廟(세조)께서 남기신 뜻을 이어받았습니다.
위로 모훈謨訓을 받드는 도리를 극진히 하고
아래로 인재를 만드는 방도를 다하니 실로 우리 동방에는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현자賢者를 멀리하고 척신을 가까이 한 폐해를 깊이 살피고 충현忠賢을 가까이에서 얻을 것을 생각하며,
겉으로는 예모禮貌를 빌렸지만 속으로는 복심腹心을 둔 것에 있어서는
거의 옛사람이 말했던 ‘성인聖人의 깊은 뜻은 세속에서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조덕린의 복권에 반대(1788)
1788년은 무신난(이인좌의 난)이 발생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때 우의정 채제공은 무신난 때 영남 남인들이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기록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을작성하여 정조에게 올렸고, 정조는 조덕린趙德鄰의 죄명을 씻어 주었다.
조덕린은 1725년(영조 1)에 정권을 장악한 노론계를 공격하면서 노론계의 정적이 되었고,
1737년 이현일을 변호하던 김성탁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제주도로 귀양 가던 도중에 사망한 인물이었다.
규장각 제학 김종수는 조덕린을 복권시키는 정조의 조치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저 조덕린의 일을 꾸며낸 것은 영남 선비들이 전하의 심중을 떠보려고 계획한 것에 불과합니다.
전하께서 먼저 들으신 말만 지나치게 믿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은 묻지 않은 채 곧장 처분을 내리시니,
기사년(1689)의 흉얼凶孼(기사환국 때의 남인)과
무신년(1728)의 역당逆黨(소론 남인 합세한 이인좌 난)이 비로소 기탄없는 마음을 내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조는 이러한 김종수의 반발을 수용하지 않았다.
정조는 양쪽을 조화시키려 하는데 김종수가 우의정 채제공을 공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정조는 김종수를 파직시켰다가 다시 발탁했다.
경卿(김종수)은 여러 해 동안 지우知遇를 얻은 근신近臣이다.
이쪽 저쪽을 조화시켜 나와 뜻을 같이하는 것이 도리인데,
은혜에 보답해 진정시킬 방안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격렬해지도록 조장하는가?
(중략) 조덕린의 일도 지금 와서는 현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지난 일인데 좌우에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한다.
그러나 그 정신은 온통 우상右相(채제공)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가니,
경이 몸소 무장하고 나서서 공격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무리 우상에게 설욕하고 싶어도 어찌 쥐를 잡다가 독을 깨게 되는 협의를 생각하지 않는가?
금등 문서의 공개와 정계 은퇴(1793~1794)
김종수는 1790년(정조 14) 8월에 모친 홍씨가 돌아가시자 1792년 10월까지 삼년상을 지냈다.
이에 김종수는 1792년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밝히고 역적을 처벌하라는 영남만인소가 올라왔을 때 직접 대응 못했다.
1793년 5월 28일에 김종수는 좌의정에 발탁되었고, 채제공은 영의정이 되었다.
이날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임오의리를 거론하고 이에 연루된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영조의 뜻에 부합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이 상소문을 공개하지 않고 채제공에게 돌려보내자,
김종수는 상소문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면서
채제공은 ‘영조의 유훈遺訓을 어긴 죄인’이며 ‘난신적자亂臣賊子이자 역적’이라고 극렬하게 성토했다.
조정 대신들의 논란이 지속되자 정조는 8월 8일에 영조가 작성한 금등金謄 문서를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판중추부사 김종수는 이 날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튿날 따로 정조를 만나 채제공의 상소문을 확인했다.
정조는 김종수에게 금등 문서를 알려주며 채제공의 상소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이번에 채제공의 상소는 혼자 이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기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한번 폭로하려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원본 상소에서는 ‘즉卽’자 아래의 한 구절이 있고,
‘즉’자 위에는 간흉奸凶들이 무고하였다고 운운한 말이 있다.
이제 연설筵說의 본이 나왔고, 원본의 상소도 대신들과 비변사의 당상에게 보였다.
이 때문에 30년이 된 세자의 무고誣告가 분명하게 씻어졌고, 양조(영조, 사도세자)의 미덕도 모두 천양되게 되었다.
이는 실로 우리 국가의 막중하고 막대한 다행이라, 어찌 한사람 한집안의 사사로운 영예만 될 뿐이겠는가?
김종수는 금등의 내용을 수용하면서도 채제공에 대한 공격은 늦추지 않았다.
채제공이 참으로 충성이 있었다면 이 문서의 존재를 알았을 때 바로 제기했어야 하고,
직접 금등을 언급하기 어려웠다면 두 임금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며 옛 일을 언급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1794년은 혜경궁이 60세가 되는 해였다.
