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장공 한순 정려각(毅壯公 韓楯 旌閭閣), 서성군 한순(西城君)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350-7
의장공 한순(毅壯公 韓楯)
1555(명종 10)∼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字는 사한(士閑).
아버지는 충훈부도사 한극심(韓克諶)이다.
황정길(黃廷吉)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583년(선조 16) 무과 급제.
선전관·평양판관 등을 거쳐 1590년 남평현감에 임명되었다.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하며 군비에 충실하여 인근의 모범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으로 가서
전라도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 등과 적을 토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금산에 이르기 전에 고경명의 의병군은 이미 패전하여
전세가 불리한 가운데 들어가 힘써 싸웠으나 전 군수 윤열(尹悅) 등 500여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자헌대부 병조판서 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서성군(西城君)에 봉하여졌다.
諡號는 의장(毅壯)이다.
평양에 평양판관 당시의 선정비가 있다고 하며 금산종용사(錦山從容祠)에 배향
壬辰殉節淸州韓公諱楯 諡毅壯公之行狀碑
임진순절청주한공휘순 시의장공지행장비 (단기4321년 무진)(1988년)
忠臣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西城君諡忠愍公行通訓大夫南平縣監羅州鎭管兵馬節制都尉 諱楯之門
충신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서성군 시충민공행통훈대부남평현감나주진관병마절제도위 휘순지문
諡號가 忠愍公인지 毅壯公인지 행장비에는 毅壯公, 정려현판에는 忠愍公
오대조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佐理功臣淸城府院君 質景公좌리공신 청성부원군질경공
고조부 현감 증 승지 한적(韓迹)
증조부 서원군 한승경(西原君 韓承慶) 첨사, 증 병조참판
조부 승지 한옥(韓沃)
부친 충훈부도사 한극심(韓克諶)
모친 숙인 양천허씨, 허흥효(許興孝)의 따님
의장공 한순(毅壯公 韓楯), 평양판관 남평현감
배위 정부인 장수황씨, 진사 황정길(黃延吉)의 따님
장남 첨지중추부사 한진영(韓震英)
차남 한인영(韓仁英)
삼남 의사 한상영(韓尙英)
사남 첨지중추부사 한도제(韓道濟) - 출계 부사 한겸(韓謙)
오남 한언강(韓彦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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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平縣監贈兵曹判書韓公謚狀 --김유(金楺)
남평현감증병조판서한공시장 -김유(金楺)
공(公)의 휘(諱)는 순(楯)이고, 자(字)는 사한(士閑)이다.
한씨(韓氏)는 고려 태위(太尉) 삼중 대광(三重大匡) 한난(韓蘭)이 비조(鼻祖)이다.
그 뒤에 한강(韓康)ㆍ한사기(韓謝奇)ㆍ한악(韓渥)이 다시 3대를 연이어 공업(功業)이 크게 드러났으며
훈벌(勳閥)이 쌓이고 쌓였으니,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한악이 손자 한영(韓寧)을 두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병조 판서의 증손자 한치형(韓致亨)은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책훈(策勳)되어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질경공(質景公)이니,
공에게는 5대조이다. 고조(高祖) 한적(韓迹)은 현감(縣監)으로 증(贈) 승지(承旨)이고,
증조(曾祖) 한승경(韓承慶)은 첨사(僉使)로 증 병조 참판 서원군(西原君)이며,
조고(祖考) 한옥(韓沃)은 승지(承旨)이다.
아버지 한극심(韓克諶)은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이고 어머니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이다.
공은 가정(嘉靖)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에 태어났는데,
모난 얼굴에 넓은 이마의 용모가 보통 아이와 달랐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증 이조 참판 진사(進士) 황정길(黃廷吉)공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는데,
기질을 접고 학문에 힘쓰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여 황공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위로 삼았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붓을 내던지고 무과(武科) 시험에 달려가 알성과(謁聖科)에 오르고
얼마 안 되어 선전관(宣傳官)으로 선발되었다가 평양 판관(平壤判官)으로 승진 임명되었다.
