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壯公沈岱將軍 충장공심대장군 묘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산119-1, [처인성로827번길 116-5]
충장공심대장군 忠壯公沈岱將軍 청원군(靑原君)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산119-1, [처인성로827번길 116-5]
심대(沈岱)[1546~1592]의 본관은 청송
字 공망(公望), 號 서돈(西敦), 諡號 충장(忠壯)이다.
유학(幼學)으로 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正字)·박사·수찬(修撰)을 지내고, 1584년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이 때 동서의 붕당이 생기려 하자, 언관으로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으며, 이어서 사인(舍人)·사간을 역임하였다.
忠壯公沈岱將軍 충장공심대장군 묘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輔德)으로서 근왕병 모집에 힘썼다.
그 공로로 왕의 신임을 받아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지내며 승정원에서 왕을 가까이에서 호종하였다.
왜군의 기세가 심해지면서 선조를 호종하여,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수행하였다.
권징(權徵)의 후임으로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경기도 일대의 왜군을 격퇴하고,
나이 46세 되던 해서울을 수복할 계획으로
한양성내(漢陽城內)의 백성들과 내통할 계획을 세웠으나 연천군에서 왜군의 야습(夜襲)을 받아 전사하였다.
전쟁 중 장군의 시신은 조카인 沈大觀심대관(參奉 扈聖原從勳)이 몰래 수습해 삭령 뒷산에 안장하였는데,
왜적에게 발각돼 심대 장군으로부터 심한 타격을 입었던 왜군은
장군의 관을 쪼개고 그의 머리를 베어 서울 거리에 전시하였는데, 60일이 지나도 마치 산 사람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다행히 양주목사 고언백의 비상수단으로 수습해 예우를 다해 보관하다 강화로 보내졌다가
임진왜란이 평정 된 후에 남양에 안장했고
이 비보가 행재소(行在所)에 전해지자, 선조는 그를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고,
임진왜란 뒤에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한 다음 청원군(靑原君)에 봉하고 충장(忠壯)이라 시호를 내렸다.
1604년(선조37)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면서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심대는 본래 문관 출신이나 전사 당시 군병을 이끌고 진영에서 전사하였다.
이런 이유로 경기도에서 그의 묘소를 문화재로 지정할 때 장군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심대 장군의 묘는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1975년 묘 아래에 있던 낡은 사당을 해체, 복원하였고,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심대 장군의 묘소는 단분으로 묘 앞에는 묘표 1좌와 상석, 그리고 망주석 2기만이 있는 단촐한 분묘이다.
豊儲倉直長풍저창직장/충좌위부호군 全義人 李忠이충의 묘비문을 썼다.
忠壯公沈岱將軍 충장공심대장군 묘소
忠壯公沈岱將軍 충장공심대장군 묘소
〈심대 간찰〉, 『근묵』, 행서, 28×20.7㎝,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임진왜란 중에 보낸 편지.
출처 © 성균관대학교박물관 | 이미지 사이즈 607x800 | 한국학중앙연구원
<심대 공신교서>1607년(선조 37) 1607년. 필사본. 261㎝x48.5㎝. 보물 제1175호. 개인 소장.
출처 © 경기도박물관 | 이미지 사이즈 960x444 | 한국학중앙연구원
충장공 심대장군과 五男 沈大孚심대부 묘역
앞쪽이 심대부
沈大孚심대부 -성산현감, 경상도사.
1586(선조 19)∼1657(효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字는 신숙(信叔), 號는 가은(嘉隱)·범재(泛齋).
심광종(沈光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천군수 심의검(沈義儉)이고,
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 심대(沈岱)이다.
