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瀛大君 李璆임영대군 이구(1420년 1월 6일 ~ 1469년 1월 21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8호,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154-1
臨瀛大君 李璆임영대군 이구(1420년 1월 6일 ~ 1469년 1월 21일)
조선의 제4대 왕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구(璆), 본관은 전주(全州), 字는 헌지(獻之)이다.
둘째 형인 수양대군처럼 무술에 능하였으나 궁녀와 대궐의 하녀들과의 성추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계유정난 이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을 지지하여 그를 도왔다.
예종 때의 정승 귀성군 이준의 아버지였고,
영의정 신승선의 장인이며,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는 그의 외손녀였다.
또 단경왕후의 친정아버지 신수근은 그의 외손자였다.
諡號는 정간(貞簡)이다.
임영대군 이구는 1420년(세종 2년) 1월 6일
세종대왕과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의 넷째 아들이며 문종, 세조의 친동생으로 태어났다.
둘째 형인 수양대군처럼 무술에 능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긍지를 가지고 부모와 형제에게 효우(孝友)를 지키며 청백하게 생활하였다.
성격에 꾸밈이 없고 사특(私慝)함이 없어서 늘 진실하고 대쪽같다고 칭찬을 들었다.
1428년(세종 10년)에 대광보국 임영대군(大匡輔國 臨瀛大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명나라의 사신인 지신사 정흠지(鄭欽之)로부터 단자(段子) 5필을 선물로 받았다.
1430년(세종 12년)에 형 수양대군(晉平大君) 이유(李瑈, 뒷날의 세조),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무예에 능하여 1433년 3월에는 형 수양대군과 함께 경회루에서 승마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부왕 세종의 총애가 깊어 세종은 여러번 그의 집에 거둥하였다.
무인기질이 강하였지만 그의 가정사는 불행하였다.
첫 부인은 개국공신 남은의 손자로 문종때 좌의정을 지낸 남지(南智)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정신질환이 있었다. 혼인한지 한달 뒤인 1433년(세종 15년) 6월 14일 세종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등을 불러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는 나이가 12세가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눈빛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놀라고 미친듯한 모습이기에 내쳐야 되겠다" 는 뜻을 내비쳤다.
그 후 혼인한지 한달만에 군부인 남씨는 강제 이혼을 당했고
임영대군 이구는 1433년 12월 의정부우찬성 최사강의 손녀이자 최승녕의 딸을 부부인으로 간택하였다.
최승녕은 출세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버지 최사강은 문과 급제자도 아니면서 의정부 우찬성(종1품)을 지낸 권세가이며
조부는 전주최씨의 중흥을 일으킨 평도공 죽정 최유경(平度公 竹亭 崔有慶)이다.
濟安府夫人 崔氏의 고모이며 최사강의 다른 딸 둘은
세종의 서제(庶弟)이자 태종 이방원과 신빈 신씨 사이의 소생 서자인 함녕군의 부인이 되었고,
다른 딸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의 부인으로 태종, 세종 부자의 사돈이 되었고
또 이때 그의 장남 최승녕의 딸까지 임영대군의 부인이 되어 왕실과 삼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제안부부인 최씨에게 5남 2녀를 두었으며,
세 번째로 안동안씨와 재혼하여 4남5녀를 낳았다.
임영대군의 장남 오산군은 후사(적자)없이 사망한다.
1437년 관료와 왕족들에게 내려진 과전의 양이 너무 지나치다는 여론이 나오자
형 수양대군, 안평대군과 함께 받은 과전 3백 결에서 각각 50결을 감하여 도로 반납하였다.
1439년(세종 21년) 작첩을 빼앗겼으나 1440년 다시 임영대군에 봉해졌다.
1442년 원윤이 되었으며, 아버지 세종이 그에게 총통 제작을 맡기어서 군기감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세종의 명을 받아 동생인 금성대군과 함께 총통, 화차를 제작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맏형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1452년 문종이 죽고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면서
황보인, 김종서 등이 황표정사를 빌미로 국정을 장악하려 할 때 크게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후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질 때 그는 둘째 형인 수양대군의 편을 들었다.
이듬해인 1453년에 계유정난이 발발하여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임영대군은 수양대군을 크게 도왔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는데 일조하였다.
세조 반정을 지지한 덕에 임영대군은 양녕대군, 효령대군과 함께 왕실의 수장격이 되었고
형제들인 문종,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과 달리 큰 시련을 겪지 않았다.
예종 원년인 1469년 1월 21일에 50세로 사망하였다.
죽으면서 첫째가 왕자간에 서로 분쟁을 일으키지 말 것과
둘째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하는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슬하에 9남 2녀가 있는데
그 중 임영대군의 아들 구성군은 훗날 영의정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나,
도리어 정희왕후에게 숙청당하여 유배되었다.
朝鮮國王子臨瀛大君貞簡公之墓
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
의왕-진천군 이옥정(李玉貞),훈련대장 이진(李瑱),임영대군 후손 (0) | 2016.12.06 |
---|---|
의왕-제안부부인, 임영대군 계배 (0) | 2016.12.04 |
포천-금수정 암각문,무릉,금대,경도,중금옹,동천석문,회란석,(金水亭) (0) | 2016.11.30 |
포천-금수정-포천시향토유적제17호, 안동김씨고가-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8호 (0) | 2016.11.30 |
고양-우송당황윤길 병조판서 友松堂 兵曹判書 黃允吉,장수황씨 황징 (0) | 2016.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