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성 보국문
담양 금성산성(潭陽 金城山城) 사적 제353호
충용문
전남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산89-1 주차장에서 출발
보국문
담양금성산성潭陽金城山城 사적 제353호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대성리 등
고려∼조선시대 호남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산성산으로도 불리는 금성산 줄기의 해발 350∼600m 능선에 쌓은 산성이다.
길이가 3km에 가까운 큰 규모로,
전라남도 장성의 입암산성, 전라북도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 3처산성(三處山城)으로 불렸다.
1380년(우왕 6) 9월 왜구가 남원성을 공격하고 운봉현을 약탈한 뒤,
“광주의 금성(金城)에서 전마(戰馬)를 배불리고서 북상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금성’은 금성산성으로 보인다.
산성 축조에 대해서는 1410년(태종 10), 1597년(선조 30), 1610년(광해 2), 1653년(효종 4)에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804척이며, 성 안에 9곳의 샘과 제사처인 신사(神祠)가 있다고 하였다.
처음 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혹은 신라말 고려초라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산성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듯하다.
1237년(고종 34)에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라고 하면서 봉기한 이연년(李延年)이
담양군과 원율현(原栗縣)을 거점으로 세력화하고서, 산 속에서 무리를 불러모아 촌락을 노략질하였다.
당시 이들은 원율현에 위치한 금성산성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이전인 1256년(고종 43)에는 몽골의 차라대 군대가 담양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금성산성은 담양, 광주 등 주변 지역민의 입보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외성과 내성의 2중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의 둘레는 2㎞, 내성의 둘레는 700m이다.
성곽의 높이는 3m 이내이며, 성벽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 이외에 특이하게도 주변에서 산출한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문터는 본성에 동서남북 4곳이 있고, 내성 2곳, 외성 1곳 등 모두 7곳이 있다.
4대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은 서문인데, 서문과 동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서문 남쪽에는 성벽을 3m 정도 터내서 만든 대형 수구(水口)가 있다. 건물터는 모두 16곳이 확인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국문에서 바라본 충용문
충용문에서 바라본 보국문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금성산성
行別將鞠侯文榮淸德永世不忘碑
행별장국후문영청덕영세불망비
"산성의 책임자였던 별장 가선대부 국문영의 청덕영세불망비다.
비는 호패형으로 된 공덕비로 1877년 (고종14년)에 세워졌다.
형태는 좌대없이 세워졌으며, 크기는 높이 134cm, 너비43cm 두께 19cm로 만들어져 있다."
금성산성 노적봉을 오르며
노적봉에서
담양 금성산성 철마봉에서
금성산성 철마봉에서 내려다 본 담양호줄기
하산길에 충용문과 보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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