평양은 부유한 고을이지만 법도에 맞는 몸가짐으로 봉직을 하고 호의 호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이불이 헤어지고 더러워져서 부인이 새것으로 바꾸기를 청하자,
공이 이것도 충분하니 터진 곳이나 기우면 된다고 하고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구들이 내려앉아서 연기가 올라와 침구가 그을리자 집안사람들이 희롱하며 말하기를,
“조화옹(造化翁)이 공의 고집이 미워서 이 헤진 이불을 태웠다.”고 하였다.
이때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굶어 죽은 송장이 들판에 가득하였는데,
공이 심력을 다하여 무마하여 주고 대책을 잘 세워 구호하여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므로
정치와 교화가 크게 행하였고, 고을을 떠날 때 그 은혜를 추모하여 빗돌을 세워 칭송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예법을 벗어나서 몸이 수척하도록 슬퍼하며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심제(心制)를 하면서도 오히려 거적을 깔고 여막에 거처하며 이를 드러내어 웃은적이 없었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국가에서 일본이 장차 분쟁을 일으킬 것을 걱정하여
담력이 있고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을 선발하여 양남(兩南)의 수령을 제수(除授)하였는데,
이에 공을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삼았다.
공이 도임(到任)하여 평양에 재임할 때처럼 고을을 다스리어 백성을 다스리고
아전을 다룸에 있어 각기 적절히 하였다.
고을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날마다 산 속에 무당을 모아 놓고
신당(神堂)에 기도하며 남녀가 뒤섞이어 밤낮을 가리지 않았는데, 공이 말하기를,
“사도(邪道)가 백성을 현혹하고 풍속을 파괴하는 것은 작은 사고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신당에 나아가 불을 놓아 태워버렸으므로, 무당을 믿는 풍속이 고쳐졌다.
공이 대책을내니 왜노(倭奴)가 반드시 오래지않아 분쟁을 일으켜 양남(兩南)이 환란을첨예하게 당할것이므로,
사전의 대비를 늦출 수 없다하며 높고 험한 지대를 택하여 성을 쌓고 양식을 비축하고 무기를 정비하여 두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4월에 왜노가 과연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와서 수많은 진(鎭)이 와해되고
어가(御駕)는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였다.
7월에 왜군(倭軍)이 군대를 나누어 무주(茂朱)ㆍ용담(龍潭) 등지로 진격하며
승승 장구를 하므로 인심이 흉흉하며 두려워서 짐을 챙기고 나섰다.
공이 즉시 분연(奮然)히 일어나 이르기를, “지금 모든 도가 붕괴되어 믿을 만한 곳이 없으나,
오직 호남(湖南) 한 도만은 조금 완전하여 국가를 중흥시킬 계책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만약 힘을 합쳐서 왜군을 차단하지 못하고 한번이라도 실패를 한다면 이는 국가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전 군수(郡守) 윤열(尹悅)과 약속을 하고 이달 16일에 출전을 하여 적을 무찌르기로 하고 떠나려 하는데,
공의 아내와 첩이 앞다투어 옷자락을 잡고 울며 “위로는 늙으신 아버님이 계시고 아래로는 처자식이 있는데,
공은 어찌하여 함부로 사지(死地)에 뛰어드시오” 하자, 공이 이르기를,
“나의 아우 네 사람이면 우리 어버이는 봉양할 것이고
나는 이미 국가에 몸을 허락하였으니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는 것은 직분이며,
이러한 때일수록 군신(君臣)의 의리와 부자(父子)의 은혜를 둘 다 온전히 할 수는 없다.” 하며,
옷자락을 뿌리치고 나가서 아우 한기선(韓機善)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노친을 잘 봉양하라.
나는 기어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차고 있는 이 인끈으로 증거를 삼아 이것으로 나의 시신을 찾아라.” 하였다.
