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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명옥헌원림(鳴玉軒 苑林), 명승 제58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3. 2.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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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명옥헌 원림,潭陽 鳴玉軒 苑林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후산길 103

 

 

 

 

 

 

 

 

 

 

 

 

 

 

 

 

 

 

 

 

 

 

 

 

 

 

 

 

 

 

 

 

 

 

 

 

[潭陽 鳴玉軒 苑林 담양 명옥헌 원림] 명승 제58(2009.09.18 지정

붉은 꽃들의 자미화(紫微花) 정원

 

 

* 연못과 정자, 백일홍이 아름다운 곳, 명옥헌원림 *

명옥헌원림은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에 위치한다.

별뫼의 원림들보다 한세대 뒤인 1625,

명곡 오희도(1583~1623)를 기리기 위해 그의 넷째 아들인 오이정(1619~1655)이 도장곡에 창건하였다.

명옥헌은 정면 3,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로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의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다.

 

 

 

 

明谷吳先生遺蹟碑

명곡오선생유적비

 

吳希道 오희도, 1583(선조 16)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는 득원(得原), 는 명곡(明谷).

曾祖父  吳世勳오세훈

   祖父  吳謜오원

      父  吳彦彪오언표

      母  順天朴氏순천박씨  朴命星박명성의 딸.

 

1602(선조 35)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인조 1)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의 관원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데 민첩하여 여러 대신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검열에 제수되었다.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으며 형제와 함께 살면서 독서하며 서로 권면하였다.

금성(錦城)의 옛 고향 대명곡(大明谷)에 거처하면서 명곡(明谷)이라 字號하며,

만년에는 뒷산 기슭에 집을 지어 망재(忘齋)라 하였다.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는 소장귀천(少長貴賤)을 막론하고 두루 환심을 얻었다.

 

 

 

 

 

 

 

 

德陽羅州吳公大寬先生孝子碑

덕양나주오공대관선생효자비

 

2001년에 세워진 효자비(孝子碑)로 찬자(撰者)는 강하정(姜夏亭)이고 書者는 이남진(李南鎭)이다.

비문에 의하면 오대관(吳大寬1656~1708)은 오희도(吳希道)의 증손으로,

1656년에 창평현(昌平縣) 후산리(后山里)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부친상시 장례를 법도에 따라 엄격하게 행하였고,

 3년 동안 죽을 마시며 날마다 모친을 20() 밖에서 배알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도 상제(喪制)를 전()과 같이 하고

탈상(脫喪)후에는 성리학(性理學)에 힘을 써 호남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명옥헌(鳴玉軒)이라는 현판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씨라고 하는데,

두 연못 사이를 흐르는 물속 바위에 송시열의 시귀절이 새겨진 "명옥헌 계축" 이라는 글이 있는데,

현재 명옥헌 현판에 걸려있는 글씨는 이 글을 그대로 모각한 것이라 한다.

 

 

 

명옥헌에 걸려 있는 삼고(三顧)’라는 편액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오희도를 중용하기 위해 멀리서 세번씩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명옥헌 후면의 도장사(道藏祠)유허비 표석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 모시던 사당이 있던 곳이라고...

 

 

 

명옥헌은 연못 주변에 심어진 약20여 그루의 배롱나무로 유명하다.

꽃 이름과 같이 여름철이 되면 석달 열흘 동안 늘 붉은 꽃나무 열에 연못이 둘러싸이게 된다.

바깥으로는 다시 소나무들이 열 지어 서 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전국의 인재를 찾아 호남지방을 방문할 때

후산에 머물고 있는 오희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명옥헌의 북쪽 정원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들 나무 밑에 인조(仁祖)가 타고 온 말을 맸다고 하여

이 나무를 일명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 또는 인조대왕 계마상 (仁祖大王 繫馬像)’이라고 부른다.

현재 오동나무는 고사하여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인조는 오희도를 등용하기 위해 세 번 찾아왔다고 하며,

훗날 우암 송시열은 명옥헌의 영롱한 물소리와 경치에 반하여 명옥헌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기기도 하였다.

 

 

조선 중엽에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산천경계를 벗하며 살던 곳으로

별뫼의 원림들 보다 한세대 뒤인 1625년 

오희도(1583~1623)의 넷째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선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거하면서 만든 정원이며,

정철의 아들 정흥명이 지은 명옥헌기(鳴玉軒記)에는

명옥헌을 오희도의 손인 오대경이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의 주인인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1583162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1602(선조 35)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인조 1)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관원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데 민첩하여 여러 대신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검열에 제수되었다.

벼슬에 큰 뜻이 없었던 그는 당시 광해군 재위기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모시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전하는데,

어머니와 후산마을에 정착해 산기슭에 망재(忘齋)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공부에 매진했으며,

때때로 고개 너머에 있는 장계골에서 자연을 즐겼다고 합니다.

오희도는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으며 형제와 함께 살면서 독서하며 서로 권면하였고

금성(錦城)의 옛 고향 대명곡(大明谷)에 거처하면서 명곡(明谷)이라 字號하며,

만년에는 뒷산 기슭에 집을 지어 망재(忘齋)라 하였으며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는 소장귀천(少長貴賤)을 막론하고 두루 환심을 얻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천연두에 걸려 41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저서로는 명곡유고(明谷遺稿)가 남아있다.

 

 

 

 

명옥헌 원림(鳴玉軒 苑林)에서,

유독 명옥헌 만이 원림 (苑林)이라고 쓰고 있는데,

사전에 원림은 '집터에 딸린 숲'으로 되어 있다.

원림(園林)은 동산, 계곡, , 숲 등을 자연 상태로 두고

적절한 위치에 집과 정자를 배치한 고려시대의 전통 정원으로,

경관이 좋은 곳에 약간의 쉼터를 짓고 나무와 돌을 정돈하는 정도로 꾸몄을 뿐,

자연의 질서를 심하게 흐트러뜨리거나 조작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즉 자연경관이 주인이고 인공 경관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속에는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관념이 깃들어 있어서,

대표적인 원림으로 장흥의 부춘정 원림, 담양의 독수정 원림과 소쇄원, 화순의 임대정 원림 등이 있다.

원림에는 원림(苑林)과 원림(園林)이 있는데

명옥헌 원림은 원림(苑林)이고

독수정 원림은 원림(園林)으로 표기 하는데,

원림(苑林)과 원림(園林)의 차이는 원()과 원() 차이인데,

사전에서는 둘을 혼용해서 쓰고 있지만

담장이 있으면 원림(園林)으로 

담장이 없으면 원림(苑林)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다른곳에도 원림이 많이 있으나

명옥헌 원림(苑林)을 제외하고 모두 원림(園林)을 사용하고 있다.

 

 

 

 

鳴玉軒癸丑/명옥헌계축

 

 

계축이란 명옥헌이 처음 세워진 해로 1673년을 말하며,

명옥헌(鳴玉軒)은

계곡사이로  물이 흐르면 옥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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