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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매호 진화(梅湖 陳澕), 용인시 향토유적 제31호/창양부원군 운곡 진사문(雲谷 陳斯文)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12. 9.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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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9월 13일 벌초전 묘역이라 ......언제 다시 찍어야 할텐데...

 

매호 진화(梅湖 陳澕)선생 묘

용인시 향토유적 제31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원암리 산38

 

高麗翰林梅湖陳公之墓

고려한림매호진공지묘

 

 

 

매호(梅湖) 진화(陳澕)

생몰년 미상. 고려 신종·희종 때의 문신.

본관은 여양(驪陽: 지금의 洪城). 는 매호(梅湖).

여양군(驪陽君) 진총후(陳寵厚)의 증손으로,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문신을 보호해주었던

참지정사(參知政事판병부사(判兵部事) 진(陳)의 손자이고,

병부상서  광수(陳光脩)의 아들이며, 진(陳)·진(陳)의 아우이다.

출생 기록은 없고 그의 문집에 있는

매호공소전 梅湖公小傳에 의하면 1200(신종 3)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하니 대략 118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었고 명종이 신하들에게 소상팔경 瀟湘八景시를 짓도록 하였을 때

어린 나이로 장편을 지으니  이인로(李仁老)와 더불어 대단한 시문이라는 평을 받았다.

1198년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20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다음해에 내시(內侍)에 보직되고, 1209(희종 5) 학정(學正)으로 전직하였으며,

1212(강종 1)에 제과시험(制科試驗)에 참여하여 조서(詔書)를 짓는 일을 맡아보았다.

1213년에는 설화(舌禍)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한원(翰苑)에 들어갔다.

1215(고종 2)에 관각제공(館閣諸公)에게 부시(賦詩) 40여운()을 시험하였는데,

이규보(李奎報)가 수석이요,  그는 차석이었다.

서장관으로 금나라에 다녀온 뒤에 옥당(玉堂)으로 옮겨 지제고를 겸직하였고,

정언(正言)에서 보궐(補闕)을 거쳐 우사간이 되어 지공주사에 보직되었다가 재직중에 졸 하였다.

한림별곡 翰林別曲1장에서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고 하였듯이 그는 주필로 이름난 시인이다.

그의 시는 현재 59수가 전하고 있는데,

그 중 무신의 난 이후의 피폐한 농촌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도원가桃源歌가 특히 유명하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지은 사금통주구일使金通州九日·봉사입금 奉使入金등의 시문도 빼어나다.

그의 시는 관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와 자연을 소재로 한 정감을 표현한 시로 나뉘는데,

자연을 묘사한 시에서는 산수·전원을 청담(淸淡)하게 표출하였다는 평을 얻고 있다.

허균(許筠)도 그의 시를 맑고 굳세어 읊을만하다고 하였다.

스스로도 청나라를 위주로 시를 쓴다고 한 바가 있는데,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청신(淸新)’·‘청려(淸麗)’ 등의 평어로 일관되어 있다.

1784(정조 8) 그의 15세손 진후(陳)

동문선·동인시화·기아등에서 시작품을 찾아내어 매호유고를 간행하였으며,

이 책은 1973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고려명현집 高麗明賢集2에 영인되어 있다.

 

 

묘소를 오백여 년간 실전되었다가

1849년 후손 진동오(陳東五)가 다른 묘역을 정리한던 중  묻혀있던 지석을 발견하여 묘역을 복원하였다.

1921년에는 23세손 진평호(陳平鎬)가 묘소를 단장하고 석물과 묘표를 세웠고,

1978년에는 종중에서 묘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양진씨 매호 진화(梅湖 陳澕) 가계//

1709년 숙종 때 발간된 여양진씨대동보(기축대보)에는

 

증조부 여양군 진총후(驪陽君 陳寵厚), 여양진씨(驪陽陳氏)의 시조

   조부 참지정사 판병부사 병부상서 진준(陳俊)

   부친 병부상서 진광수(陳光脩)

           형님 어사대부 진식(陳湜), 여양진씨 어사공파

           형님 예빈경 진온(陳溫), 여양진씨 예빈경파

           매호공 진화(梅湖公 陳澕), 여양진씨 매호공파

 

1784(정조 8)에 진화의 15대손인 진후(陳垕)가 주도하여 발간된

그의 유고시집 매호유고梅湖遺稿에는

증조부 여양군 진총후(驪陽君 陳寵厚), 여양진씨(驪陽陳氏)의 시조

   조부 참지정사 판병부사 병부상서 진준(陳俊, ?~1179)

   백부 병부상서 진광수(陳光脩)

   부친 추밀부사 진광현(陳光賢)

           형님 어사대부 진식(陳湜), 여양진씨 어사공파

           동생 예빈경 진온(陳溫), 여양진씨 예빈경파

           매호공 진화(梅湖公 陳澕), 여양진씨 매호공파

                 자 한림학사 진영헌(陳令獻)

