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권근의 손자 / 익평공 소한당 권람(翼平公 所閑堂 權覽)
1416(태종 16)∼1465(세조 11)
본관은 안동(安東). 字 정경(正卿), 號 소한당(所閑堂).
檢校정승 권희(權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권근(權近),
아버지는 右贊成 권제(權踶),
어머니는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奇策)이 많았다.
책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管鮑)와 같았다.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향시와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고, 전시(殿試)에서 4등이 되었다.
그러나 장원인 김의정(金義精)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의 음주(音註)를 편찬하는데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수양대군과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 대신들의 손에 들어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수양대군이 동지를 규합하고 있을 때,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게 접근해 집권을 모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양정(楊汀)·홍달손(洪達孫)·유수(柳洙)·유하(柳河) 등 무사들을 규합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김종서·황보인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4년 2월에 우부승지, 8월에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6월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이어 9월에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3
월에 역신(逆臣)들이 가졌던 연안·전주·충주·양주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해 7월에 집현전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457년 2월 난신(亂臣)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에는 김문기(金文起)·장귀남(張貴南)·성승(成勝) 등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8월에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되었다.
1458년 5월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고, 그해 12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했다.
1459년 좌찬성과 右議政을 거쳐, 1462년 5월 左議政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63년 9월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책임을 맡았다.
有明朝鮮國
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左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春秋館事吉昌府院君
수충위좌협찬정난동덕좌익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영춘추관사길창부원군
諡翼平公所閑堂權先生覽正卿之墓
시익평공소한당권선생람정경지묘
한번은 사위로 남이를 사위로 낙점할 때 무속인에게 점을 쳐 보았으나
역적이 될 조짐이라는 괘가 나오자 파혼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사후라는 말을 듣고 다시 번복했다 한다.
또한, 1464년 신병으로 감악산신(紺岳山神) 설인귀(薛仁貴)에 치성을 드릴 때,
비바람이 몰아치자 "당신(설인귀)과 나는 세력이 같은데 어찌해 이와 같이 몰아치는가." 하고 호통했다고 한다.
활을 잘 쏘고, 역사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는 신숙주, 서거정(徐居正), 한명회 등과 교류하였다.
세조 말년에 의정부 좌의정으로 있다가 병으로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다가 병이 위중함을 보고 사직을 허락했다.
은퇴하여 있다가 1465년(세조 11년) 2월 6일 병으로 죽었다.
사후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시문과 글재주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대부분 유실되거나 실전되었고,
문집으로는 시문집인 《소한당집 (所閑堂集)》, 《응제시주》, 《여사대전》 등이 현재 전하고 있다.
당시 그의 향년 50세였다.
有明朝鮮國
左議政吉昌府院君權翼平公寧原郡夫人李氏之墓
좌의정길창부원군권익평공영원군부인이씨지묘
그의 사후, 그의 일족은 남이 역모사건에 연좌될 뻔하였으나,
남이에게 출가한 그의 딸이 일찍 요절하였으므로 연좌의 위기는 피하였다.
남이는 그의 넷째 사위였고, 신수근은 여섯째 사위였다.
세조는 바로 조회를 파하고 3일간 애도하였으며, 바로 익평의 시호를 내렸다.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의 아버지 권제의 묘소 아래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 주변에는 아버지 권제의 묘소와 할아버지 권근의 묘소가 있으며,
묘역 일대는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471년 세조 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아들 권걸(權傑)도 자헌대부 행동지중추부사에 올라 봉군되어 길창군(吉昌君)을 습봉받았다.
1467년(세조 13년)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신도비문은 신숙주가 짓고 글씨는 권반(權攀)이 썼다.
한편 예종 때에 역모로 몰린 남이는 장인의 친구들인 대신들에게 구명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외면하였다.
오히려 그의 아들들은 누이가 일찍 죽어서
예종 초 남이 집안과 아무런 관련도 교류도 없음을 들어 극적으로 멸문지화를 면하였다.
한성부 목멱산 근처 예장동에는 그의 별장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파괴, 소실되었다.
예장동 별장은 자초(自超) 또는 무학이 택한 명당이라는 하였다.
사후 세조 말기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부터 재평가 여론이 조성되었다.
1970년대에 다시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였고,
그의 저서 응제시주 등에서 단군 중심의 역사관을 서술한 점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시문집으로 『소한당집(所閑堂集)』이 있고,
할아버지가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應製詩註)』는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조 때 『동국통감』의 편찬방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諡號는 익평(翼平)이다.
祖父 權近권근, 號 陽村
祖母 淑敬宅主 慶州李氏숙경택주 경주이씨
叔父 權跬권규 태종의 부마)
父 權踶권제
母 判司宰監事판사재감사 李儁이준의 딸)
庶母 : 이름 미상, 권제에게 살해되었다.
兄 權摯권지
權覽권람
配位 영원군부인 고성 이씨(寧原郡夫人固城李氏, 이암(李嵓)의 손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원(李原)의 딸)
弟 權攀권반
弟 權摩권마
弟 權挈권혈
弟 權擎권경
누이 : 권씨, 아버지 권제에게 살해되었다.
長男 權傑권걸, 자는 사일(士逸), 吉昌君에 습봉)
子婦 宜寧南氏의령남씨
次男 權健권건
長女 韓瑞龜한서구, 청원군의 처
次女 朴士華박사화의 처
三女 申億年신억년의 처
四女 南怡남이의 처
五女 金壽亨김수형의 처
六女 愼守勤신수근의 처
外孫女 : 단경왕후(중종의 정비)
七女 申末平신말평의 처
八女 閔師騫민사건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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