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구암 허준(陽平君 龜巖 許浚) 묘역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
구암 허준(龜巖 許浚 )1539(중종 34)∼1615(광해군 7). 『동의보감(東醫寶鑑)』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 묘역은 임진강(臨津江) 건너 비무장 지대의 해발 159m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는 재미 고문서연구가 이양재(李亮載) 등이
『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손좌(巽坐) 쌍분(雙墳)'의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1991년 9월 30일에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쌍분으로 보이는 봉분은 이미 도굴되어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허준의 묘임을 보여주는 묘비, 문인석 2기, 상석, 향로석 등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등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 허준의 묘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묘역은 50여 평 규모로 좌측 묘는 허준, 우측 묘는 부인인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추정된다.
쌍분 위에는 허준의 생모로 추정되는 묘 1기가 더 있다.
북서향인 이들 묘는 『양천허씨족보』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묘비는 두 쪽으로 잘려진 채 땅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마모된 비문 가운데
‘양평군(陽平君)’, ‘호성공신(扈聖功臣)’, ‘허준(許浚)’ 등의 글자가 음각된 점에서
허준의 묘로 단정할 수 있다. 묘비는 113×41×12㎝의 규모이다.
묘 주변에 쓰러져 있는 2개의 문인석은 높이 203㎝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이다.
상석(床石)은 중앙에서 정북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크기는 가로 152㎝와 세로 93㎝의 규모이다.
허준은 1610년(광해군2) 16년 만에 25권의 불멸의 의학서 ‘동의보감’을 완성했으며
동의보감은 한국에서 7번째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용천부사 허론의 서자로 태어나 선조, 광해군 양대를 모신 전무후무한 어의이자
동의보감의 저자라는 것 말고는 삶의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묘소의 존재여부 또한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1991년 9월 30일 허준 묘소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는 고문헌 연구가 이양재교수의 10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였다.
이 교수는 한 통의 간찰(편지)과 양천 허씨 족보상에 나타난 기록
‘御醫扈聖功臣 崇祿陽平君 贈輔國撰東醫寶鑑 婦人安東金氏 墓長湍下浦廣巖洞 巽坐雙墳’
(어의호성공신 숭록양평군 증보국찬동의보감 부인안동김씨 묘장단하포광암동손좌쌍분)
-‘어의를 지냈고, 호성공신에 올랐으며, 숭록양평군에 봉해졌다.
동의보감을 지어 국가에 도움을 줬다.
부인은 안동 김씨며, 장단군 하포리 광암동에 부인 김씨와 함께 손방향에 쌍분으로 있다.’-
발견 당시 봉분은 이미 도굴로 인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음에도
높이 113㎝, 너비 41㎝, 두께 12㎝의 상단 1/4쪽이 떨어져나간 묘비(묘표) 1기와
문인석 2개, 상석 1개, 향로석 1개가 각각 출토, 발견됐다.
이 중 묘비에서 허준묘소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6글자가 판독이 가능했다.
이는 陽平(君), (扈)聖功臣, (許)浚 등이다.
이로서 허준묘소임이 입증되고 주변정비를 마친 2007년에
일반에 공개가 되었으며 동의보감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허준(許浚, 1539년 ~ 1615년)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생전의 관직은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으며,
사후엔 정1품 보국숭록대부 양평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구암 허준 가계도
祖父 許琨 허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父 許碖 龍川府使 허론 용천부사 둘째아들
子 許謙 巴陵君 허겸 파릉군
曾孫 許瑱 巴春君 허진 파춘군
玄孫 許堉 陽興君 허육 양흥군
5代孫 許銑 陽原君 허선 양원군
6代孫 許潝 陽恩君 허흡 양은군
10代孫 許堵 허도1827~1884
13代孫 許亨旭 허형욱 / 1924년생
그는 일찍이 글을 익혔으며, 다방면의 학문에 통달(通達)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유가(儒家),도가(道家),불가(佛家)를 어우르는 동양의 종합적 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허준의 학문적 영역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훗날 동의보감의 집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한성부로 가서,
미암 유희춘 부인의 병을 고쳤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미암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궁중 의사, 곧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1570년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부 장안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1574년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의과 급제자 기록에는 허준의 이름이 없다.
대신 1571년에 종4품 내의원 첨정을 지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최초로 보이며,
1573년에는 정3품 통훈대부 내의원정에 올랐다.
비록 의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동료 의관들보다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578년 9월 허준은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하사받았다.
1587년에는 갑자기 심신이 허약해진 선조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어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다.
이때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안덕수(安德秀) 등과 함께 사슴가죽 1장을 선물로 하사받았다.
이후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인빈 김씨의 아들)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으로 승진했다.
허준이 당상관에 가자되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와 의금부에서 일제히 나서서 탄핵,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陽平君 龜巖 許浚 墓域 양평군 구암 허준 묘역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며,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본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왕세자 광해군의 병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공로로
허준은 정2품으로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급되었다.
이어 허준은 정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올랐다.
그가 정헌대부에 오르자 즉시 삼사의 간원들이 나서서 탄핵,
의관들의 가자를 취소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1595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침치료를 시술하였다.