정조는 헤경궁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며
친정 식구인 홍낙신洪樂信 홍낙임洪樂任 홍낙윤洪樂倫의 품계를 올려주었다.
1월 22일에 김종수는 이를 반대하였다.
이들은 역적 홍인한洪麟漢의 아들과 조카로 목숨을 보전한 것만 해도 다행인데
품계를 올려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반발이었다.
이날 김종수는
‘1793년 여름에 반발한 것은 자신의 주장만 집요하게 가져 자기도 모르게 의리를 공박하는 죄가 있었다.’고 고백하며,
앞으로 금등과 관련된 일은 더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월 24일에 김종수가 올린 상소는 정조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1월 13일에 정조는 현륭원에 행차하여 작헌례를 거행했다.
이 날 정조의 슬픔이 너무 커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영의정 홍낙성과 영중주부사 채제공이 국왕을 등에 업겠다고 나섰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생일인 1월 21일에 경모궁으로 행차했다.
신하들은 이를 만류하려고 혜경궁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달사達辭를 올리면서
‘대신이 직접 업었다(大臣親負)’는 표현을 사용했다.
김종수는 정조가 업겠다고 나서는 대신들을 물리친 것은 그 덕이 하늘과 같은 것인데,
조보朝報에서는 ‘대신이 직접 업었다’고 잘못 기록하였으니 수정하라고 요구했다.
정조는 김종수의 상소가 국왕에게 수치감을 주고 채제공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로 인해 김종수는 평해군에 유배를 갔고, 남해현에서 위리안치 되었다가 6월에 가서 석방되었다.
정조가 김종수를 다시 만난 것을 12월 2일이었다.
정조는 김종수의 평소 일처리가 ‘나쁘게 말하면 너무 조급하고, 좋게 말하면 양기陽氣가 지나치며,
스스로를 위해 계획하는 것이 요긴하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이 날 김종수는 벼슬길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고, 정조는 이를 수락하여 그를 봉조하奉朝賀로 삼았다.
김종수는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의견을 개진하였다.
1795년에 회갑을 맞은 사도세자에게 8자 존호를 올릴 때,
김종수는 죽책竹冊 대신 옥책玉冊을 사용하는 것이 예의에 합당하다고 했다.
정조를 지지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김종수는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지 말라는 영조의 의리를 지키려는 입장이었고,
정조는 김종수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려는 여론을 형성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夢梧山人 金鍾秀 초상
. 맺음말
1799년
1월 7일에 봉조하 김종수가 사망하고,
1월 18일에는 판중추부사 채제공이 사망했다.
정조는 김종수에 대해 “30년 전 궁연宮筵에서 한마디 말이 천재일우에 부합되었고,
강개하게 의리를 자부하여 죽는다 해도 후회함이 없었다.
중간에 온갖 풍상을 겪으며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나 끝까지 절개를 변치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집에서 효도하고 벼슬할 때는 청렴하여 조정 안에서 가장 먼저 인정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채제공에 대해서는 “나는 이 대신에게 실로 남이 알지 못하고 나만 아는 깊은 계합契合이 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가 품부 받은 것은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만나는 일마다 바로 담당하여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의 지위는 높고 직임은 친근하였으며, 권우眷遇가 두텁고 은총이 성대하였다.”고 하였다.
정조는 두 사람의 장례비를 지급하고 제문을 직접 지어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김종수에게는 문충文忠, 채제공에게는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한 이후 종묘에 배향된 공신은 김종수였다.
이는 노론 벽파가 집권한 상황을 반영한 때문이었다.
<<<글쓴이 김문식 교수 >>>
김문식 교수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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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고굉지신股肱之臣) 김종수(金鍾秀)
<<고굉지신 : 다리와 팔에 비길 만한 신하라는 뜻으로, 임금이 가장 믿고 중하게 여기는 신하라는 말.>>
1. 동덕회의 핵심 김종수
정조는 1778년 가을 동덕회同德會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창문이 구름을 밀치는 저녁,
함지가 해를 떠받드는 가을.
백 년 이 모임 길이 하리니,
덕과 함께 복도 함께하리라 [閶闔排雲夕 咸池擎日秋 百年長是會 同德又同休]”라 하였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역린逆鱗」에도 이 동덕회라는 조직이 등장한다.