어머니는 전라감사 최홍한(崔弘僴)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3년(인조 1) 선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중림찰방(重林察訪)을 거쳐, 1630년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2년 형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관직에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때 이미 사사(賜死)된 인성군(仁城君)의 세 아들이 절도에 위리안치된 것을 왕이 관용을 베풀어 방면하자,
이에 찬성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반대파의 탄핵으로 보령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34년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다. 가도(椵島)에 진을 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여러 고을을 횡행하며 민폐를 끼치자, 이들 대표와 횡포를 금하는 조약을 엄중히 체결하여 민폐 방지에 공헌하였다. 뒤에 서로(西路)의 행정이 부패한 데 혐오를 느껴, 한때 사직했다가 다시 복직하였다.
이어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38년에는 또다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해 삼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삼남도사 겸 진정사를 택정할 때 경상도사로 뽑혔으며,
이어서 수찬·헌납(獻納)·종부시정을 지냈다.
1643년 성산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응교(應敎)·시강관(侍講官)·필선(弼善) 등을 역임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사간으로서 유계(兪棨) 등과 조(祖)자의 묘호를 반대하였다.
이에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갔다가 1657년에 풀려났다.
이 해에 졸 하였고, 사후 신원되었으며,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범재(泛齋) 심공(沈公)의 묘갈명(墓碣銘)
공은 휘는 대부(大孚)이고 字는 신숙(信叔)이며, 성(姓)은 심씨(沈氏)이다.
그의 선대(先代)는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로부터 비로소 번성해졌다.
청성백이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을 낳았으니, 이분이 우리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이다.
공에게는 6세조(世祖)가 되며 5세조(世祖)는 경기 관찰사 심대(沈岱)로서 선조(宣祖)를 섬겨 임진란 때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는 데에 따라갔다가 기성(畿省 경기 관찰사를 가리킴)에 제수하는 명을 받고 적병(賊兵)을 치다가 전사하였다.
임금이 그의 충성을 포상(褒賞)하여 원훈(元勳)에 넣어 영의정에 추증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으로 봉하였다.
부인 최씨(崔氏)는 우윤(右尹) 최홍간(崔弘幹)의 딸이다. 관찰공(觀察公)이 세상을 떠날 때 공은 일곱 살이었다. 공이 집상(執喪)하는 데에 있어서 그 표정이 너무도 애처로워 보는 이들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공이 점점 자라자 최 부인이 경계하기를,
“과부(寡婦)의 아들은 세상 사람들이 친구 삼는 것을 꺼린다. 그게 싫다면 글을 읽어서 품행을 잘 닦는 수밖에 없다.”하니,
공이 추연(愀然)히 근심하는 빛을 띠더니, 굳은 결심으로 학문에 힘써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서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뵙고,
《심경(心經)》을 배웠다. 정 문숙공(鄭文肅公 문숙은 정구의 시호(諡號))은 공이 훌륭한 재능이 있음을 보고
《주례(周禮)》 1부(部)를 주면서 말하기를,
“주(周) 나라의 도가 여기에 실려 있으니, 힘써 공부하라.”하였다.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공이 28세로 진사에 1등으로 뽑혔다.
최 부인이 늙자, 공은 형을 공경히 섬겨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형이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고 근심하는 것을 근심하니, 그의 형은 언제나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던 해(1623) 3월에 선행(善行)으로 처음 사포서 별제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6월에 그의 형이 부모에게 잘하지 못한 죄로 북변(北邊)에 유배(流配)되었는데
매맞은 상처에 구더기가 생기자 공이 그곳을 빨았으며, 도보(徒步)로 다니느라 발이 부르텄지만
그래도 2천여 리 길을 부지런히 왕래하니, 사람들이 더욱더 어질게 여겼다.
이듬해 중림역 찰방(重林驛察訪)이 된 지 1년 만에 최 부인(崔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죽을 먹고 여막(廬幕)에서 3년을 살았다.
경오년(1630, 인조8)에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니, 효종(孝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였다.