이때 약방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참여하였다.
1597년 이후 허준은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의서를 편찬,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98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 정2품 중추부지사를 겸직하던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이때 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정1품 양평부원군에 올랐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종1품 양평군(陽平君)으로 강격되었다.
군(君)은 왕의 서자나 당상(堂上)의 위계에게 주어지는 부군(府君)의 관작을 말한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1606년 이어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가자되었으나,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이유로 또 한 번 대간들의 반대를 불러 백지화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유배와 말년
1608년 음력 2월 선조가 병세가 급박하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종래의 예에 따라
조정 신하들의 갖가지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파직당하고 공암(孔巖)으로 문외출송되었다.
문외출송(門外黜送)이란 유배의 일종으로, 죄를 지은 사람을 한성부의 사대문 밖, 곧 지방으로 추방하는 형벌이었다.
광해군은 허준을 빠른 시일내에 복귀시키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허준은 이런 와중에 1596년부터 왕명으로 편찬하고 있던
1610년(광해군 2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15년여의 연구 끝에 편술을 완료하였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 해 음력 11월 22일(양력 1611년 1월 5일) 귀양이 풀리고 신원되어 내의원에 복직하였다.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양력 10월 9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537년생설을 따르면 향년은 79세가 된다.)
다음달에 광해군은 허준의 관작을 그의 생전에 보류되었던
숭록대부보다 더 높은 관작인 정 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양평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사후
그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의 민간인통제구역(DMZ) 안에
허준과 부인 안동 김씨 그리고 생모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이 묘소는 한국전쟁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1991년 군사 협조 아래 역사학자 이양재 교수와 종친회,
그리고 허준선생기념사업회의 조사활동으로 다시 발견되어 현재는 완전히 재정비되어있다.
2006년 5월 군사안보 관광 구역으로 공개되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공원인 구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陽平君 龜巖 許浚 墓域 양평군 구암 허준 묘역
오해
TV 드라마에 허준이 유의태라는 인물로부터 의술을 배웠다고 알려졌지만,
유의태란 이름의 의원은 허준보다 100년 이상 늦은 시기에 활동했을 뿐이며 허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드라마엔 허준이 평안도 용천에서 태어나 경남 산음(산청) 자란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론 경기도 양천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각종 기록에 '양천인(陽川人)'이라고 적혀 있으며 선조로부터 양평군(陽平君)이란 품계를 받은 것을 근거로 들었다.
陽平君 龜巖 許浚 墓域 양평군 구암 허준 묘역
陽平君 龜巖 許浚 墓域 양평군 구암 허준 묘역 측경
陽平君 龜巖 許浚 墓域 양평군 구암 허준 묘역 후경
贈輔國崇祿大夫 領議政醫聖 陽平君許浚重建碑
증보국숭록대부 영의정의성 양평군허준중건비
陽平君 龜巖 許浚 생모墓域 양평군 구암 허준 생모묘역
贈輔國崇祿大夫陽平君 龜巖陽川許公浚之墓重建碑 配貞敬夫人安東金氏祔左
증보국숭록대부양평군 구암양천허공준지묘준건비 배정경부인안동김씨부좌
龜巖齋구암재
허준의 후손 논란
허준에게는 외아들 허겸(許謙)이 있었다.
허겸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거쳐 이후 파릉군(巴陵君)에 봉작받았다.
이후 19대 숙종 때에는 그의 증손자 허진(許瑱)이 파춘군(巴春君)의 작호를 받았으며,
허진의 아들이자 허준의 고손자인 허육(許堉)은 양흥군(陽興君)의 작호를 받았다.
허육의 아들이자 허준의 5대손인 허선(許銑)은 21대 영조때에 양원군(陽原君)에 올랐으며,
허선의 아들로 허준의 6대손인 허흡(許潝) 역시 영조 때 양은군(陽恩君)에 봉작받았다.
이렇게 누대에 걸쳐 후손들이 조정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선대가 살던 경기도 장단군 우근리(현재 경기도 파주시)에 대대로 거주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허준의 10대손 허도(許堵 / 1827~1884)가 황해도 해주로 이주했으며,
13대 종손 허형욱(許亨旭 / 1924년생)이 1945년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이후 그의 직계 종손은 현재까지 북한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남한의 양천 허씨 중 허준의 후손을 자칭하는 사람들은
사실 허준의 진짜 후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양천허씨종친회에서 직접 밝히기도 했다.
陽平君 龜巖 許浚 양평군 구암 허준 가계도
조부 許琨허곤
조모 진주유씨
부 許碖허론
모 영광김씨
양평군 구암 許浚허준
배위 安東金氏
子 許謙 巴陵君 허겸 파릉군
曾孫 許瑱 巴春君 허진 파춘군
玄孫 許堉 陽興君 허육 양흥군
5代孫 許銑 陽原君 허선 양원군
6代孫 許潝 陽恩君 허흡 양은군
10代孫 許堵 허도1827~1884
13代孫 許亨旭 허형욱 / 1924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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