정조는 보위에 오른 이듬해 1777년 12월 3일 동덕회 멤버를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지난 을미년(1775) 적신들의 모함이 날이 갈수록 수위를 높여오자
저위儲位가 털끝 하나에 매달린 것처럼 위태로웠는데,
그때 믿을 것은 안으로 보호해 주는 궁료宮僚들과 밖으로 항의하는 재상들의 세력과 행동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화복禍福과 안위安危가 한순간에 판가름 날 상황이었는데
오직 선왕께서 사랑으로 덮어 주시고 모든 것을 포용하여 보살펴 주셨으며 간사한 무리들의 속셈을 간파하시고
우리들을 위태로운 지경에서 구해 주셨기 때문에 나와 제공諸公이 비로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오늘 이 자리가 있게 된 만큼 지난날의 그 위태로웠던 시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고,
제공의 공로를 생각한다면 선왕의 은덕을 더더욱 기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오늘의 이 모임도 영구히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자신을 지지했던 신료들과 함께 신전神殿에 참배한 후 음식을 준비하여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후로 해마다 이날이면 오늘의 모임을 계승해 모이도록 하라.
제공이 나에게 산이나 송백松柏처럼 무한한 수壽를 누리라고 축원하듯이
나 역시 제공에게 무궁한 수를 누리도록 길이 축원하노라.
국가가 편안해야 상하가 다 즐길 수 있고, 상하가 다 즐거워야 이 모임이 오래 갈 수 있을 것이다.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도 위험에 처해 있었던 그 당시 심정을 비장하게 새겨 두고,
담소하며 즐기는 사이에도 와신상담하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는 즐기면서도 방자하거나 나태 않고 편안한 속에서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는 뜻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날의 대화를 기록하여 『동덕회축同德會軸』을 만들었다.
동덕회는 정조를 보위에 올린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람들의 모임이니
『동덕회축』은 일종의 공신회맹축功臣會盟軸이었던 셈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奎 3775) 권8에 수록된「동덕회축서同德會軸序」
동덕회의 멤버는 서명선徐命善, 정민시鄭民始, 김종수金鍾秀, 홍국영洪國榮 등이다.
1775년 영조가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서명선이 상소하여 홍인한을 탄핵하여 파직시킴으로써 대리청정이 시행될 수 있었다.
다른 이들도 정조의 등극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김종수金鍾秀는 세손을 위하여 그 이전부터 드러나지 않게 정후겸 등을 공격한 바 있다.
『일성록日省錄』 1775년 10월 5일의 기록에 따르면 정후겸은 김종수를 두고 요사하여 못할 짓이 없는 자요,
성품이 본래 아주 괴이하고 행실도 너무 간사하다고 비난한 후,
자신들이 큰 잘못도 없는데 죽이려 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원한을 풀려는 데 있는 것이요,
역심을 품은 불순한 무리들과 죽음으로 맹세한 당여가 되었으며,
세손의 궁관이 김종수 무리와 밤낮으로 매우 비밀스레 모의하면서
한밤중에 나귀를 보내어 김종수의 무리들을 태워 간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세손과 연결되어 있던 김종수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공작을 하였고
그 이면에 불행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종수는 1758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로 있으면서 장헌세자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761년 장헌세자가 몰래 궁을 빠져나와 평안도 일대를 순행했는데,
당시 강서江西 현령이던 김종수가 영유永柔 현령 조정趙晸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장헌세자에게 눈물로 간언을 올린 일이 있었다.
기록이 전하지 않아 간언의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장헌세자의 앞날을 우려한 내용이었던 듯싶다.
훗날 정조가 김종수를 문형文衡에 임명하면서 이때의 일을 거론하고
장헌세자가 환궁 후 평안도를 다녀오면서 직신直臣 두 사람을 얻었다는 말씀이 있었다고 전한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이 사소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세손은 부친의 화를 당한 후 김종수의 이름을 가슴에 새겨두었을 것이다.
그런 인연에다 1768년 6월 세손시강원에서 벼슬을 하였으니,
김종수는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가장 가까이 보필한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앞서 정조는 1766년 「소종합대종론小宗合大宗論」을 지었는데
그 요지는 다른 사람의 후사로 대통大統을 이었으면 사사롭게 생부를 높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정조가 장헌세자와의 관계를 단절할 것임을 대내외에 공표하기 전 김종수에게 미리 보여준 것이다.
정조는
「여러 수권手圈의 발어跋語를 사각四閣의 정승 및 대제학에게 구하다[求諸圈跋語於四閣相及文衡]」라는 글에서
“옛날 31년 전에 존현각尊賢閣에서 경과 함께 『서경書經』의 예禮로써 마음을 제어한다는 대목과
『사기史記』의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치는 일을 강론하였는데,
그때가 바로 나와 경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면의 말 한마디까지 서로 맞아떨어져 마침내 천고에 드물게 만나는 군신 관계가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1768년 김종수는 존현각에서 같은 내용을 강론한 바 있으니,
반대파에게 빌미를 주지 않도록 정조로 하여금 소종과 대종의 문제를 직접 공표토록 유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종수는 정조의 최측근이 되어 평생 정조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 되었다.
