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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종담서당(鍾潭書堂),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傅)신도비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7. 30.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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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담서원(鍾潭書堂)

경남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710-2

 

 

 

 

 

지족당 박명부 (知足堂 朴明傅)

1571(선조 4)1639(인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는 여승(汝昇), 는 지족당(知足堂), 영치(嶺癡)

 

증조부 박승숙(朴承淑),

    조부 박덕형(朴德馨),

아버지 증 호조참판 박영(朴榮)

어머니 증 정부인 문화유씨, 판관 유희필(柳希畢)의 따님.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0(선조 2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급제,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를 거쳐 저작(著作)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佑) 군막에 왕래하면서 군무(軍務)에 많이 협찬했으며,

1593년에는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환도(還都) 후 박사(博士)를 제수 받았다.

 

그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해주판관(海州判官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당시 합천에 정인홍(鄭仁弘)이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1614(광해군 6)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종용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시키자,

그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축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그 해 여름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죽산부사(竹山府使),형조참의(形曹參議),좌부승지(左副承旨),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등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 중에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講和)를 반대하였다.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다가,

1638(인조 16)에 예조참판(禮曹參判한성좌윤(漢城左尹도승지(都承旨) 등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지족당문집3책이 있다.

 

 

 

鍾潭書堂上樑文(종담서당상량문)

崇禎五庚申黃梅節 仁州張錫英謹撰

숭정오경신황매절 인주장석영근찬이라 되어있다.

 

 

 

嘉義大夫行禮曹參判 同知禁義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

가의대부행예조참판 동지금의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

知經筵義禁府春秋舘事 世子左賓客 知足堂先生朴公神道碑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세자좌빈객 지족당선생박공신도비 

 

오른쪽 앞 담장 옆에는 커다란 돌 비석이 거북 등위에 서있다.

知足堂朴先生神道碑(지족당박선생신도비)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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