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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군-칠백의총, 의병장 문열공 조헌,중봉선생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7. 25.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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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百義塚칠백의총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워 순절한 700의사의 유골을 안치한 묘소.

사적 제105.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216번지에 있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1592(선조 25) 818일 조헌(趙憲)이 이끄는 의병과 승장 영규가 거느리고 있던 승병이 합군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금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諡號는 문열(文烈)이다.

 

조헌선생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은 싸움이 있은 4일 후 칠백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총'이라 했다 

1603(선조 36)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인조 12)에는 순의단이 설치되어 해마다 제향을 올렸다.

1647(인조 25) 사당을 세워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현종 4) '종용사'라는 사액과 4결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했다.

 

그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사우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파괴한 것을

금산군 사람들이 파괴된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였다.

1971년 깨어진 조각을 시멘트 등으로 다시 붙여 복원하였으며,

2009년 석재로 재차 복원하고 비각도 새롭게 건립하였다.

1963년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0년에 기념관· 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다음 위키백과에서---

 

 

<현종실록> 1663현종 473일  예관(禮官)을 보내

충렬공 고경명과 문열공 조헌과 박사 유팽로에게 제사지내게 하고, 순의단(殉義壇)에 사액하였는데,

단은 금산군에 있었다세 사람은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자들이었다.

 

 

 

 

 

 

순의비각

 

칠백의총중수기념비

"보라 여기는 민족의 혼이 깃든 천추에 전할 거룩한 피의 제단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온통 도탄에 빠졌을 때

중봉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가 뜻을 같이 한 7백 명 의사들과

금산성 밖 연곤평 너른 들에서 왜적에 항전 피나게 싸운 끝에

모두 다 옥쇄하니 818일 의골을 모아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사총이라 이름한 뒤부터 대대로

이 땅 겨레의 자손들이 마음의 예배를 바쳐 왔었다.

그러다 일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분묘 사당 비들이 모두 헐리어

풍우 속에 버린 곳이 되었다가

해방 후 임진 6주갑 되는 해에 군민들의 성력으로 재건했더니

다시        대통령의 특지로 묘역 전체를 보수 정화함으로써

마침내 새 면모를 갖춘 것이니 이는 실로 빛나는 큰 업적이라

만세에 영원히 전할지이다."

<'19714월 이은상 찬, 서희환 서, 문화공보부 세우다 '라는 꼬리말을 달고 있는 칠백의총중수기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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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일제 강점기에 금산경찰서장인 일본인 이시가와 미찌오(石川道夫)에 의하여

이 비가 폭파됐던 것을 인근 주민들이 뒷산에 묻어 두었다가 8.15 해방 후에 다시 파내어 보관 중

19714월에 그 파비(부서진 비)를 붙여 세우고 비각을 건립'했고,

'몸체(비신)와 머릿돌(이수)이 떨어져 분리되어 있던 비를 20099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으며,

비의 규모에 맞춰 비각을 목조 양식으로 개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선생의 이름은 헌,

字는 여식이며, 號는 중봉이다. 정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집이 가난하나 효성이 극진하였고 학문에 열중하면서도 꼭 실천을 앞세웠다.

순절한 이튿날 선생의 아우 범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가서 선생의 시체를 업고 옥천으로 옮겨갔다.

 

한꺼번에 전사한 의사 칠백 명은 모두 선생의 의기를 사모하여 감화를 받은 사람들로

충의를 위하여 일시에 목숨을 바친 분들이니 이번 전란은 물론 과거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중 뚜렷한 사람은 장교로 활약한

이광륜, 임정식, 김절, 이려, 변계온, 양응춘, 곽자방, 김헌, 강충서, 강인서, 박봉서, 김희철, 김인남,

이인현, 이양립, 정원복, 황삼양, 박춘년, 한기, 박찬, 등과 선비로 종군한 박사진, 김선복, 복응길, 몽조 등이다.

아들 완기는 전세가 불리하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하여 화려한 관복으로 위장하고 싸우다 죽었다.

 

적이 퇴각한 뒤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 전승업이 7백 의사의 유해를 모아 한 무덤을 만들었다.

뒤에 제자인 민욱이 지방인사와 상의하고

관찰사와 군수까지 협조하여 비석을 세우게 되고 송방조의 청으로 윤근수가 비문을 지었다.

 

비문의 일부분을 보면...

 

장렬하도다 온 진영의 순국이여

부서졌을망정 완전한 것이며 죽어도 영광스러웠다

침략자를 소탕하고 남방의 지역을 방어하였으므로

국가는 비로소 평화가 깃들었다.

구름은 뭉게뭉게 새들도 구슬피 우는데

장렬한 넋은 한 구덩이에 잠들었도다

천추에 이르도록 이 비문이 읽힐 터이니

여기에 묻히신 영혼이여!

영원히 살아계시는 듯하여라!

 

 

 

 

 

 

 

 

                  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었던 창살(칠백의총 기념관 소장)

조헌 선생이 사용했던 화살통이라고 한다. 

 

조헌 선생의 일기 <조천일기>(칠백의총 기념관 전시)

 

 

 

금산 전투 장면을 그린 <금산 혈전 순절도>

 

 

임금으로부터 왜적을 물리치라는 교서를 받은 조헌이

159274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그 결의를 다지는 <토적 맹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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