이후 일찍 죽은 홍국영이 빠지기는 하였지만 동덕회의 모임은 지속되었다.
김종수의 연보에 해마다 12월 3일이 되면 임금이 술을 내렸다는 선온宣醞의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특히 정조는 1792년 12월 3일 「원임 제학 김종수에게 내린 시[賜原任提學金鍾秀]」에서
“경에게 이 잔치자리에서는 취해도 좋다 윤허했는데,
이 달 이 날은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네.
어찌 호남백 한 사람만 이 자리에 빠졌겠는가,
경도 응당 동곽에서 찬 매화와 마주하고 있으리니
[許卿曾醉此筵杯 今月今辰每歲廻 可但湖南人少一 秖應東郭對寒梅]”라 하였다.
이 시에서 이른 잔치자리가 바로 동덕회 모임이다.
정조는 작고한 서명선을 위하여 그 집에 술을 보내고 전라도 관찰사로 지방에 가있어 불참한 정민시,
그리고 부인의 상을 당하여 광주廣州로 내려가 있던 김종수에게는 각기 어제시를 내렸다.
김종수가 생을 마칠 때까지 해마다 12월 3일이면 정조가 술이나 다른 음식을 보냈으니
정조가 동덕회의 뜻을 잊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정조는 김종수를 맹자가 그 뜻을 함께 하는 동지라는 뜻에서 이른 ‘오당지사吾黨之士’라 불렀다.
1793년 김종수를 좌의정에 임명하면서 정조는 “경은 바로 나의 구신舊臣이다.
내가 경을 알아주는 것도 경이기 때문이고 경을 취한 것도 경이기 때문이니,
경이 아니라면 내가 어찌 반드시 이미 알아주고 또 취했겠는가. 경은 옛날에 이른바 오당지사다.
서연書筵에서부터 정승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풍상을 다 겪었지만 마음은 한결같았으니,
이것이 20년 동안 오늘과 같은 관계를 유지해 온 까닭이다.
동짓달 초사흗날에 내가 준 시에서 ‘동곽대매東郭對梅’라고 한 구절은 이미 내 뜻을 먼저 나타낸 것이었다.
정승의 자리에서 우리의 정치를 조화시키는 일을 경 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라 하였다.
2. 규장각 제학과 문한의 직임
김종수(1728-1799)는 청풍김씨淸風金氏다.
이 집안은 영・정조 연간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다.
고조 김구金構가 우의정, 종조부 김재로金在魯, 종숙 김치인金致仁이 영의정에 올랐으며,
김구의 아우 김유金楺의 두 아들 김약로金若魯와 김상로金尙魯가 각기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으니
이 집안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벼슬길을 멀리하고 산림山林을 자처한 그의 형 김종후金鍾厚도 명망이 높았다.
이런 집안의 위세를 배경으로 하여 김종수는 1772년 조정 등과 함께 성균관 대사성에 추천되었는데
추천한 사람이 영의정으로 있던 종숙부 김치인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청명당淸明黨의 당파주의로 몰려 김치인이 처벌을 받아 직산稷山으로 유배되었고
김종수는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전라도 금갑도金甲島로 이배되었으며
서민의 신분으로 떨어지고 자제들도 종신 금고禁錮의 처분을 받았으니 인생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하겠다.
그런 상황에 빠졌지만
세손은 김종수가 예전 쓴 글을 가져오게 하여 읽었으니 세손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등극하였다.
이때부터 김종수는 정조의 최측근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정조는 7월에 김종수를 우부승지로 임명하면서 「대종소종론」을 들어 고마움을 표하고
“내가 고생을 두루 겪었고 승지도 구사일생 살아남아 오늘 군신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천행이다.”라고 하였다.
이 후 김종수의 출세가도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 강화유수 등을 거쳐 몇 달 만에 경기도 관찰사에까지 올랐다.
특히 1777년 8월에는,
영화 「역린」의 소재가 된 것처럼 홍상범洪相範이 역사力士를 모아 정조를 암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정조는 병조판서와 같은 중대한 벼슬은
국변인國邊人[국가의 편에 선 사람]에 맡겨야 한다면서 김종수를 불러들여 병권을 맡겼다.
