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溫公主 昌寧尉 金炳疇 복온공주 창녕위 김병주 묘역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죽릉리 산99-1
安東金氏東江公(諱 甯漢)派 竹陵先塋之記
안동김씨동강공(휘 영한)파 죽릉선영지기
殉國先烈 墓域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죽릉리 산99-1
이곳은 殉國先烈 梧泉오천 金奭鎭김석진(1843~1910)선생의 묘역이다.
선생은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항일지사이며, 경술망국에 순절하였으니
본관은 安東, 字는 景召경소, 號는 梧泉오천 이다.
병자호란때 척화신 左議政 淸陰김상헌,領議政 文谷 김수항, 澤齋택재 김창립선생의 後로
순조부마 창녕위 金炳疇김병주 선생의 孫子이다.
철종11년(1860) 문과에 급제 홍문관교리 사간원정언,호조정랑,사헌부지평,장령,동례원좌통예,철종실록편수관,
사간원사간,승지,병조참의,참지,수안군수,성균관대사성,경주부윤,이조참의,예조참판,지성균관사,
이조`호조`형조`공조참판,한성좌유윤,좌우승지,광주부유수겸남한수어사,형조판서,춘추관사,대호군,
비서원경,장례원경,귀족원경,숭록대부,판돈령원사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음해 1월 22일 5적신의 처형을 상소하며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으로 폐하기로
되어있으니 외국공사에게 성명을 내고 매국노를 주살하여 국헌을 바로잡아 백성을 생지옥에서 구하라고 하였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上奏(상주)하기를 매국노들과는 不共戴天(불공대천)이라,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반열에 설 수 없기에 懿孝殿享官(의효전향관)의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을미고종 32년(1895) 양근 연양에 은거하였다가 을사늑약으로 국가 위기를 맞아 경사(경사)로 돌아오니
10년이 지났고 정미융희원년(1907)에 오헌병사(오헌병사)로 돌아왔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고 전직 고위관료에게 작위와 금전으로 회유책을 쓸 당시에 선생에게도 남작위가 주어지니
1910년 9월8일 일사보국의 결심으로 미리 준비하였던 아편을 마시고 순국하니 향년 68세이다.
선생은 吾峴先塋(오현선영:서울 강북구 번동)에 葬(장)하였다가,
양주군 와부면 율석리 선영을
이곳으로 緬奉(면봉)함에 1993년 5월 遷奉(천봉)하였다.
福溫公主 昌寧尉 金炳疇
,복온공주 월성위 김병주묘소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년 음력 10월 26일 ~ 1832년 음력 5월 12일)
순조와 순원왕후의 차녀.
1818년(순조 18년) 음력 10월 26일 조선의 제23대 왕인 순조와 순원왕후의 차녀로 태어났다.
문조(효명세자)와 명온공주의 친동생이며, 덕온공주의 친언니이다.
덕온공주의 모후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김조순의 딸이다.
순원왕후는 자신의 집안이 풍양 조씨 가문과 함께
조선 말기 세도 정치의 절정기를 이끌어 나가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이기도 하다.
7살 때인 1824년(순조 24년) 음력 9월 20일 정식으로 공주에 책봉되어 복온공주(福溫公主)라고 하였다.
이후 13살 때인 1830년(순조 30년) 음력 3월 28일 삼간택을 거쳐
부사과를 지낸 안동 김씨 김연근의 아들 김병주와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며,
김병주는 창녕위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 해 음력 4월 28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혼인 2년만인 1832년(순조 32년) 음력 5월 12일 1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때 순조는 현종의 딸 명안공주의 예에 맞추어 장례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조정의 관원들에게 장례에 미진한 부분이 없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또 성복을 하는 날에는 순조가 직접 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 일찍 사망하여 소생은 없었다.
복온공주의 묘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에 마련되었으며, 훗날 남편 김병주와 합장되었다.
