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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숭덕재 이윤경(崇德齋 李潤慶)정헌공,광주이씨,이중열(李中悅),이숙열(李叔悅),이계열(李繼悅)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5. 8.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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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재 이윤경(崇德齋 李潤慶)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 30-4

 

 

 

 

병조판서 시정헌 광주이공윤경 신도비

 

 

 

 

숭덕재 이윤경(崇德齋 李潤慶)

1498(연산군 4)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는 중길(重吉), 는 숭덕재(崇德齋).

이극감(李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다.

아버지 수찬 이수정(李守貞),

어머니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의 형.

 

 

1504년 갑자사화에 아버지 이수정이 화를 입자

온 가족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유배 중에 어머니로부터 효경·대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고 학문이 깊어 1531(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중종 2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으로 옮겨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를 역임하고, 사간원·사헌부로 옮겨 정언·사간·지평을 지냈다.

1543년 의주부윤이 되어 국방을 강화했고,

인종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내직으로 옮겨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의 재실시를 청하였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대윤을 제거하는 데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으며,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함을 논박하다가 쫓겨나

성주목사가 되어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해 운간이사군(雲間李使君)이라는 노래로 치하했다 한다.

이 때 아들 이중열(李中悅)이 이덕응사건(李德應事件)에 몰려 사사(賜死)되자,

이로 인해 1550(명종 5) 공훈과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553년 방면되어 다시 승지를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으로서 영암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공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그 뒤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를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 때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노략질하자

국왕이 평안도가 더욱 중하니, 반드시 최적임자를 선택해야겠다.”고 하여 수망(首望)으로 천거되었다.

오래 앓던 병중이라 몸이 허약하였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해 국방을 강화하다가 마침내 공관(公館)에서 병사하였다. 諡號는 정헌(正獻)이다.

 

 

 

 

 

 

 

 

 

 

 

 

 

 

 

 

 

 

 

 

 

 

 

 

 

 

 

                                                      장남 이중열 지단

 

                                                 차남 이숙열 지단

 

                                              삼남 이계열 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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