대군이 사사로이 사부에게 간식(間食)을 대접하였으나, 공이 먹기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예우(禮遇)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10)에 여러 번 옮겨 형조 좌랑이 되었고,
계유년(1633, 인조11)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에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왕자(王子)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은 이미 사사(賜死)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세 아들을 해도(海島)에 유배(流配)하였다가, 임금이 특별히 너그럽게 석방해 주었는데,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쟁론(諍論)이 그치지 않자,
공이 말하기를,
“이런 처사는 전하의 성덕(盛德)이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잘 깨우쳐 인도하지도 못하고
또 일어난 뒤에 뜻을 받들어 순종도 못하였으니, 전하에게 보답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역적의 도당이라 지목하여 보령 현감(保寧縣監)으로 내보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1634, 인조12)에 송화 현감(松禾縣監)이 되었는데, 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주둔하였는데,
그의 아전과 졸개들이 군읍을 다니면서 하는 일이 방자하여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이 조약(條約)을 엄히 하여 횡포를 금하게 하고, 그 고을 자제를 모아 예의로써 풍속을 교화시켰다.
그러나 서로(西路 평안도(平安道)를 말함)는 이익만을 힘쓰는 곳이라 관향사(管餉使)와는 서로 융화가 되지 않아 벼슬을 사양하고 떠났으나,
마침내 취리(就理 죄지은 벼슬아치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음)되어
보은(報恩)에 도배(徒配 도형(徒刑)에 처한 뒤에 귀양 보내는 일)되었다가, 두어 달 만에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어서 풀려 돌아왔다.
정축년(1637, 인조15)에는 문경(聞慶) 가은(嘉隱)에 가서 터를 잡아 살면서 그 집을 범재(泛齋)라고 하였으니,
집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계속하여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무인년(1638, 인조16)에는 지평으로 부름을 받았다.
공은 난을 치른 뒤라서 나라의 정치가 크게 무너졌다고 하여 일을 그르친 신하들의 죄상을 올렸는데,
그의 대신 중에 죄인의 우두머리는 왕실의 인척으로 세력이 크고 성한데도 그 말이 절실하고 곧았다.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자 즉시 고하고 돌아왔다. 얼마 후에 성균관 직강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삼남(三南)에 큰 흉년이 들자
대신들이 임금에게 아뢰어 삼남 도사(三南都事)를 선택해서 진휼(賑恤)하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공이 천거되어 경상 도사(慶尙都事)가 되었다. 가을에 농사의 재해(災害)를 조사하여 양전(量田)하였는데,
전정(田政)이 미비한 관계로 알맞게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고 많은 말을 올리자,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경진년(1640, 인조18)에 수찬(修撰)에서 다시 헌납(獻納)이 되어 왕자의 수각(水閣)에 관한 일로 상소(上疏)하기를,
“원(苑)에 있는 나무들은 선왕(先王)이 심은 것인데 하루아침에 베어 버리고 왕자의 수각을 지으니,
이것은 전하가 아들은 사랑하면서 선왕은 공경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헌납을 체직(遞職)해 버렸다. 공은 연 이어서 삼사(三司)와 이조에 있었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종부시 정으로서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 나갔는데, 성문(城門)에 방(榜)을 써 붙이기를,
“몸가짐을 청렴(淸廉)하게 하고 삼가서 공평하게 정치하는 것은 태수(太守)의 일이니 태수는 힘쓸 것이며,
효우(孝友)를 돈독히 하여 약속을 이행하고 법령(法令)을 잘 지키는 것은 백성의 일이니 백성들은 힘쓸지어다.”하였다.
외롭고 약한 사람과 나이 많은 어른들을 문안하여 언제나 세시(歲時)에 쌀과 고기를 보내는 것을 한결같이 예전의 예대로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다시 응교(應敎)가 되어 시강원 필선을 겸하였는데,
세자가 옛날 사부(師傅)라고 해서 보통 사람과 달리 예우하려 하자 예를 맡은 자들이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입시(入侍)할 때마다 세자는 반드시 공경하여 예로 대접하였다.
