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김부(敬順王 金傅)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288 (고랑포리)
( ?∼979(경종 3).
신라 제56대 왕.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며,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 혹은 實虹·乍慶)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고,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이며,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王建)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하였다.
경명왕(景明王)이 즉위할 무렵 이미 지방에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정권이 형성되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918년(경명왕 2)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경명왕이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또 경명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애왕(景哀王)이
더욱 친고려정책(親高麗政策)을 추진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덕왕(神德王), 경명왕, 경애왕은 아달라계(阿達羅系)의 후손으로 박씨 왕계였다.
927년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신덕왕부터 경애왕까지 이어진 박씨 왕계가 다시 경순왕이 옹립됨으로써 김씨 왕계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했는데,
수십 일을 왕경에 머물면서도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조금도 범법(犯法)하지 못하게 하였다.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3월 견훤이 장남 신검(神劍)을 비롯한 형제들의 음모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일이 벌어졌다.
3개월 후 6월 견훤은 유폐되어 있던 절을 탈출하여
고려군이 점령하고 있는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으로 일단 피신했다가 고려 태조의 도움으로 개경으로 망명하였다.
견훤은 태조로부터 상부(尙父)의 존칭을 받았고, 그 지위가 백관(百官)의 위에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놀란 경순왕은 더 이상 보호국의 처지에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935년 경순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국가를 고려에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태자보다 위인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였다.
그런 다음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채용하였다.
또한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978년(경종 3) 4월에 승하하였다. 묘소는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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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安君 殷說公 太師公 仁琯公 靈壇
대안군 은열공과 태사공 인관공 영단
靈壇奉安 紀念碑
「輔國大安君(보국대안군)은 貫祖(관조)시며 名賢祖(명현조)시고 太師公(태사공)은 派祖一世(파조1세)시며
名賢(명현)이신데 奉祀(봉사)함에 있어 高麗朝(고려조)에는 奉祀(봉사)했었는지 모르나
朝鮮朝以來于今(조선조이래우금)까지 奉祀(봉사)한 事蹟(사적)이 없다.
始遠祖(시원조)께 崇敬之誠(숭경지성)이 稀薄(희박)하여 根本(근본)을 忘却(망각)한
得罪罔極(득죄망극)함을 覺醒(각성)하여 靈壇奉安(령단봉안)하자는 發議(발의)에 後孫(후손)들의 熱誠(열성)으로
雄大(웅대)한 靈壇(령단)이 謹竪(근수)되고 辛巳十月二十日(신사10월 20일)에 歷史的(역사적)인
初有(초유)의 奉安祭(봉안제)를 奉行(봉행)하였고 今後每年陰三月四日(금후매년음3월4일)에 享祀(향사)할 것이다.
此(차)를 紀念(기념)하기 위하여 立石(입석)을 하고
玆(자)에 獻誠金(헌성금)을 協助(협조)한 後孫(후손)들의 名單(명단)을 刻記(각기)하여
後世(후세)에 繼承(계승)하고자 하는 바이다.
西紀二00二年壬午三月 日 서기 2002년 임오 3월 일
慶州金氏太師公派宗會建立 경주김씨 태사공파종회 건립
高麗輔國大安君侍中侍郞平章事慶州金公諱殷說 之靈壇碑
고려보국대안군시중시랑평장사경주김공휘은열 지영단비
대안군(大安君) 은열공(殷說公)
공의 휘(諱)는 은열(殷說)이고 관(官)은 시중시랑평장사보국대안군(侍中侍郞平章事輔國大安君)이다.
경순왕의 넷째아들로 그 행적과 공훈이 전해지지 않아 가늠할 문헌이 없고
정조 갑진년에 지석(誌石)을 발견하였는데
그 글에 ‘경순왕의 제4자 은열은 나라의 생질 된 사람〔國甥之子〕으로 유공지신(有功之臣)이라
특별히 장지(葬地)를 성북십리 외 오룡산남록삼십리 주회(周回)를 사(賜)하노라’하였다.
이로보아 추측하건대 고려 선종때에 공이 있는 분이라 알 수 있다고 한다.