1789년에는 판의금부사로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대장, 총융사, 포도대장 등을 모두 겸하였으니,
그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가장 명예로운 홍문관 대제학으로 문형을 잡았으며,
우의정, 좌의정, 판중추부사, 봉조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어쩌다 외직으로 나가게 되면 정조는 무척이나 섭섭해 하면서 융숭한 은총을 보였다.
예를 들어 1778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을 때 정조는
“경을 보내는 회포를 정히 억제하기 어려워라.
대부인은 응당 평안하게 왕래를 하리라.
여색과 재물 멀리함은 본래의 경계 있으니,
강산이 아무리 좋아도 과음만 주의하게나
[送卿懷緖正難裁 板輿知應穩往廻 遠色廉財存素戒 江山雖好惜深盃]”라는
시를 지어 부르고 이를 김종수더러 받아쓰게 하였다.
그리고 술을 경계하라면서도 이별의 정을 어쩌지 못하여 큰 술잔에 가득 술을 따라 주고 마시게 하였다.
여기에다 정조는 김종수에게 어좌 가까이 오게 하여 그의 손을 잡았고,
김종수가 자신의 얼굴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그 사사로운 은총이 이 정도였다.
그 사이 김종수는 경모궁景慕宮의 상량문을 짓고,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홍인한과 정후겸을 처단한 일을 기록한
『명의록明義錄』의 발문을 제작하는 등 가장 핵심적인 문한文翰의 일을 도맡았다.
그는 뛰어난 문재로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잘 처리하였거니와,
1776년 정조가 즉위와 함께 바로 설치한 규장각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황경원黃景源, 이복원李福源, 서명응徐命應, 채제공蔡濟恭, 홍국영, 이휘지李徽之 등에 이어
1780년 규장각 제학에 올랐고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제학의 직임을 맡았다.
1780년부터 『규장각지奎章閣志』를 편찬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직서奎章閣直署’라는 편액을 썼다.
1781년(정조 5) 정조는 규장각제학 김종수에게 명하여 규장각의 현판을 쓰도록 하였다.
사진은 규장각에 보관중인 「규장각학사지서奎章閣學士之署」 현판.
규장각 제학으로 있으면서 『규장각고사奎章閣故事』를 편찬하여 올렸는데,
자신이 왕명으로 『명신주의名臣奏議』를 편찬하면서
중국 역대의 고사 중에서 긴요한 것을 뽑아 규장각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즈음 김종수는 왕실도서의 봉안에도 관여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 바로 세운 규장각은 원래 영조의 어제를 봉안하고자 한 것이다.
그 후 정조가 종부시宗簿寺에서 관리하던 역대 임금의 어제와 각판을 모두 규장각으로 옮겨 봉안하고자 하였다.
김종수는 왕실 도서의 수장과 관련한 사례를 두루 조사하여
숙종이 1694년 종부시에 규장각을 설치하여 어제를 봉안한 일과 그 해가 바로 영조가 태어났던 해였음을 보고하고,
숙종이 직접 쓴 규장각 현판과 종부시의 왕실도서를 규장각으로 옮기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리고 그 경과를 「규장각기奎章閣記」로 지었다.
김종수의 문집인 『몽오집』(奎 12316) 권3에 수록된 「규장각고사奎章閣故事」.
김종수는 1785년 다시 규장각 제학이 되었는데 이때도 규장각과 관련한 많은 일을 하였다.
먼저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의 봉모당 정문에 있는 운한문雲漢門의 편액을 썼다.
이 무렵 정조는 대궐 안에 있던 진장각珍藏閣에
역대 임금의 어제 86본, 석각 41본, 목각 211본, 목판 1650편, 회맹옥축會盟玉軸 3본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장각은 대궐 어수당魚水堂의 뒤편 기슭에 있었는데 퇴락한 상태였다.
이에 김종수는 이를 봉모당으로 옮기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리고 진장각에는 숙종이 규장각을 세울 때 직접 글씨를 써서 새긴 천한각天翰閣의 명銘이 있었다.
당시 숙종은 천한각을 세우지는 못하고 이 현판만 먼저 만든 것이었다.
김종수는 이것도 봉모당에 함께 봉안하였다. 그밖에 영조가 편찬한 『갱장록羹墻錄』도 진장각에 있었는데
정조는 속편을 편찬하게 하고 다시 김종수에게 이러한 진장각의 사연을 글로 적어 남기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장각 어제와 어필을 규장각으로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글[珍藏閣御製御筆移奉奎章閣事實記]」을 지었다.
김종수는 규장각 제학으로서 여러 차례 규장각의 춘첩자春帖子를 지어 붙인 바 있다.