당시 이 인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 지역의 이름을 공주의 무덤에서 유래하여 "공주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성북구 번동에는 복온공주와 김병주의 재사인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가 있으며,
이 재사는 2002년 9월 13일 서울특별시의 등록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복온공주가 사망하고 불과 한달 후인 1832년(순조 32년) 음력 6월 13일,
공주의 친언니인 명온공주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순조의 자녀는 셋째 딸인 덕온공주를 제외하고 모두 부왕보다 일찍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순조보다 오래 산 덕온공주도 1844년(헌종 10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편 복온공주가 졸한지 21년후인 1853년(철종 4년) 남편 김병주는 음력 2월 19일 사망하였다.
복온공주가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갈 때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던 궁중술의 한 종류인 삼해주의 제조법을 가지고 간 후,
대대로 안동 김씨 집안에서 삼해주의 제조법을 계승하게 되었다.
삼해주는 1993년 2월 13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복온공주가 혼례 때 입었던 활옷이 남아있다.
///복온공주 가족관계///
아버지 : 조선 제23대 왕 순조 (純祖, 1790년~1834년, 재위:1800년~1834년)
어머니 : 순원왕후 (純元王后, 1789년~1857년)
오빠 : 문조 (文祖, 익종, 효명세자, 1809년~1830년)
조카 : 조선 제24대 왕 헌종 (憲宗, 1827년~1849년, 재위:1834년~1849년)
언니 : 명온공주 (明溫公主, 1810년~1832년)
동생 : 덕온공주 (德溫公主, 1822년~1844년)
시아버지 : 안동 김씨 김연근 (金淵根, 생몰년 미상)
남편 : 창녕위 효정공 김병주(昌寧尉 孝貞公 金炳疇, 1819년~1853년)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 순조의 둘째딸
계자 김도균(金道均)
계손자 형조판서 오천 김석진(梧泉 金奭鎭) 한일병합반대순국 건국공로훈장
증손자 동강 김영한(東江 金甯漢)
현손 번계 김윤동(樊溪 金潤東) 창문여고 설립자
5대손 경인 김문현(褧人 金文顯, 1913~1974)
5대손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
5대손 백아 김창현(白牙 金彰顯, 1923-1991)
5대손 여초 김응현(如初 金應顯, 1927~2007)
철종 4년 계축(1853) 2월 19일(갑오)
昌寧尉 金炳疇 卒記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도위(都尉)의 단정하고 엄숙한 자태와 겸손하고 절약하는 몸가짐은
마음속으로 천수(天壽)를 길이 누리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오랜 병으로 갑자기 서단(逝單(부고(訃告))을 보게 되니,
옛날을 더듬어 생각하매 슬픔이 더욱 간절하다.
하물며 우리 동조(東朝(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슬퍼하시는 성회(聖懷)이겠는가?
창녕위(昌寧尉)의 상사(喪事)ㆍ예장(禮葬) 등의 절차는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고,
동원 부기(東園副器(궁궐에서 쓰던 판재(板材)) 1부(部)를 실어 보내도록 하라.”하였다.
김병주는 이판(吏判) 김학순(金學淳)의 손자이다.
몸가짐이 수미(秀美)하고 성품과 도량이 간묵(簡默)하여 유소(儒素)의 가법(家法)을 지켰으며,
내려 준 저택에는 하나도 치장을 더하지 않았다.
창두(蒼頭)와 응사(鷹師)들의 발자취가 마을 사이에 이르지 않았다.
원림(園林)의 종고(鍾鼓)는 세상을 잊은 것과 같이 맑았으며,
시절(時節)에 기거(起居)하는 외에는 문을 닫고 내객을 거절하여,
스스로 화려한 기환(綺䊵)의 테두리에서 벗어났으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모두 칭송하였다.
有明朝鮮國綏綠大夫昌寧尉安東金公炳疇之墓 福溫公主 祔左
유명조선국수록대부창녕위안동김공병주지묘 복온공주 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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