高麗國文純公檢校太師慶州金公諱仁琯 之靈壇碑
고려국문순공검교태사경주김공휘인관 지영단비
高麗輔國大安君侍中侍郞平章事慶州金公諱殷說 之靈壇 配國大夫人慶州崔氏
고려보국대안군시중시랑평장사 경주김공휘은열 지영단 배국대부인경주최씨
高麗國文純公檢校太師慶州金公諱仁琯 之靈壇 配小國夫人利川徐氏
고려국문순공검교태사경주김공휘인관 지영단 배소국부인이천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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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 김일지단 麻衣太子 金鎰之壇
新羅敬順王太子慶州金鎰之壇
신라경순왕태자경주김일지단
高麗大將軍慶州金公順雄之壇
고려대장군경주김공순웅지단
新羅敬順王太子慶州金鎰之靈壇碑
신라경순왕태자경주김일지영단비
마의태자 麻衣太子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태자.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사기(史記)에 의하면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나라를 고려에 넘겨줄 것을 결의하자 마의태자는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다.
이 자리에는 그의 동생 김덕지(金德摯) 왕자 및 이순유(李純由) 등도 이에 함께 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이 눈물을 흘리며 마의태자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하였다.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삼국사기》
그리고 고려에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이에 마의태자(麻衣太子)는 통곡(痛哭)을 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麻衣)를 입고 초식(草食)으로 연명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마의(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문헌(文獻)에 그의 동생 김덕지(金德摯) 왕자도 처자(妻子)를 버리고 그와 함께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가,
이후 화엄종(華嚴宗)에 귀의(歸依)하여 중이 되었는데 승명을 범공(梵空)이라하고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면서 도(道)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고 한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도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또 다른 '왕자(王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인 태자와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경순왕에게 '왕자(王子)가 있었다'고 할 뿐,
그가 세칭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기록은 없다.
이와 같이 사서(史書) 및 문헌(文獻)에 그의 본명은 전하지 않고 다만 태자, 왕자라 하였으며,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신라가 망할 때
다른 귀족들은 고려에 귀부(歸附)하여 왕건이 주는 벼슬과 녹봉을 받고 여전히 호사를 누렸지만,
이들 왕자들은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인물들로 꼽힌다.
마의태자로 유명한 김일(912~?) 사망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왕실의 적자임과 동시 화랑 효종랑 손자 김효종(金孝宗)으로
신라시대 왕족 무관으로 신라 1000명의 화랑을 이끌어간 효종랑이라 부른다.
高麗大將軍慶州金公順雄之靈壇碑
고려대장군경주김공순웅지영단비
김순웅(932-1015)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손자인데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경주김씨 대장군공파(태자공파)의 중시조라 한다.
왕후(王后) : 죽방왕후(竹方王后) 박씨(朴氏)는
예부시랑 박광우의 딸이라고 전하는데 정사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박광우는 죽산 박씨로 되어 있는데 죽산은 경기도 안성으로 신라 수도 경주와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다.
죽방부인을 신라 진골 출신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으나 죽방부인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다.
소원왕후라는 명칭은 죽방부인이 사망한 이후에 고려에서 내려준 시호이다.
敬 順 王 |
竹房夫人 朴氏 |
김일金鎰마이태자 | 김기로 金簊輅 | 부안김씨 |
2자 김교 金較 | 통천김씨 | |||
2자 김순응金順雄 | 경주김씨 계림군파 경주김씨 대장군파(태자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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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金鍠(황) (號 德摯) |
김운발 金雲發 | 나주김씨 | ||
김우발 | 울산김씨 | |||
김명종金鳴鍾 | 김오 金澳 | 우봉김씨, 경주김씨영분공파 | ||
김인관 金仁琯 | 경주김씨 태사공파 | |||
김장유 金將有 |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 | |||
樂浪公主 王氏 |
김은열金殷說 | 김태화 金泰華 | 경주김씨 은열공파 | |
김계령 김계령 | ||||
김숙승 金淑陞 | 안동김씨 | |||
김렴 김렴 | ||||
김중석金重錫 의성군 | 의성김씨 | |||
김건金鍵 | 강릉김씨 | |||
김선金鐥 | 언양김씨 | |||
김추金錘 | 김위옹 金渭翁 실직군왕 悉直郡王 |
삼척김씨 | ||
마이태자의 2째 아들 김교를 시조로 통천김씨라 하였으나, 경주김씨 대장군파에서도 김순웅을 2째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이렇듯 몇몇 군데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연천-병마절도사 성숙成俶, 증 우의정 (0) | 2018.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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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관찰사 성순조成順祖 증 의정부영의정 (0) | 2018.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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