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신암면)
[김정희선생고택<안채.사랑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1976. 1. 8 지정)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가 여덟 살 무렵까지 머물던 곳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인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대의 세도가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추사의 11촌 대고모였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이 집안의 영광과 늘 같은 것은 아니어서,
그는 여덟 살 때 친부모와 헤어져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보내지는 아픔을 겪는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의 불가피성은 그의 전 생애의 삶을 관통하는 운명 같은 것이었나?.
어머니와 첫째 부인을 어린 가슴에 묻어야 했고, 양아버지와 스승 박제가의 죽음도 어린 나이에 감내해야 했다.
이런 개인적인 아픔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며
입신한 뒤에는 정치적 핍박으로 유배지를 떠도는 파란 많은 인생을 꾸려야 했다.
<세한도>에는 그의 쓸쓸한 삶이 오롯이 그려져 있다.
추운 겨울, 한기 서린 한 그루 소나무로 그려진
그의 고독한 삶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예술이 지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택의 건물을 지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은 영조의 부마(임금의 사위)였지만
다른 지방의 세력가와 달리 사랑채에 두리기둥을 쓰지 않고 조촐한 네모기둥을 써서 자신을 낮추었다.
권력을 가졌지만 정도를 따르려 했던 추사 집안의 내력을 보여 준다.
남쪽을 보고 앉은 사랑채 앞에는 지나치기 쉬운 볼거리가 하나 있으니
'石年(석년)'이라고 쓰여 있는 네모난 돌기둥이다.
돌과 시간이 합쳐지며 묘한 힘을 느끼게 한다.
'石年'이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지만,
돌기둥의 아래쪽에 그의 서자인 김상우의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돌기둥은 그의 아들 때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글씨도 아들 김상우의 것이 아닐까 한다. 부전자전의 실력을 보여 준다.
아무튼 해시계를 받치던 돌, 받침대로 해시계를 올려놓고 하루의 시간을 가늠했을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걸었던 추사의 고택답다.
<세한도>
김정희, 1844년, 수묵화, 23x69.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180호
무 량 수
사당 입구, 사당은 현재 추사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으로 쓰이고 있다.
추사 고택의 배치 모형도
김정희 선생의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
"우물에는 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만에 완당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고택의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김정희가 태어나자 우물물이 다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고택 측면에 있는 건물로 항시 문이 잠기어져 있는데???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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