5월에 주상(인조를 가리킴)이 승하(昇遐)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 임금이 승하 후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의 묘호(廟號)를 올릴 때,
공이 상차(上箚)하기를,
“지금 대행 대왕의 묘호를, 종(宗)을 조(祖)로 바꾸려고 합니다.
선조(宣祖)는 광국(光國)의 큰 공이 있어서 조정의 신하들이 조(祖)로 칭하려고 했으나,
윤근수(尹根壽)가 ‘별 뜻이 없다’고 말해서 중지하였습니다.
그 뒤에 허균(許筠)과 이이첨(李爾瞻)이 위서(僞書)를 만들어 다시 조(祖)로 호칭하자는 설(說)을 만들었는데,
이때 어질고 노성(老成)한 신하로서 나라를 위하여 말하기를 윤근수처럼 한 이가 없어서 그 일이 드디어 행해졌습니다.
뒤를 이은 임금이 비록 공이 있고 덕이 있어서 백세 동안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진다 하더라도 宗으로 했지 祖로 하지 않았습니다.
주무왕(周武王)이 주 나라의 세실(世室)이 되었고 한 문제(漢文帝)와 당 태종(唐太宗) 및
당 현종(唐玄宗)과 진 원제(晉元帝)와 송 고종(宋高宗)이 다 조의 칭호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공(功)이 있으면 조(祖)로 하고 덕이 있으면 종으로 하는 것 모두 불천위가 되는 것입니다.
종이 조보다 못하고 조가 종보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태종과 세종 그리고 고종과 중종이 모두 종으로 칭해졌지만 불천위로 모신 것은 당연합니다.
의에도 맞지 않고 예에도 맞지 않는 예(禮)를 따라서
선왕에게 조의 칭호를 올리는 것은 경전에 근거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예에 매우 어긋납니다.”하니,
상이 노하여 그 말이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뒤에 사인(舍人)에서 다시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일을 핑계로 피혐(避嫌)하며 김상헌(金尙憲)을 들어 말하였더니, 정원(政院)에서 말하기를,
“나라의 원로(元老)는 이름을 불러 말할 수 없다.”하였다. 임금이 책문(責問)할 것을 명하자, 공이 말하기를,
“예에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른다.’ 하였으니, 김상헌을 이름 부른 것은 이 때문입니다.”하니,
드디어 사간을 파직하였다.
그후 임금이 시호를 의논한 일을 추죄(追罪)하여 선왕(先王)을 비방하였다고 해서
공을 회양(淮陽)에 부처(付處)하였는데, 간(諫)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서 얼마 후에 풀려났다.
병신년(1656, 효종7)에 죽은 아버지의 장지(葬地)를 옮기고 말하기를,
“예(禮)에 삼년복을 입을 사람은, 개장하면 다시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삼월복(三月服)이다.”하고,
거처(居處)와 곡읍(哭泣)과 음식(飮食)을 초상(初喪)과 같이하여 산소 아래에 여막(廬幕)을 짓고 석 달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그때 공의 나이 71세라 그로 인하여 지쳐서 병이 들었는데,
그 다음해인 10월 28일에 공이 작고하여 처인(處仁)에 있는 선묘(先墓)의 곁 동남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이 젊어서 군자의 문하(門下)에서 유학하여 옛사람의 학문을 들었고 집에 있을 적에는 어버이 섬기고
형제간에 처하는 도리가 모두 덕행과 선행의 표본이 될 만하였다. 남에게는 매우 성실하였고,
그들을 아껴 주어 착한 일을 보면 격려하고 과실을 알면 바로잡아 스스로 지키기를 몹시 엄히 하여
한 번도 내 몸을 굽혀 남을 따르지 않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경학(經學)을 중시했으며, 늘 말하기를,
“천지 사물(天地事物)의 이치는 무궁하여 내 마음이 광대(廣大)하고 고명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대의(大義)에 밝을 수 없고 제도를 살펴볼 수 없으니, 고금(古今)의 사리에 통달한 연후에 천하의 일을 말할 수 있다.”