1782년 단오에는
“붉은 전각 흰 담장은 그림 같은데,
처마에는 두루 푸른 창포를 꽂았네.
궁녀들 오색 실로 수를 놓아서,
후손들 90명이나 두시기를 축원하네
[丹閣粉墻似畵圖 簷楣遍揷綠菖蒲 宮姬彩線添新繡 繡出螽斯九十雛]”라는 시를 지은 바 있다.
정조는 김종수의 시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1787년 섣달그믐에는 김종수가 쓴 춘첩자를 보고 규장각의 동이루東二樓에서 그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종수는
“하늘이 수북이 눈을 내려 먼지를 깨끗이 씻으니,
봄빛이 잘 돌아오도록 남 몰래 보호하네[天敎積雪凈浮埃 暗護春光好遣回]”라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앞 구절에서 ‘적설’은 김종수를, ‘부애’는 잡류를 가리키는 것이며,
뒷 구절은 정조 자신이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양기를 북돋운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이에 대해 김종수는 정조의 풀이에 동조하되 ‘적설’은 깨끗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달리 말하였지만,
내심은 정조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김종수는 규장각 제학, 홍문관 대제학으로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한의 직임을 담당하는 한편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3. 야인을 지향한 삶
1781년 10월 정조는 화가 한정철韓廷喆을 보내어 규장각 각신의 소상小像을 그리게 하였는데,
김종수의 소상이 완성되자 정조는 직접 소상 위에
“조정에서는 홀로 대의를 맡았고, 재야에서는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으니,
이는 이른바 그 자취가 돌올突兀[우뚝하게 솟음]하고 마음이 텅 빈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라 적었다.
여기에서 김종수는 ‘돌올공탕서주인突兀空蕩墅主人’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정조는 그를 평하여 “급하게 자취를 보면 돌올한 듯하지만,
자세히 마음을 따져보면 실로 텅 비었다[驟看跡似突兀 細究心實空蕩]”라고 평한 바 있다.
또 정조는 그를 두고 “솔직하여 망발을 즐긴다[坦率嗜妄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원래 ‘망발’은 한무제漢武帝가 직간을 자주하는 급암汲黯을 두고 이른 말이지만
정조의 본심은 그의 경솔함을 지적한 것이었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실린 그의 졸기에서도
“매양 경연에서 아뢸 때나 상소문에서 이따금 다른 사람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을 말하였다.
그래서 행동은 매양 급하게 한 때가 많았고 언론은 혹 한쪽으로 치우치는 점도 있었으나,
대체로 또한 명예를 좋아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선비였다.”라 평한 바 있다.
김종수는 ‘돌올공탕’과 ‘탄솔망발’을 듣고 벼슬에서 물러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1779년부터 권력을 농단하던 홍국영이 배척을 당하기 시작하였는데
1780년 2월 김종수가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홍국영은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4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종수가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정조로부터 무슨 언질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써 권력을 얻게 되었지만 자신의 명철보신도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1781년 윤5월에 김종수는 모친의 봉양을 들어
이 집안의 또 다른 별서가 있던 의왕의 백운산 아래로 물러나 자이당自怡堂에서 기거하였다.
‘자이自怡’는 중국 도홍경陶弘景이
“산중에는 무엇이 있는가 묻기에,
산 위에는 흰 구름이 많지만,
그저 나 혼자 즐길 뿐,
그대에게 줄 수는 없다 한다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에서 나온 말이니,
그가 물러난 백운산과 잘 맞아떨어지거니와 청운을 꿈꾸는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백운의 삶을 표방한 것이라 하겠다.
이때 정조는 불과 몇 달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승지를 시켜 대궐로 들어오게 하고는
“경을 본지 오래되었소. 경은 벌써 야인의 모습이 되었구려.”라 하였다.
이에 김종수는 다시 백운산으로 돌아가 ‘야인실野人室’이라 글씨를 써서 자신의 방에 붙였다.
김종수는 젊은 시절부터 청류를 자처하였고 또 그러한 삶을 지향하였다.
벼슬에 오르기 전 20대 초반부터 산수 유람을 즐겼으며,
특히 24세 때에는 이윤영李胤永, 이인상李麟祥, 김상묵金尙默 등과 단양을 유람하면서 맑은 풍류를 누렸고
이후에도 이들 그룹과 산수의 유람을 자주 하였다.
