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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봉원부원군 영의정 충정공 정창손(蓬原府院君 忠貞公 鄭昌孫), 여주목사 정육손(鄭六孫)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4. 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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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부원군 충정공 정창손(蓬原府院君 忠貞公 鄭昌孫)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5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

봉원부원군 충정공 정창손 蓬原府院君 忠貞公 鄭昌孫 

(1402311~ 1487127)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효중(孝仲), 동산(東山), 諡號 충정(忠貞)

언어학자, 유학자이다.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이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당시 훈민정음에 반대한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이었다.

1456년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1468(예종 1) 익대공신(翊戴公臣),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公臣) 등에 세번 녹훈되었다.

봉원군(蓬原君)에 봉군되었다가 1456년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으로 진봉됐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 치평요람편찬에 참여하고 세 번 과거에 합격했다.

1443년 집현전교가 되었는데 재직중인 이듬해 한글의 제정을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1446년에는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의 불교 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 다시 좌천되었다.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에 협력하였으며, 사위인 김질이 사육신과 세조 제거에 가담한 것을 설득하여 고변하게 했다.

익대 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1468년에는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좌익공신이 되었으며

1471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1469년 원상, 1471년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궤장을 하사 받았다.

1458년부터 1459년까지, 1461년부터 1462년까지, 1475년부터 1485년까지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다 

관직은 대광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청백리에 녹훈되었다.

광해군과 인조 때의 청백리 이원익의 외가 선조이기도 하다

1423(세종 5)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423(세종 5) 사마시를 거쳐,

1426(세종 8) 식년 문과에 급제후 이어 동진사(同進士)에도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이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승문원박사, 집현전수찬에 임명되었으며 경연시강관,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 뒤 집현전저작랑·교리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훈의 通鑑訓義의 편찬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퇴청 후에는 따로 서실을 열고 후학들을 길러냈다.

그 중 그의 문하에 찾아온 인사들 중 그는 서거정(徐居正)을 눈여겨보았다.

서거정은 후일 1438(세종 20)의 진사시(進士試)1457년 문과의 과거 시험관일 때 응시하여 합격하기도 했다.

그는 고전과 역사, 학문에 두루 밝아서 이후 집현전의 학사를 겸임하며 세종대왕의 문치 활동을 보좌하였으며,

1439년 집안 사정으로 사퇴하였다가 1441년 복직,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하였다.

그 뒤 다시 집현전응교가 되어 경연과 춘추관을 겸직하고 집현전으로 복귀하였다.

1443(세종 25) 집현전의 학사로 재직 중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이두와 한자 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한 그는 1444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훈민정음 제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파직되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곧 세종대왕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와 복직되었다.

1445년 집현전 응교를 거쳐 1446년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1445년 왕실의 불교숭상을 반대했다.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 조선의 국교가 유교, 성리학임을 주장하고,

왕실의 불교숭상을 비판했다가 다시 세종대왕의 미움을 받았다.

그해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그는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정창손은 조선은 유교 사상에 입각해 세운 나라임을 설명한 뒤,

왕실에서 흥천사(興天寺)를 다시 고쳐 짓고 또 경찬회(慶讚會)를 설치하였음을 들면서,

불교는 괴탄(怪誕)하고 환망(幻妄)하여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

왕실의 불교숭상을 강력히 반대하여 세종대왕의 진노를 사,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으로 좌천당했다가 파직되었다.

1446년 다시 중용되어 직예문관(直禮文館)이 되었다.

동년의 중시 문과(重試文科)3등으로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수찬관이 되었다. 14485월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번 왕실의 불교 숭상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1449년 다시 집현전 부제학에 재임명되었다.

 

1449년에는 세종의 왕명을 받아 부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編修官),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며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 고려사절요, 치평요람 (治平要覽)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편수관(編修官)으로서 책의 편차(編次)를 전담하여 관장하였다.

그러나 1450(세종 32) 책을 완성하여 미처 올리기도 전에 세종이 승하(昇遐)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문종(文宗)은 사국(史局)에 명하여 찬수를 마치게 하자,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고려사 편수에 매달렸다.

1450(문종 즉위년)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발탁 제수되어 지예조사(知禮曹事)를 겸임하였으며,

계속 고려사 편수에 참여하였다. 그 해 우승지(右承旨)로 전임되어 왕명(王命)을 출납하였으며,

8월에 고려전사 (高麗全史)를 올리자 문종으로부터 안마(鞍馬)와 옷감을 하사하였다.

그해 춘추관사를 겸하여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蓬原府院君兼領經筵贈諡忠貞公之墓  配郡夫人貞敬夫人淸州鄭氏祔右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봉원부원군겸영경연증시충정공지묘  배군부인정경부인청주정씨부우

 

1451(문종 1) 嘉善大夫로 승진,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와 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는데,

조정의 관원들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바로 대사헌으로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겸임되었다.