하였다. 공이 엄정하여 위의(威儀)가 있었고,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예가 있으며,
진퇴(進退)하는 데에 의가 있었고, 일에 임해서는 법도가 있었다.
그와 친구가 된 이는 용주공(龍洲公 조경(趙絅)), 파산(坡山) 관찰사 이공과 나의 죽은 종형 설옹(雪翁 허후(許厚))이 있다.
이 두 어진 이들은 모두 올바른 도리로 사귀어 서로 좋게 지냈기에 여기에 열거한다.
초취는 서하 임씨(西河任氏)로 관찰사 임내신(任鼐信)의 손녀인데, 아들이 없고,
후취는 광주 노씨(光州盧氏)로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증손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심창징(沈昌徵)은 지극한 성품으로 행실이 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사위는 도사(都事) 권상규(權尙規)이다. 또 서자에 심창윤(沈昌潤)이 있다.
딸이 넷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이진겸(李震謙)의 처이고,
세 사람은 군수 정하(鄭何), 찰방(察訪) 남두징(南斗徵), 목사(牧使) 이관(李慣)의 첩이 되었다.
심창징이 심희도(沈羲圖)를 낳았는데, 일찍 죽고 두 아들은 아직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덕이 있는지는 / 德之辨
재앙이 있을 때에 알 수 있고 / 存乎災疢
덕의 진보는 / 德之進
충과 신의에서 볼 수 있다 / 觀於忠信
아, 견실하고 곧으며 / 嗚呼確而貞
돈후하고 순하다 / 敦且順
<심대부의 간찰>『근묵』, 1645, 초서, 21.5×37.5㎝,
성균관대학교에 보관--기와를 굽는 장인을 보내달라는 내용
(심대장군 가계도)
五代祖 沈溫 安孝公 심온
高祖父 沈濬심준 영중추공
曾祖父 沈湄심미 동중추공
祖父 沈淇심기 龍潭縣令
父 沈義儉심의검 儀賓經歷 贈領議政 靑松府院君(生父 沈光宗 昌寧縣監)경력
母 高靈申氏 우참찬 신광한(申光漢)의 딸
兄 沈嶐심융 司評 贈左承旨--沈大亨심대형
兄 沈嶪심업 陽智縣監--沈大有심대유, 沈大咸심대함
兄 沈巖심암 전라좌수사--沈大觀심대관, 沈大亨심대형, 沈大謙심대겸
兄 沈訔심은 寧越郡守 贈左承旨--沈大健심대건, 沈大厚심대후
沈岱심대 扈聖功臣, 靑原君, 忠壯公
配位 全州崔氏 전라감사 右尹 崔弘僴최홍안의 딸
1子 沈大復심대복-襲封靑寧君, 扈聖原從勳
孫 沈興源심흥원,沈昌源심창원-副護軍
2子 沈大臨심대림
孫 沈潑源심발원,沈昌徽심창휘
3子 沈大頤심대이
孫 沈善源심선원
4子 沈大濟심대제
孫 沈雄심웅, 沈昌雄심창웅
5子 沈大孚심대부-
孫 沈昌徵심창징, 沈昌潤심창윤
벽암 두릉연가
안성-최지崔沚 강화최씨 (0) | 2017.0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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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병조판서 최안우(崔安雨), 강화최씨, 통정대부 사재감 최지(崔沚) (0) | 2017.04.27 |
용인-이사주당(李師朱堂),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애오로 유한규(愛吾盧 柳漢奎 (0) | 2017.04.19 |
광주-김재규金載圭 김재규 1926-1980. (0) | 2017.04.18 |
성남-강정일당(姜靜一堂),정일당 강씨,지일당(只一堂),성남시향토문화재 제1호 (0) | 2017.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