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瀛大君 李璆의 曾孫子 晋川君 李玉貞墓所
임영대군 이구의 증손자 진천군 이옥정묘소
경기 의왕시 내손동 산 151-9
正義大夫晉川君 南原縣夫人尹氏 同封之墓
정의대부진천군 남원현부인윤씨 동봉지묘
正義大夫晉川君 南原縣夫人尹氏 同封之墓
정의대부진천군 남원현부인윤씨 동봉지묘
▲ 진천군 묘갈은 石峯 韓濩의 글씨로 원본을 찾아서 새로 세웠다고 적혀있다.
宗室晉川君墓碣銘종실진천군묘지명
이옥정[李玉貞(1513~1583)묘갈명(墓碣銘) -宋寅 撰 송인 찬 石峯 韓濩 書석봉 한호 서
공의 휘(諱)는 옥정(玉貞)이고, 자(字)는 백강(伯剛)인데, 우리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의 4대손이다.
증조는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이고,
할아버지는 정양군(定陽君) 이순(李淳)이고,
아버지는 덕림군(德林君) 이자(李孜)이고,
어머니 진산 현부인(晉山縣夫人) 강씨(姜氏)는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강학손(姜鶴孫)의 딸이다.
공은 정덕(正德) 계유년(癸酉年, 1513년 중종 8년)에 태어났다.
이미 장성하자 처음에 창선 대부(彰善大夫) 진양 부정(晉陽副正)에 임명되었다.
가정(嘉靖)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에 관작을 이어받아
정의 대부(正義大夫)로 승진되어 다시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공은 위인이 명민(明敏)하고 처사가 정상(精詳)하여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접할 적에
모두 적의하게 하였는가 하면 겸손과 근신을 견지하여 분수 밖의 것은 구하지 않았다.
고사(故事)에
국상(國喪) 3년 동안에 종실(宗室)중에 돌아가며 혼전(魂殿)을 지킨 사람은 관례에 따라 승진되었다.
그런데 공은 그 선발에 들어갔으나 피하고 받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주량(酒量)이 있어서 더러 과도하게 마실 때도 있었다.
덕림공이 몸을 상할까 염려한 나머지 면전에서 경계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공이 이때부터 통렬히 금지하여 평생 동안 한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
공의 생질 중에 패려(悖戾)하여 행실이 나쁜 자가 공이 매우 질책한 것에 앙심을 품고 모함하려고
은밀히 무뢰한 홍인(洪麟)을 사주하여 고변(告變)한 바람에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그의 간사한 정상이 드러나 홍인이 무고의 죄로 처형되었다.
그런데 대간이 공이 고위(高位)에 있으면서 이름이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하여 결국 유배하였는데,
때는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년) 5월이었다.
그 뒤 3년이 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공이 생질을 대할 적에 언어와 안색에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모두 그 덕행(德行)을 볼 수 있다.
공은 만력(萬曆)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7월 19일에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부음에 임금이 명하여 관례에 따라 조문함과 아울러 제사를 지내고 관청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9월 19일에 광주(廣州)의 치소(治所) 서쪽 의곡리(義谷里) 진좌 술향(辰坐戌向)의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다.
부인 남원 현부인(南原縣夫人) 윤씨(尹氏)도 같이 묻혔다.
부인은 증 형조판서(刑曹判書) 윤형(尹衡)의 딸로 어질어 법도가 있었는데, 공보다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이근(李瑾)은 사과(司果)이고,
둘째 아들 이수(李璲)는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부장(部將)이 되었고,
셋째 아들은 이찬(李瓚)이고,
넷째 아들은 이영(李瑛)이다.
첫딸은 현감(縣監) 김요빙(金堯聘),
둘째딸은 승지(承旨) 김제갑(金悌甲),
세째딸은 유학(幼學) 김경지(金景祉)에게 각각 시집갔다.
안팎의 손자 손녀가 15명인데,
현감의 2녀가 가장 나이가 많아 사위는 김문두(金文斗)ㆍ정홍량(鄭弘量)인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측실에서 또 4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경(李瓊)ㆍ이분(李玢)ㆍ이진(李珍)ㆍ이호(李瑚)이고 딸은 모두 시집가서 처첩이 되었다.
공의 장례를 치른 그 다음 해 봄에 공의 아들 이근이
승지가 저술한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을 써달라고 부탁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선친을 알고 있으므로 감히 청한다.”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다 못해 그 행장에 근거하여 큰 것만 뽑아 서술하고 이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훌륭하도다. 세종[英陵]은 우리 동방에 혜택을 입혔도다.
아들을 많이 두심 당연하여 종사(螽斯,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의 노래를 널리 읊었도다.
인후(仁厚)한 임영 대군은 먼 후세까지 존숭하는데, 정양군과 덕림군은 뒤를 이어 높여 봉군하였네.
공이 그 서업을 이어받아 귀한 신분으로 공순히 처세하였도다.
혼자 여러 종실의 다툼 속에서 피하여 근신을 보존하였도다.
아버지의 훈계를 따라 좋아하는 것을 끊고 평생을 마쳤도다.
생질로 인하여 화를 입었지만 인륜의 충정을 변하지 않았도다.
한 가지를 소유하기도 어려운데 미덕이 왜 그리 충만한가?
그대에게 큰복이 내리니 천도(天道)가 어둡지 않았도다. 장수를 누리고 자손이 더욱 번창하였도다.
의곡리(義谷里)의 묏자리에 정기 맺히고 심광(深廣)한 물 있도다.
아름다운 배필을 얻어 마침내 같은 자리에 묻혔도다.
높다란 표석(表石)을 깎고 다듬었는데,
나의 명(銘)이 아첨을 한 것이 아니니 영걸의 기풍을 영구히 전할 것이로다.
가계도
曾祖父 臨瀛大君 李璆 임영대군 이구
祖父 定陽君 李淳 정양군 이순
父 德林君 李孜 덕림군 이자
◆◆◆ 晋川君 李玉貞 진천군 이옥정
子 李瑾이근, ◆◆李瑱이진, 李瓚이찬, 李瑛이영
李瓊이경, 李玢이분, 李璲이수, 李瑚이호
婿 현감(縣監) 김요빙(金堯聘),
婿 忠淸道觀察使兼 原州牧使 文肅公 金悌甲 安東人충청도관찰사겸 원주목사 문숙공 김제갑 안동인
婿 유학(幼學) 김경지(金景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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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瀛大君 玄孫, 晋川君 次男 李瑱 墓所, 임영대군 현손, 진천군 차남 이진묘소
正憲大夫行訓鍊大將全州李公瑱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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