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공 신효창의 장자인 황해도 관찰사 신자근묘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78-2
신자근 申自謹
제정공 신효창의 장자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와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다
배위는 개성왕씨 정양군 왕우의 따님으로 조부는 정원부원군 왕균이다.
무안대군 이방번과 동서지간이다.
제정공 신효창의 삼남 동지중추원사 증 좌의정 신자수묘
동지중추원사 증 좌의정 신자수申自守---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장인
신자수의 딸
영가부부인 평산신씨는 봉은사 탄생시킨 숨은 주역으로
1436년(세종 18)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와 혼인하였고,
1444년 영순군 이부(永順君 李溥)를 낳았다.
하지만 6개월 후 광평대군이 창진(瘡疹)으로 졸하자,
평산신씨는 곧바로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혜원(慧園)이었다.
비구니가 된 후에도 신씨는 특정 사찰로 들어가는 대신 광평대군 집에서 기거했는데,
인근에 있던 사찰 군장사를 다니며 불공을 올렸다.
또한 광평대군묘 부근에 있던 견성암을 크게 중창했다.
신씨는 광평대군방에 속한 재산의 절반에 달하는
70여 결의 토지와 1000여 구(區)를 보시해 작은 암자를 대규모 사찰로 중건하였다.
성종실록에는 “광평대군의 부인이 큰 절을 (남편의) 묘소에 세웠는데,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에 금벽(金碧)이 빛나고
재(齋)를 닦고 경(經)을 읽기를 사시(四時)에 그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견성암은 견성사라 칭해졌다.
신씨의 대규모 불사는 조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조정 신료들은 신씨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은 묵살했다.
신씨가 견성암에 막대한 재산을 희사한 것은
승려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김수온의 ‘견성암법회기’에는
“광평대군 부인이 재산을 출연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밤에는 참선을 하고
낮에는 경전 독송을 하였으니,
광평대군 영가(靈駕)가 극락정토 왕생하기를 발원하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광평대군 부인의 보시로 화려하게 조성된 견성사는 승려들이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하는 사찰로 유지되었다.
그 후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이 광평대군 묘역에 들어서게 되면서
광평대군의 묘는 무안대군의 묘 근처로 이장되었다.
이때 견성사도 능역밖으로 옮겨야 했지만, 정현왕후는 견성사를 선릉의 능침사로 삼아 유지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관료들이 끊임없이 절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1498년(연산군 3)에 절을 능역 밖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능역 밖으로 옮기면서 절 이름이 봉은사로 개칭되었다.
평산신씨의 외동아들인 영순군 이부(永順君 李溥)가 27세에 요절하자,
영순군 부인인 김제군부인 전주최씨도 ‘선유(善柔)’라는 법명의 비구니가 되었다.
(전주최씨는 풍저창 승(豊儲倉丞) 최도일(崔道一)의 딸이고,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로 증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최승녕(崔承寧)은 조부)
이들 고부는 영순군의 명복을 빌고저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보물 제1105호)를 간행해 전국 사찰에 유포했다.
책의 실린 발문에는
“영가부부인과 영순군부인이 상사(喪事)를 당하고서 정성과 신심을 다했다”고 기록돼 있다.
평산신씨는 재산의 절반을 절에 시주할 정도로 평생토록 불사와 신행에 열중하였는데,
이는 유학자 관료들로부터 끊임없이 지탄을 받았으나,
이에 아랑곳없이 평생을 불교계의 대화주(大化主)를 자처했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보시와 회향(廻向)으로 이겨냈다고 한다.
신자수 배위 정경부인 파평윤씨
상서원판관 신승연묘
行尙瑞院判官申公之墓 淑人廣州李氏之墓
행상서원판관신공지묘 숙인광주이씨지묘
<평산신씨 제정공파 파조 화봉 신효창 가계도>
시조 장절공 신숭겸
고조부 신연-신중명, 신자명, 신헌주
증조부 밀직사 좌대언 신중명(申仲明)---신집, 신군평, 신현
조부 어사대부 신군평(申君平)
부친 이조참의 신수(申璲)
모친 연풍이씨, 내시별감 이경원(李敬遠)의 따님, <연풍이씨 시조>
제정공 화봉 신효창(齊靖公 華峰 申孝昌, ?~1440), 평산신씨 제정공파 파조
배위 정경부인 안동김씨, 좌정승 익원공 낙포 김사형(翼元公 洛圃 金士衡)의 따님
장남 황해관찰사 인순부윤 신자근(申自謹)
후처손 신개동(申介童)
손자 판윤 신윤동(申允童)
손녀 종실 순성군 이기(順成君 李謹)에게 출가
차남 대호군 지중추부사 신자경(申自敬)-- 천안 동남구 북면 오곡리
손자 사직 신윤오(申允悟)
증손자 신종년(申從年)
손자 판윤 신윤동(申允童)
증손녀 세종의 9남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塘)에게 출가
손자 군자감정 신윤원(申允元, ?~ 1460) -풍기안씨
손자 상주목사 영천군수 신윤종(申允宗)
삼남 동지중추부사 증 좌의정 신자수(申自守)
손자 사헌부감찰 신윤관(申允寬),생부 지중추부사 신자경(申自敬)
증손 세자익위사 증 이조참판 신승민(申承閔)
증손 통사랑 신익호(申希灝)
현손 증 이조판서 평원군 신수린(平原君 申壽麟) 중종조 정국공신
현손 홍산현감 어모장군 신수붕(申壽鵬,1487~1543)
5대손 강서현령 신언숙(申彦淑)
현손 통사랑 신수오(申壽鰲)
손자 신중원(申重元)
증손 상의원판관 신승연(申承演)
현손녀 홍문관부수찬 증 영의정 정재 이수정(貞齋 李守貞)
자 숭덕재 이윤경(崇德齋 李潤慶),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
손녀 영가부부인 평산신씨,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에게 출가
장녀 통예원봉례 최승녕(崔承寧), 전주인
사남 신자서(申自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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