조방장(助防將) 아무개와 군대를 연합하여 복병을 설치하여 중로(中路)에서 적군을 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윽고 적군이 이미 금산(錦山)을 함락하고 험지(險地)를 점령하고 나오지 않아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의령 군수(宜寧郡守) 오응창(吳應昌)이 적군이 두려워서 관아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격분하여 울먹이고 꾸짖으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21일에 아들 한진영(韓震英)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내일 금산의 적진으로 진군할 것이니
너는 너의 어머니를 모시고 보성(寶城) 외족(外族) 이경남(李慶男)의 집에 가서 피난지를 삼되,
이사를 하는 경황없는 즈음일수록 모든 일을 신중히 하여 동요되지 말고 반드시 조용히 처리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곧 절필(絶筆)이었다.
드디어 금산으로 진격하였는데, 고경명(高敬命)공은 이미 이틀 전에 패전하여 죽고
적병은 전쟁에서 갓 이기고 나서 성세(聲勢)가 한창 고조되어 있었다.
공이 윤열(尹悅) 및 창평현감(昌平縣監) 아무개와 합세하여
용담과 금산의 경계인 송현(松峴) 밑에 진군하여 진을 치고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었는데,
적병이 먼저 창평의 군대를 침범하여 창평의 군대가 적병을 바라보고 붕괴되자,
공이 즉시 분노하여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진하여 탄환과 창칼을 무릅쓰고
종일 역전한 결과 적군의 살상이 매우 많았다.
이때 윤열이 뒤를 따라 진군하다가 말을 돌려 먼저 도망쳤는데, 공이 고함을 질러 꾸짖기를,
“윤열아, 남아가 죽을지언정 어찌 남과같이 일을하다가 위기를 당하여 도망쳐서 구차히 살려고 하는가?” 하고,
혼자서 진격하여 날이 어두울 때까지 줄곧 싸웠다.
이러다가 어떤 왜병이 시체더미 속에 잠복하여 있다가 갑자기 말 앞에서 일어나서 칼을 휘두르고 나오므로,
공이 말을 멈춘 채 움직이지 못하고 안장 위에서 칼을 맞으니 바로 8월 9일이었다.
집안사람이 공의 시체를 찾으니 허리춤에 과연 아직까지 인끈을 차고 있었다.
남평(南平)에 임시로 매장하였는데, 16년이 지나서 윤열이 전라도 병사(兵使)로 나가서 공의 충의에 감동하여
심혈을 기울여 계획을 세워서 양주(楊州),서산(西山),선영(先塋) 곁으로 반장(返葬)하여 부인과 합폄하였다.
부인은 장수 황씨(長水黃氏)로, 엄숙하고 정숙하여 부도(婦道)가 있었으며, 공보다 3년 뒤에 죽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한진영(韓震英)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다음은 한인영(韓仁英)과 한도제(韓道濟)이다.
첨지중추부사 한진영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한담(韓曇)은 증(贈) 좌승지(左承旨)이고 다음은 한경(韓炅)이다.
사위는 원익길(元益吉)과 이계(李枅)이며,
한인영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한민(韓旻)ㆍ한잡(韓)ㆍ한면(韓冕)ㆍ한성(韓晟)이다.
승지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한익주(韓翊周)는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이고, 다음은 한주(韓周)이며,
사위는 김수(金濤), 부사(府使) 고계원(高啓遠), 여중구(呂重九), 조천구(曺天久), 성자동(成自童)이다.
한경의 3남은 한상주(韓相周)ㆍ한석주(韓錫周)ㆍ한위주(韓緯周)이고,
한잡의 3남은 한세주(韓世周)ㆍ한후주(韓後周)ㆍ한우주(韓佑周)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이미 남달랐고 지조가 매우 확고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듦에 있어 정성과 공경을 갖추 다하였다.
기개가 고상하고 용기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성품이 조용하며 욕심이 없었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앞뒤로 고을살이를 하며 청렴과 결백에 힘썼고 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할 때면 반드시 의리를 따져 보아서
늘 원대한 계획을 생각하였고 서식대로 처리하고 자기 실속이나 챙기는 꾀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음사(淫祠)를 헐어 폐단이 되는 풍속을 바로잡고
산성(山城)을 쌓아 불우(不虞)에 대비한 것과 같은 일은 역시 그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해구(海寇)가 창궐할 때를 당하여 팔도[八路]가 난리를 만났을 적에
무릇 평소에 나라의 은혜를 입고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녹을 받아먹은 자들은
대개가 꿩이나 토끼처럼 험조(險阻)한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자신과 처자(妻子)를 보호할 궁리만 하였으나,
공은 그때 분발하여 자신도 돌아보지 않고
어버이도 버린 채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동지들을 격려하여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구제하였다.
