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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안의광풍루, 의병대장문태서기공비, 하경순포선불망비, 화계김덕년선생시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8. 3.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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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 광풍루 安義 光風樓               

경남 함양군 안의면 강변로 303(금천리 49-19 )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2


안의 광풍루 安義 光風樓             

경남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으로 정면 5,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금호천(錦湖川)의 강가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光風樓1412(태종 12) 이안현감(利安縣監) 전우(全遇)가 지은 것으로서

그 당시에는 선화루(宣化樓)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425(세종 7)에 김홍의(金洪毅)가 현위치로 옮겨 세웠으며,

1494(성종 25)에 현감이었던  일두 정여창(鄭汝昌)이 중수하여 이름도 광풍루로 고쳐 불렀다.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1602(선조 35) 현감 심종진(沈宗)이 복원하고,

3년 뒤인 1605년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잡한 유래를 간직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많이 퇴락한 것을

1980년에 단청을 새로 하고 주변을 정화하여 옛 모습을 되찾아놓았다.








華溪金德年先生詩 화계김덕년선생시

사마시에 급제하고 성균관 생원을 지낸 함양 출신의 인물이라 한다.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문태서장군은 1880년 이곳 장구지에서 남평인 강성군 문익점 선생의 23세손으로 태어나

5세에 한학에 입문하여 소년기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1904년부터 금강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던 중 190511월 일제 침략자들이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을 방문하여 모병기의를 밀의하고 귀향하여 190660여명의 동지들을 모아 창의하였다.

원통사에 기지를 두고 그해 9월초 안성에서 왜병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한 것을 시작으로

경남과 전북, 충북, 경북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신출귀몰한 작전을 전개하여 노획한 무기와 사살한 왜군의 수가

수백에 달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용감무쌍한 기백은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왜군은 장군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고 주민들을 협박하고 회유하는데 광분하였다.

1911817일 애석하게도 왜경에 체포되어

진주 대구를 거쳐 서울로 압송 수감되었다가 19132434세를 일기로 옥중순국 하였다.

 

장군은 왜적과 친일악질 분자를 척결해서 가난한 인민들을 보호하였으므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19094월 무주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문태서 장군 송덕비를 세운 것을 볼 때 그의 고결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정부에서는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서울 국립묘지 광복선열묘역 충렬대 6번에 안장하였다.

 

그의 용감하고 의로운 투쟁정신은 우국충혼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며

후손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어 애국심을 일깨우고 조국 수호와 민족번영의 길로 인도하는 귀감이 되었기에

이를 기리고자 군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1999815

함양군 순국사적비 건립 위원회 짓고

광복회장 윤경빈 감수 함양군수 세움


==문태서장군   활동과정==

1906. 9 - 무주 안성에서 왜병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

1906. 9. 17 - 장수수비대를 습격하여 왜군 30명을 사살 무기 40점 노획

1906. 겨울 - 의병 300여명으로 늘어 박수문, 박춘실, 전성범, 신탁광 장군 등과부대를 재편성 호남의병단이라 명명

1907. 1. 15 - 무주 고창곡 전투에서 왜군 43명을 사살 무기 50여점 노획

1907. 여름 - 왜군 7 읍연합수비대 200여명 칠연계곡 유인 7읍대장 및 장교 3명과 사병 32명 사살(단원 700여명)

1907. 10. 7 - 안의 물삼거리에서 왜군괴멸

1907. 10. 8 - 안의 월성에서 왜군과 교전

1907. 11- 호남의병대장으로서 일본 통감부 공격을 위한 전국연합의병진 합류

1908. 2. 28 - 무주주재소를 습격

1908. 3. 14 - 영각사 부근에서 왜군과 교전

1908. 4. 10 - 장수주재소와 군청을 소각 군수물자 탈취

1908. 여름 - 안의 헌병대 및 장계주둔 헌병대의 무기 탈취

1908. 겨울 - 영각사 계곡에서 진주여단 소속 왜군 70여명을 유인하여 괴멸시킴

1909. 2. 10 - 안의 갈현리에서 왜군과 치열한 교전

1909. 3. 10 - 안의 조산촌에서 왜군공격

1909. 4. 24 - 용담 장전리 수비대를 습격

1909. 5. 8 - 남원 이문성 공격과 장수 양악에서의 격전

1909. 5. 11 - 운봉 산내면 입석리 주둔 왜군 수비대를 기습공격

1909. 10. 30 - 옥천 이원역을 폭파

1911. 여름 - 장수 헌병대 습격 후 갈평에서 적의 기습으로 타격 받아 체포됨

19132434세를 일기로 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옥중순국 함.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동에서 태어났고

그 입구에는 옛 덕남초교 교장이 세운 의병대장문공태서태지(義兵大將文公泰瑞胎地)라는 표석이 서 있다.

안의면 광풍루 옆에는 1970년에 국사편찬위원장 신석호 박사가 비문을 지은 문장군기적비(紀蹟碑)가 서 있다.

이 순국사적비문은 함양문인협회 고암 김성진 회장이 지은 것을 건립위원 김상수, 김윤수 등이 약간 수정한 것이다


商務左右社接長  河璟詢褒善不忘碑

상무좌우사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

경남 문화재자료 제265


상무좌우사접장하경순포선불망비(商務左右社接長 河璟詢褒善不忘碑)

 1890년대 상무좌우사의 접장을 지낸 하경순(18751946)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971231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65호로 지정되었다.

 

상무사는 광무 3(1899) 상업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설립되어 전국 보부상단의 관리를 하였으며,

등짐장수인 부상단을 좌사로, 봇짐장수인 보상단을 우사로 그 명칭을 정했다.

접장은 좌사와 우사를 통틀어 상무사의 우두머리로,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총회를 소집하여 사회를 보는데,

격년제로 뽑으며 각 지역대표 중에서 투표로 선출한다.

하경순은 시장관리를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여 상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11년 안의면 시장사람들이 세워 놓은 비로

지역경제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민속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광풍루 앞의 남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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