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예산-아계 이산해 신도비(鵝溪 李山海), 연당 삼신도(蓮塘 三神島)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7. 17. 23:39

본문

728x90

 

 

아계 이산해신도비(鵝溪 李山海神道碑)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산 7-1

 

 

 

有明朝鮮國輸忠貢誠翼謨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유명조선국수충공성익모광국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鵞城府院君諡文忠鵞溪李公神道碑銘-幷序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아성부원군시문충아계이공신도비명-병서

 

 

1819(순조 19) 충청남도 예산에 건립된 이산해신도비(李山海神道碑)

채제공(蔡濟恭)이 비문을 지었고,

전액(篆額)은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고,

작은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護)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나 제공(濟恭)은 우리 영고(英考 : 영조를 말함)를 섬기며 가까이서 모신 것이 몇 해가 되었다.

영조(英祖) 임금과 모시는 신하들이 선조(宣祖) 임금 때의 인물을 논하면서 매번 말하기를,

아계(鵝溪)는 실로 국조(國朝)의 명인(名人)이다.”라고 하였으니,

아계는 돌아가신 상국(相國) 이공(李公)의 호()이다.

()은 선조 임금과 뜻이 맞아 지위(地位)는 비록 도상상(都上相 영의정)이었으나

당시 붕당(朋黨)이 비로소 나뉘기 시작할 때였으므로 시기하는 자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공공연하게 방자히 헐뜯으며 말하기를 천하 후세(天下後世)를 어지럽힐 자이다.’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성군(聖君)이신 영조 임금께서 옛 신하를 논평(論評)하면 금 저울(金秤)처럼 정확하였는데,

번번이 공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를 호칭할 때에는 명인이다. 명인이다.”라고 하였다.

! 공은 태어나면서는 성조(聖祖)를 만났고 죽어서는 신손(神孫)을 만났으니,

하늘의 뜻이요 사람의 일이 아닐 것이니 또한 성대하지 않은가?

 

공의 휘()는 산해(山海), ()는 여수(汝受)이며, 한산(韓山) 사람이다.

고려(高麗) 말엽에 문효공(文孝公)인 가정(稼亭) 이곡(李穀)

문정공(文靖公)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父子)가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천하(天下)에 소문이 났다.

목은의 막내아들인 이종선(李種善)은 우리 조정(朝廷)을 섬겼으며 시호(諡號)가 양경(良景)이고,

그의 아들 이계전(李季甸)은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으로 시호가 문렬(文烈)인데,

이 분들이 바로 공의 6세조(世祖)5세조이다.

고조(高祖)는 휘가 우()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냈고,

증조(曾祖)는 휘가 장윤(長潤)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할아버지는 휘가 치중(穉中)으로, 연산군(燕山君) 갑자년(연산군 4, 1504)에 화()를 당하여

해도(海島)에 유배(流配)되었는데,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했을 때에 비로소 용서를 받았으며,

사망할 때의 벼슬은 판관(判官)이었다.

아버지는 휘가 지번(之蕃)으로, 호는 성암(省菴)이고 벼슬은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냈다.

어머니 의령(宜寧) 남씨(南氏)는 현령(縣令)인 남수(南脩)의 따님으로, 공의 생모(生母)가 된다.

 

공이 인신(人臣) 중에서 가장 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자,

아버지는 의정부 영의정(考議政府領議政)과 한천부원군(韓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曾祖父)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됨을 얻었다.

아버지 성암과 그의 아우인 토정공(土亭公)은 모두 그 시대의 현인(賢人)으로 덕()을 쌓아서 드러내었는데,

공의 몸에서 그것이 발현되었다.~~~~~~~~~~~~~~~~~~~~~~~~~~~~~~~~~~~~~~~~~~~~~~~~~~~~~~~~~~~~~~~

~~~~~~~~~~~~~~~~~~~~~~~~~~~~~~~~~~~~~~~~~~~~~~~~~~~~~~~~~~~~~~~~~~~~~~~~~~~~~~~~~~~~~~~~~~

 

 

 

~~~~~~~~~~~~~~~~~~~~~~~~~~~~~~~~~~~~~~~~~~~~~~~~~~~~~~~~~~~~~~~~~~~~~

지금 묘비명(墓碑銘)을 요청한 자는 이정명(李鼎溟)으로,

내가 감히 늙음을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그를 위하여 명문(銘文)을 쓰노라.

다음과 같이 명()한다.

 

비 내리고 구름 나오니

하늘이 동쪽 땅을 돌아보았네.

가정(稼亭)과 목은(牧隱)의 신령(神靈)이 있어

신동(神童)을 안아서 보내주었네.

일찌감치 조정에 이름을 드날리고

병풍(屛風) 글씨는 임금 마음 움직였네.

홍문관과 독서당(讀書堂)에서는

즐겁고 화평하게 일상적인 관리 생활을 하였으나

나아가 전관(銓官)의 직임을 맡게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의 뜻을 펴게 되었네.

순정한 식견으로 사리를 밝게 살피니

뭇 인재(人才)가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있게 되었네.

성상(聖上)께서 정승의 자리 내려주셨으나

문 앞에는 청탁하는 사람 얼씬도 하지 않았네.

()은 나를 도와

[]를 건널 때 노[]가 되도록 하라.” 하였네.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있을 때

공의 계책에 도움 받아

우리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대동강(大同江)을 건넜으니

공의 과감한 결단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가 될 수 있었겠는가?

망극한 당인(黨人)들이

기회를 틈타 살모사 같은 독기를 뿜었으나

() 나라의 회제(懷帝) · 민제(愍帝)와 송() 나라의 휘종(徽宗) · 흠종(欽宗)

성상께서 거론하여 죄 없음을 밝혀주셨네.

공이 귀양지에서 돌아와

백발 재상(宰相)이 되어

억울한 옥사(獄事)를 통렬하게 비판하니

저 당인들이 원수처럼 여기었네.

간사한 무리들이 없는 일을 날조하여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백 년이 지나

성명(聖明)하신 영조(英祖)께서 나오시니

영원히 무함(誣陷)이 풀리고

영광이 저승에까지 미치었네.

만일 사람들이 믿지 않거든

내가 새긴 이 명문(銘文) 보게 할 지어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기묘년(1819, 순조 19) 10월  일에 세우다.

 

 

 

연당과 삼신도蓮塘 三神島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178

 

연당과 삼신도蓮塘 三神島

아계 이산해선생은 생전에 연연을 좋아하여

아들 석루공石樓公 이경전과 사위 한음공漢陰公 이덕형이 연당을 조성하여

삼신도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여 나무를 심었다는데 나무들이 노목으로 연당蓮塘을 지키고 있다.

삼신도는 도가의 신선사상에 나오는 삼신산을 의미하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가리키는 삼산으로 신선이 거처하는 전설상의 산이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