 

그 뒤 제학,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그 뒤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과 손잡고 수양대군을 지지하였다.

형 정갑손의 딸이 문종의 후궁이 되었지만 수양대군과 가까웠던 그는 수양대군을 지지한다.

1453년 문종이 급서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임하며

세종실록의 잔여분과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단종 1) 이조판서가 되자 외척 홍원용(洪元用)과의 상피관계(相避關係)로 사헌부에서 임명을 반대하였으나,

왕명으로 이조판서에 유임되었다.

그는 어린 임금이 즉위한 뒤 황보 인과 김종서 등 소수의 재상들이 정무를 독단한다며 비판을 가했다.

그 뒤 계유정난이 벌어지자 이에 동조하였다.

145310월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고 영의정부사직에 오르자 그는 수양대군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수양대군이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왕위에 오를 것을 진언하였다. 그해 10월 다시 이조판서에 유임되었는데,

주변에서 반대하자 수양대군은 '오늘날 정직하고 신실하기로는 정모(鄭某) 같은 자가 없다.'며 이조판서에 유임시켰다.

이조판서에 재임명된 뒤에도 그는 계속 뇌물이나 청탁을 완강하게 거절하여 명망이 높았다.

 

1455(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했고,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과 판이조사를 겸임하였다.

세조는 '의정부의 대신(大臣)은 마땅히 글을 읽어 예전 일을 잘 알고 대체(大體)를 견지(堅持)하는 사람을 써야 한다.'

그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임명하고 이조판서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해 좌익공신 3등관(佐翼功臣 3等管)에 책록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군되었다.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사위 김질(金礩)이 가담하자, 이를 설득하였다.

김질은 거사에 어려움으로 장인인 정창손을 거사에 끌어들이려 수시로 상의하였다.

그해 6월 운검 설치가 취소되면서 정창손은 김질을 끌고 대궐로 달려가 고변하며 '신은 실로 모르고 김질만 혼자 참여하였는데,

김질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세조가 특별히 김질을 사면하였다.

후에 정창손은  단종 복위 모의를 세조에게 고하게 한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고 부원군에 진봉(進封), 봉원부원군이 되었다.

이때 사육신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는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있다. 논의했던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영예는, 입을 다물어 부끄러움이 심했던 것만 못하다.'고 하여

사육신에 동조하는 것이 헛된 일임을 설득하였다.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과 사육신의 세조 제거 거사에서 세운 공으로 여러번 승진하여 의정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사육신의 난이 진압된 직후 단종 복위 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2등관으로 녹훈되고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고 봉원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어 좌찬성으로 성균관대사성과 세자 이사(世子貳師), 대제학 등을 겸직하였다.

145510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이 되었다.

그는 사육신을 죽게 한 원흉이라는 여론이 나오면서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등으로부터는 심한 비난도 받았다.

1457년에는 금성대군 유와 순흥부사 이보흠이 다시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거사를 꾸몄다가 발각되자

금성대군과 이보흠을 처형할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이어 금성대군이 사사되자 양사와 함께 단종의 장인 송현수(宋玹壽)를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여 주살시켰다.

당시 정창손의 어머니 전주최씨는 90세의 고령이었는데, 정창손 그 자신도 나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직접 어머니의 시중을 들며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여 세인이 찬탄하였다.

비록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아침과 저녁에 어머니에게 문안하는 일을 폐하지 않았고,

조정에 알현(謁見)하러 가는 여가(餘暇)에도 반드시 그 관대(冠帶)를 갖추고 모친 곁에서 모시어 시중을 들었으며,

기쁜 얼굴로 즐겁게 해드리어 어머니가 활짝 한번 웃은 뒤에라야 물러나와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세조 역시 직접 찾아보거나 사람을 보내 어머니 최씨의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청렴하여 세조로부터는 대단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뒤 1457(세조 2) 좌의정이 되었다.

세조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던 그는 1458(세조 3)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을 하자

세조는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미두(米豆)50, 종이 100권과 관곽(棺槨)을 내렸다.

이 전까지는 부인(婦人)의 상사(喪事)로 인해 조회를 정지하는 사례가 없었으므로 특별한 사례로 회자화되었다.

세조는 평안도(平安道)를 순행을 준비하면서 어머니의 3년상 여묘 살이(廬墓)를 하고 있던 그를 특별히 기복(起復)시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상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세조는 윤허하지 않았고, 또 도승지 조석문(曺錫文)을 보내 위로하고 받기를 청했으나 거절한다.

그는 여러 번 소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으나 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는 친히 어찰(御札)을 내려 그에게 영의정 취임을 부탁하였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蓬原府院君 兼領經筵贈諡忠貞公之墓 配郡夫人貞敬夫人淸州鄭氏祔右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봉원부원군 겸영경연증시충정공지묘 배군부인정경부인청주정씨부우

 

 

1485년 영의정직을 물러난 뒤에도 조정의 원로이자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다.