빈약한 군졸을 거느리고 강경한 왜적에 대항하여 위기에 닥쳐서도
두 마음을 먹지 않고 죽음을 보기를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이것이 어찌 일시적으로 만용을 부려서 강개(慷慨)하며 살신(殺身)하려는 자에게 비할 일이겠는가?
처첩(妻妾)의 읍소를 거절하고 아우에게 시신 수습을 부탁한 일만 보아도
그 늠렬(凜烈)한 사기(辭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데,
아들에게 부친 편지 한 통에 있어서는 더더욱 침착하고 안정되어
사생(死生)에 임하여 놀라거나 겁을 먹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
평소에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수양한 것이 독실하지 않았다면 이럴 수 있었겠는가?
남평 관노(官奴) 석숭(石崇)은 공을 따라 금산(錦山)에 간 자인데,
공의 제삿날을 만날 적마다 고기를 먹지 않으며 “오늘이 우리 원님이 전사한 날이다.”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리고 오랫동안 슬퍼하였으니, 이는 공의 충의가 사람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고경명(高敬命)공 및 그의 아들 고인후(高因厚),
조헌(趙憲)공 및 그의 아들 조완기(趙完基), 이광륜(李光輪)공, 유팽로(柳彭老)공,
안영(安瑛)공, 변응정(邊應井)공은 모두가 공과 앞뒤로 금산에서 순절(殉節)하였다.
금산 사람들이 단(壇)을 쌓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올리니 조정에서 종용사(從容祠)라는 편액을 내렸는데,
논자(論者)들이 이는 수양(睢陽)의 쌍묘(雙廟)와 사실은 같으나 거룩하기는 벗어난다고 하였다.
공이 전사하였을 적에 본도의 순찰사(巡察使)가 행조(行朝)에 장문(狀聞)하였으나,
장계(狀啓)를 가지고 가던 자가 중도에서 적군을 만나 마침내 상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오랫동안 포상하지 않다가, 효종[寧陵] 때에 와서 비로소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추증되고
현종[顯廟] 때에 또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지난해 임진년(壬辰年, 1712년 숙종 38년)은 공이 세상을 마친 지 1백 20년인데,
어떤 대신(大臣)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한순(韓楯)은 해남현감 변응정과 관위(官位)와 의열(義烈)이 다를 것이 없으므로,
변응정의 선례에 의하여 추가로 시호를 내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를 하여 이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추증하고
서성군(西城君)에 봉하였다.
공의 사손(嗣孫) 한석(韓錫)이 그의 아들 한덕기(韓德驥)를 시켜
공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선조(先祖)께서 성조(聖朝)의 충의를 권장하고
죽음을 불쌍히 여기는 은총을 입어서 장차 역명(易名)의 은전(恩典)이 있게 되었으니,
한 마디의 말을 엮어서 고신(考信)하는 자료를 삼게 하여 주오.” 하였는데,
내가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서 곧 말하기를,
“공이 의리를 잡고 용기를 다하여 위기를 보고 목숨을 바치어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하여 죽어서
절의(節義)를 지킨 일은 절혜(節惠)하는 예전의 의리로 헤아려 보아도 다 시법(諡法)에 부응되오.” 하였다.
공의 외현손(外玄孫) 징사(徵士) 김간(金幹)과 집의(執義) 김재(金栽)는 곧 나의 삼종형(三從兄)이다.
언젠가 나에게 공의 행적을 매우 자세히 말하였는데,
지금 공의 행장을 보니 그 말이 다 사실이어서 신빙성이 있으므로,
드디어 위와 같이 다듬고 바로잡아서 태상씨(太常氏)의 채택에 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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