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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산-이시영 省齋李始榮 성재이시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흥무대왕 김유신상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12. 20.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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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이시영 선생상 省齋 李始榮.

1869(고종6)1953.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100-115



성재 이시영 省齋 李始榮. 1869(고종6)1953.

                            외부교섭국장, 한성재판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본관은 경주(慶州). 성흡(聖翕),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첫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박승문(朴勝文)의 딸이다.

1885(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13위안스카이[袁世凱]정부와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도모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1919고종황제 서거로 북경서 이동녕·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이회영 등과  3·1운동에 따른 항일운동을 전개.

이어 북경에 온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논의하고,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4월 윤봉길(尹奉吉)의거 때에는 미리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 김구(金九이동녕·송병조(宋秉祚차리석(車利錫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3510월 백범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 역임.

19458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여

1947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1947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19487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59일 국민방위군 사건 등을 이승만의 실정을 규탄하며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 정부를 떠났다.

19528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졸 하였다.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현 묘소로 이장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1988년에 건립된 이시영의 동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며,

           조각가 최기원이 만들었고, 김응현이 글씨를 썼다.


김유신 장군상

興武大王 金庾信  흥무대왕 김유신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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