또 낙산 아래 살면서 서화고동을 많이 소장하였던 이유수李惟秀의 집에서
조돈趙暾, 김상묵, 남유용南有容, 유언호兪彦鎬, 윤시동尹蓍東, 심이지沈履之, 윤급尹伋, 이득배李得培, 송재경宋載經,
김익金熤, 김광묵金光默 등과 매일 회합을 가져 십삼학사十三學士라는 일컬음을 받았으며
이때 정초부鄭樵夫로 알려진 양근 출신의 위항시인까지 참석하는 성황을 누렸다.
김종수는 술병을 들고 가서 시를 짓고 바둑을 두며 즐겁게 노닐고 화가를 시켜 이를 그림으로까지 그려두게 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모임의 이면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처럼 청류를 가장한 고도의 정치술이 담겨있다.
김종수의 연보에는 이 모임을 두고 “청의淸議를 회복하고 사풍士風을 남몰래 진작시키되,
문주文酒로 감추어 그물을 피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단순한 현실적인 도피가 아니라 자신들을 청류의 이미지로 만들어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할 목적까지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앞서 정후겸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말한 김종수의 무리가 이들 그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몽오집夢梧集』(奎 12316) 권4에 수록된 「솔옹문답率翁問答」.
「솔옹문답」은 김종수가 몽촌에 은퇴한 이후 스스로를 ‘솔옹率翁’이라 자칭한데 대한 설명을 담은 글이다.
권력을 잡고 난 후 김종수는 청류의 이미지를 명철보신의 방편으로 삼았다.
정조가 이른 대로 ‘돌올공탕’과 ‘야인’의 삶을 적극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래서 김종수는 1781년 11월 아예 솔가하여 몽촌夢村으로 물러났다.
정조가 거듭 벼슬을 내렸지만 그때마다 사직의 상소를 올리고 몽촌으로 내려가 권력에 뜻을 두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김종수가 물러난 땅 몽촌은 오늘날 올림픽공원이 있는 몽촌토성 인근 지역이다.
이곳에는 그의 종숙부 김재로의 별서가 있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1744년 10월 14일의 기록에 따르면 김재로가 영의정의 신분으로 권세를 믿고
사람들을 위협하고 공갈하여 마음대로 마을에다 장사를 지내느라 40호의 집을 허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몽촌과 오금梧琴 일대는 청풍김씨의 선산이 되어 몽촌오금비夢村梧琴碑가 세워지기까지 하였다.
김종수는 몽촌이라는 호를 사용하였거니와 이와 함께 몽오산인夢梧山人이라 자처하였다.
몽오는 그의 선산이 있는 몽촌과 오금을 합친 말이다.
또 산인은 명말청초의 지식인들이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본인의 뜻을 지킨다는 뜻에서 즐겨 사용한 말이다.
곧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는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스스로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판의금부사, 규장각 제학, 이조와 호조, 형조의 판서, 우의정을 차례로 지냈으니
이러한 야인으로 살겠노라는 표방은 제스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김종수는 스스로 야인으로 자처하였지만 권력에 대한 관심은 끊지 않았다.
1793년부터 장헌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을 추가적으로 처벌하자는 채제공의 주장에 맞서다 좌의정에서 물러났고
이듬해인 1794년 정조의 눈 밖에 났다.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남해도南海島에 위리안치되었다.
다행히 얼마 후 바로 석방되어 몽촌으로 돌아왔고, 화를 푼 정조가 그에게 음식과 약을 내려 섭섭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종수는 권력의 무서움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이후 벼슬을 멀리하고 멀리 금강산과 속리산, 경기의 수락산과 현등산, 백운산, 보개산 등을 유람 다니는 일로 소일하였다.
그때마다 정조는 규장각의 서리를 보내어 전송의 글을 직접 지어 보내었다.
특히 1796년 금강산으로 가는 김종수를 위하여 약제를 보내고
「압구정狎鷗亭 등 여러 승경을 두루 유람하고 장차 금강산으로 가려 하는 돌올공탕서주인에게 주다
[贈突兀空蕩墅主人歷覽狎鷗諸勝, 將向楓嶽之行]」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이때 김종수의 나이가 69세였다.
사람들은 늙고 병까지 겹친 그를 만류하였지만 김종수는
“나는 본디 집이 없는 사람일세. 가속으로는 손자 한 명만 있으니 그를 시켜 행장을 가지고 좇게 하면 된다네.
사방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멈출 만한 곳이 있으면 멈추겠네. 이것이 평소의 내 뜻이라네.”라 하였다.
정조는 강원도 관찰사를 통하여 그의 동태를 묻고
“길에서 밥 잘 드시고, 역원에서 편히 주무시게.
넘어지는 일 없이 내산과 외산 빼어난 땅을 두루 밟아 마음의 찌꺼기를 깨끗이 씻고 기한에 맞추어 돌아와서,
지치거나 손상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 지나치게 완상에 빠지지 말고 근력을 잘 헤아리시게.
