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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 안동김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2. 18.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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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 묘소/ 1212~ 1300)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산 19-1

 

 

충렬공김방경(忠烈公 金方慶, 1212~ 1300)

고려 말기의 원종 때부터 봉공한 무신이자 문신이다.

는 본연(本然), 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이며,

김사렴, 김사형의 고조이다.

안동 김씨의 중시조이다.

 

 

忠烈公 金方慶충렬공 김방경 1212(강종1)1300(충렬왕26)

는 본연(本然), 諡號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의 아들.

고종때 음보(蔭補)로 올라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였고,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렀다.

이때 몽고병이 침입하자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 농사를 짓게 했다.

1263(원종 3)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하였고,

뒤에 상장군으로서 남경 유수로 좌천되었으나 전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서북 여러 성에서 진정이 있어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를 거쳐 1269(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 세조가 보낸 맹격도의 2천군사와 함께 임연을 치려고 동경에 이르렀으나,

왕이 복위된 것을 알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1270년에 장군 배중손(裵仲孫)등이 승화후(承化侯) ()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진도로 들어가 웅거하며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고의 장군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적장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장군 흔도,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또다시 탐라에 들어가 삼별초를 쳐서 이를 완전히 평정했다.

그 후 시중(侍中)이 되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금안(金鞍)등을 하사받고,

돌아와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馬山)에 정동행성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으로 출정, 25천명의 여원 연합군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를 친 다음

본토로 향하는 도중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8년에는 앞의 일본 정벌중에 좌군수 김신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부사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고, 진도의 삼별초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홀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낭장 노진의(盧進義)의 가산을 몰수케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로부터 '국왕과 원나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도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에 흔도, 홍다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청도로 귀양 갔다가 충렬왕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81(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 정벌을 할 때 고려군 도원수(都元帥)로서 종군(從軍),

일본 이끼조를 거쳐 하까다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풍과 적의 기습을 당하여 패하고 돌아왔다.

1283(충렬9, 72) 12월에 퇴직을 간청하자

추충정난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推忠靖難定遠功臣 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1)

상락공(上洛公)의 작호를 더하여 치사(致仕)하였다.

그 후 1295(충렬21, 84)에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가봉(加封) 되었고

첨의령(僉議令-최고 관직)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안동지방에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호(食邑1千戶, 食實封 3百戶)를 하사 받았다

 

89세인 1300년 음력 816일에 개경 백목동 앵계리(開京 栢木洞 鸚溪里)에서 훙()하고

묘는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능골에 있다.

몰 후 7년 뒤인 1307(충렬33)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에 추증(追贈) 되고,

시호(諡號) 충렬(忠烈)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신도비(神道碑) 건립을 하명 받았다.

을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한다. 시제는 음력 109일이다

 

 

 

高麗推忠靖難定遠功臣壁上三韓 三重大匡僉議中贊世子師上洛郡開國公 諡忠烈 金方慶之墓

고려추충정난정원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첨의중찬세자사 상락군개국공  시충렬 김방경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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