1486년 그가 병에 걸려서 병석에 눕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원 의관과 약물을 내려보내 진료하게 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가르쳐서 문하에 서거정 등이 배출되었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키가 크고 풍채가 준수하며 수염이 길어 배에 까지 수염이 내려왔다고 한다.

정승의 반열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명망이 높았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6명의 군주를 받들며 활동하다가

1487(성종 17) 127일 자택 정침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5세였다.

성종은 백관의 귀감이 되는 청빈재상을 잃었다하며 3일간 조회를 파하고, 후한 장례비를 내려 부의하였다.

사후 그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은전을 받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바로 경기도 광주군 방이동에 장례하였으나 1970년대에 양평군 부용리로 이장했다 

사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 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의 사사에 참여했다는 죄로 성종의 묘정에서 출향되고,

윤필상(尹弼尙), 한치형(韓致亨), 한명회,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김승경(金升卿), 이세좌, 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등과 함께 십이간(十二奸)으로 몰려 추탈당한 뒤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동시에 1488(성종 19) 문인인 서거정이 찬하여 세운 신도비 비문 역시 파쇄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 반정 이후 중종에 의해 다시 신원, 복권되었다.

1514(중종 14) 청백리로 복권되고,

부관참시 때 철거한 석물을 다시 세우고 예로써 개장(改葬)하였으며 다시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 뒤 1623(인조 1) 개장 때 외후손 이원익(李元翼)과 이시언(李時彦), 심열(沈悅), 최명길(崔鳴吉) 등이 신도비를 재건하고

서거정의 비문에다 한백겸(韓浚謙)이 덧붙여 쓰고, 외후손 심열(沈悅)의 글씨로 복원되었다.

성종 때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하게 한 원흉으로 지목되어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다가

1910년 조선이 멸망한 후 재평가 여론이 나오게 된다. 그의 묘소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었다.

 

그가 남긴 어록 중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있다. 논의했던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영예는 입을 다물어 부끄러움이 심했던 것만 못하다.'

어구는 후일 회자화되었다.

 

3대 조정에 거쳐 정승으로 있었으나 사치하지 않았고, 검소함을 유지하였다. 사후 청백리로 녹훈되었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최만리, 하위지 등과 함께 반대 입장에 선 점,

성삼문, 하위지 등의 사육신과 공모하여 세조를 제거하려 한 사위 김질을 설득하여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 점

 때문에 사림파가 집권한 선조 이후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1910(융희 3) 조선이 멸망한 후에 그가 청백리였던 점 등을 근거로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東山 忠貞公 鄭昌孫

동산 충정공 정창손 묘소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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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목사 정육손 묘소

 

                       通政大夫行驪州牧使 東萊鄭公諱六孫之墓 配淑夫人陽川許氏祔左

                       통정대부행여주목사 동래정공휘육손지묘 배숙부인양천허씨부좌

 

鄭六孫정육손

配位 淑夫人 陽川許氏 府使 許澄허징의 딸

                子 鄭休정휴, 鄭徫정위 無育無后,  1970년 현재장소 이장

 

 

 

 

 

 

 

蓬原府院君 忠貞公 鄭昌孫, 가계도



증조부 정양생鄭良生 재종조부 : 정구鄭矩
조부 정부鄭符
정흠지鄭欽之
형님 정갑손鄭甲孫 조카 : 정우鄭俁,정숙鄭俶,소용정씨-문종의 후궁,정오鄭烏
정인손鄭麟孫 조카 : 정교鄭僑, 정의鄭依
정흥손鄭興孫 조카 : 정효鄭傚, 정천鄭倩
동생 정희손鄭喜孫
정육손鄭六孫 조카 : 鄭休정휴, 鄭徫정위

정창손鄭昌孫, 충정공忠貞公
배위 : 청풍군부인 청풍정씨(淸風郡夫人 淸風鄭氏)
승녕부 소윤(承寧府少尹) 정지(鄭持)의 딸: 34
장남 정개鄭价 배위 홍씨, 군사(郡事) 홍서종(洪瑞從)의 딸

장손 정주함鄭奏咸

   증손 정석鄭錫

   현손 정응운鄭應雲 정복경鄭復慶

 5대손 정종경鄭宗慶                          정복경鄭復慶

 6대손 정담鄭聃 鄭職정직, 鄭聆정령, 鄭耳정이

 7대손 정의원鄭義源

   손자 정계함鄭啓咸

   증손 정치鄭錙

현손 정응기鄭應期

5대손 정흥경鄭興慶
차남 정칭鄭偁 최씨, 사용(司勇) 최계겸(崔季謙)의 딸
삼남 정괄鄭佸,配位 陽城李氏 府使 이긴(李緊) 4째딸 --정종보鄭宗輔
김질金礩 文靖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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