                      손자 문하시중 진석(陳錫)

                            증손자 창양부원군 운곡 진사문(昌陽府院君 雲谷 陳斯文)

                         

 

====이렇듯 가계도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진화묘 후경

 

 

 

창양부원군 운곡 진사문

昌陽府院君 雲谷 陳斯文

?  ~1363

 

 

 

                                      銀淸金紫光祿大夫  封昌陽府院君陳公斯文之墓

                                      은청금자광록대부  봉창양부원군진공사문지묘

 

 

 

 

 

운곡 진사문(雲谷 陳斯文)은 1126년 고려 인종 4년(1122-1146)의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에 척준경(拓俊京)함께 이자겸 일파들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여양군에 봉하여져 여양진씨의 시조가 된 진총후(陳寵厚)6세손이며,

고려 의종 24(1170)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등의 경계지란(庚癸之亂)으로

문신들과 그 가족들을 무차별 살해하므로

公의 아들 진준(陳俊)이 말하기를

우리가 미워하는 자는 이복기(李復基), 한뢰(韓賴)4, 5인에 불과한데 많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가산을 몰수함은 부당한 일이다하며 만류하였으나 이의방(李義方) 등 하급 무장들은 듣지 않았다.

 

그때 문신들이 공의 덕으로 많은 죽음을 면하게 한

高麗 毅宗-明宗朝 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判兵部事 陳俊

 고려 의종-명종조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병부사 진준5世孫이며,

고려 신종에서 희종 연간의 문신인 매호 진화(梅湖 陳澕)의 증손으로,

고려 29대 충목왕(1344-1348), 30대 충정왕(1349-1351),

31대 공민왕(1351-1374)3대 왕을 모신 신하로

충정왕 원년(1349)보문각 대제학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도첨의참리를 지내고

그 다음 해(1350)에 단성익조공신(端城翊祚功臣)이 되어 창양부원군(昌陽府院君)의 작을 받으셨다.

그는 이 시기에 처음 들여온(백이정)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학문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불교를 유독 배척하였다.

이 시기에 왕의 나이가 어려 왕의 외척(外戚)득세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덕영공주가 모든 정사를 도맡아 하게 되면서 도장을 두고 치성을 올리는 등

재앙을 없애려 운수를 점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 불교사찰을 짓고

도량을 세운다며 백성들을 동원하여 노역을 일삼으며 국고가 탕진하였다.

또한 고려 조정은 간신배 무리들이 극도로 국정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에 공은 민가를 돌아보고 지방의 여론을 수집하여 바쁜 농사철에 백성을 동원하여 사찰을 짓는 것을

중단할 것을 장계(狀啓)(왕의 명을 받아 지방에서 민정을 살핀 결과를 글로 왕에게 올림)로 올리게 된다.

그러나 조정에서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권문세가의 농간이 날로 심해져

사리사욕을 탐하는 간신배 무리들이 임금 주위에 항상 들 끌어 임금은 이 장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공은 개탄한 나머지 병이 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구성현 도촌장(지금의 용인시 남사면 원암리)남쪽의 천덕산 골짝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 김용의 난이 일어나

공민왕이 흥왕사에서 참변(1363년 윤 3월 초하룻날)을 당할 뻔 하였다는 소식에

이제 고려의 기운이 다하는구나하며

천덕산 꼭대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식음을 전패하기 십여 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마을 사람 들이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이후 이 마을 이름을

원암(:원통하고 슬프다는 뜻으로)이라고 부르게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흥왕사 참변(興王寺─變),  (김용(金鏞)의 난)

1363년(공민왕12) 윤 3월 초하룻날.

권력을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던 김용(金鏞)은 급기야 절대 권력을 누리기 위해

공민왕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1363년 윤3월 1일 밤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복면을 하고 흥왕사에 행궁을 차린 공민왕의 처소를 급습하게 된다.

이때 호위 인원이 모두 달아나고

첨의평리 왕자문(王梓文), 판전교사 김한룡(金漢龍)을 비롯하여 십여 명이 죽임을 당하지만

공민왕은 환관 이강달(李剛達)의 도움으로 간신히 태후의 밀실에 숨어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러나 반란군이 완전히 진압된 후에도 김용은 1등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흥왕사에 침입했던 잔당 90여 명이 체포되면서 김용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가 체포된 잔당들에 대한 심문을 맡았는데

잔당들을 심문하지 않자 의심을 받게 되어 결국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임견미(林堅味)에게 국문을 받고

사형 틀에서 사지가 찢겨지는 죽음을 당해 그의 머리는 개경으로 보내져 저자에 효수되었다.

 

운공 진사문 묘역 하단부의 기념비가...驪陽陳公昌範功勞記念碑여양진공창범공로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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