잘 갔다 편히 오시게. 돌아올 때 갈 때와 같기를 바라네.”라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늙은 신하를 근심하여 이렇게 간곡하게 당부하였으니, 그를 아끼는 정조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김종수가 산수를 가까이 하고 권력을 멀리하였기에 정조는 생의 마지막까지,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그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표하였다.
김종수는 1799년 손자 김동선金東善이 근무하던 포천 관아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노년에 물러나 살던 몽촌 동쪽 정림靜林에 묻혔다.
정조가 내린 제문에서 “몽오의 기슭, 정림의 길[夢梧之麓 靜林之路]”이라 하여 그 노년의 공간을 부각시켰다.
또 김종수의 가묘家廟에 걸도록 보낸 시에서는
“그 옛날 즉위할 때 잡풀을 제거하고서,
일장산 아래로 대인이 돌아갔었지.
가련해라 탕탕공공의 별서에는,
봄빛이 다시 술잔에 들지 못하겠네 [記昔新元闢草萊 日長山下碩人廻 可憐蕩蕩空空墅 不復春光入酒杯].”라 하였다.
정조는 그의 화려한 이력 중에서 정조 자신이 즉위하여 기틀을 잡도록 도와준 일만 기억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텅 빈 마음으로 살다 간 일만 기록하였다. 정조가 김종수에게 원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던 듯하다.
고굉지신((股肱之臣)
다리와 팔에 비길 만한 신하라는 뜻으로, 임금이 가장 믿고 중하게 여기는 신하라는 말.
《서경(書經)》〈익직편(益稷篇)〉에 보인다. 어진 황제로 잘 알려진 순(舜)임금이 어느 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과 같은 신하들은 짐의 팔과 다리요 눈과 귀로 내가 백성들을 위해 돕고자 하니 그대들이 대신해 달라[臣作朕股肱耳目予欲左右有民汝翼 予欲宣力四方汝爲]." 이어서 "나에게 만약 어긋남이 있을 때는 그대들이 나를 보살피며 규정(規正)해 달라. 내 앞에서 순종하는 척하다가 물러간 후에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직접 충고해 달라. 또한 좌우의 동료들과 서로 공격하며 예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관리들은 백성들의 참뜻을 나에게 전하는 것이 임무이므로 올바른 이치를 천하에 선양토록 할 것이며, 잘못을 뉘우치는 자가 있으면 관직에 등용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 철퇴(鐵槌)를 가해 나라의 위엄을 보이도록 하라."
순임금이 성군이 되는 데는 신하들의 보좌가 필요했고,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제도의 준수, 인애(仁愛)와 형벌의 병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같은 뜻의 고장지신(股掌之臣;다리와 손바닥 같은 신하)이라는 말이 있고, 비슷한 말에 주석지신(柱石之臣;나라를 떠바치는 중심이 되는 신하)과 사직지신(社稷之臣: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이 있다. '고굉지신'을 줄여서 '고굉'이라고도 한다.
[출처] 정조의 고굉지신 김종수(金鍾秀)|작성자 곡주
夢梧山人 金鍾秀 墓域 후면에서
曾祖父 金構김구(우의정)
祖父 金希魯김희로(호조참판,동지중추부사)
父 高隱堂 金致萬 고은당 김치만(童蒙敎官동몽교관·侍直시직)
母 豊山洪氏
外祖父 忠敬公洪錫輔충경공홍석보(풍산인,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도승지, 평안도관찰사)
兄 金鍾厚김종후 조선 영조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金鍾秀김종수
配位 海平尹氏 直長직장, 校理교리 尹得敬윤득경의 女
子 金若淵김약연 조졸(早卒) 1750(영조26)~1774(영조50)
조선의 학자. 字 淵淵연연, 號 淵庵연암, 詩文(시문)에 능하고 經學(경학)에 밝았다.
그가 25세에 죽자 처 홍씨(洪氏)도 자진하여 열녀정문(烈女旌門)이 세워졌다
子配 서퇴수(徐退修)의 女
子配 홍직인(洪直人)의 女
孫 金東善김동선
女 徐有守서유수)
女 ?
弟 女 홍익필(洪益弼)
弟 女 한용화(韓用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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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工曹參議 金益善墓域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29
贈工曹參議金公諱益善墓 贈淑夫人珍山陳氏祔 贈淑夫人南陽洪氏祔
증공조참의김공휘익선묘 증숙부인진산진씨부 증숙부인남양홍씨부
증 공조참의 김익선(金益善) 묘역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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