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 의마총(義馬塚)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산89
유일하게 왕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말의 비석 의마총(義馬塚)
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1576-1619)
해남군 삼산면 충리에서 거주하며 무예를 닦고 평안도(平安道) 영유(永柔) 현령으로 있을 때
명나라의 파병 요청이 있어 강홍립(姜弘立)을 원수로 하고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부장(副將)으로 출병하였다.
함길직도(直搗)의 적 소굴을 소탕하던 중 패하여 강홍립과 김경서는 항복을 하였으나
충무공 김응하와 충의공 이유길만은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분전하던 중 화살을 맞고 죽음에 이르렀다.
만주에서 부상한 여진족 누르하치는 후금국을 일으키고 명나라의 세력을 꺾기 위해 계속 명을 압박해 나갔다.
이에 명은 후금토벌을 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한다.
이에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입었기 때문에 姜弘立을 5도 도원수로 하고
진녕군 강홍립(晉寧君 姜弘立) - 도원수 (당시 의정부 좌참찬)
양의공 김경서 (襄毅公 金景瑞) - 총령대장 부원수 (당시 평안절도사)
충무공 김응하(忠武公 金應河) - 좌조방장 - 이후 부차 전투에서 사망
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 - 우조방장 등을 파견한다.
양의공 김경서(金京瑞)를 부원수로 병사 1만 3000명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은
충무공 김응하(忠武公 金應河), 이일원(李一元), 이계종(李繼宗) 등과 함께 원명군의 우영중군장으로 참여한다.
1618년 10월 평북 창성에서 명의 10만 대군과 합류, 승리와 패배가 여러 차례 계속되었으나,
1619년 봄에 들어 점차 후금군 숫자가 많아지자 원정군은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
명나라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조선군사도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도원수(강홍립)와 부원수(김경서)는 후금에 항복하였지만
좌영장 김응하와 우영장 이유길은 끝까지 싸워서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손가락이 잘려 활을 쏠 수도 없었다.
김응하 장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화살한발 쏠 수 없이 망가진 손가락을 보면서,
이유길은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에 입고 있던 한삼소매를 찢어서
'三月 四日 死'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자신이 타던 말의 갈기에 매어 주고 채찍을 쳐 보냈다.
그리고 이국 만리 후차령이라는 곳에서 60명의 군관과 사병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이유길 장군의 기록이다.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行通政大夫永柔縣令兼平壤鎭管兵馬節制都尉 忠毅公延安李公有吉之墓 配貞敬夫人光山李氏合墳
행통정대부영유현령겸평양진관병마절제도위 충의공연안이공유길지묘 배정경부인광산이씨합분
한편 "三月 四日 死"란 피 묻은 한삼자락을 갈기에 맨 이유길 장군의 말은 진중을 뛰쳐나와
산과 강을 건너 주야로 3일 동안을 달려 주인의 집에 도착하여 구슬피 울다 숨을 거두었다.
광해군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
1621년 이유길 장군에게 병조참판직을 내렸고 말의 무덤을 의마총이라 하였다.
이유길 장군의 무덤과 의마총은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183번지에 위치하는데
말은 돌아와 땅에 묻혔으나 이유길 장군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어 가묘로 조성되어 있다.
시신이 없는 무덤 곧 '혈삼무덤'의 주인공이 이유길 장군이며
그 충성스런 말도 혈삼무덤 아래 묻어 주고 '말 무덤'이라 불러 오다가
'義馬塚'이라는 묘지석까지 세워 후세에 전하고 있다.
충의공 이유길의 조부 문청공 이후백 (文淸公 李後白)신도비
資憲大夫吏曹判書兼同知經筵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輸忠貢誠翼謨修記光國功臣
자헌대부이조판서겸동지경연사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
延陽府院君諡文靑公靑蓮李先生神道碑銘
연양부원군시문청공청연이선생신도비명
嘉善大夫吏曹參判兼守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同知經筵事世孫右副賓客黃景源撰
가선대부이조참판겸수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동지경연사세손우부빈객황경원찬
청련거사 문청공 이후백(靑蓮居士 文淸公 李後白)1520(중종 15)∼1578(선조 11)
본관은 연안(延安). 字는 계진(季眞), 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 諡號는 문청(文淸)이다.
관찰사 이숙함(李淑瑊)의 증손으로,
현감 이원례(李元禮)의 손자이며 이국형(李國衡)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임종의(林宗義)의 딸이다.
이후백(李後白)[1520~1578]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호남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호남 암행어사·대사간·이조 판서·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종계변무(宗系辨誣)[조선초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고쳐 달라고 주청하던 일]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2등과 연양군(延陽君)에 추봉되었고, 사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이후백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을 예법대로 치렀다고 한다.
1535년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고, 154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55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뒤 승문원 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 박사(博士)로 있을 때 사가독서로 독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다.
1558년에 호남 지방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는데,
이후백이 명철한 강직함만 소문으로 듣고 스스로 사직하고 떠난 지방의 탐관오리가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1567년(선조 1) 동부승지에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 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573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활약하였다.
이어 인종(仁宗)의 비(妃)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졸하여 복제(服制) 문제가 일어나자
이후백은 삼년상을 주장하였고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 판서가 되었고 1575년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이조 판서와 홍문관과 예문관의 부제학을 지냈는데,
이조 판서로 재직할 때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신중을 기하였고
사사로운 정분이나 뇌물로써 접근하는 소인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호조 판서로 있을 때인 1578년에 휴가를 얻어 함양에 성묘를 갔다가 오랜 동향 친구인
옥계(玉溪) 노진[1518~1578]이 죽자 애통하며 슬퍼하다가 집에 돌아와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백의 저서로는 3권 1책의 『청련집(靑蓮集)』이 있다.
이후백은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2등과 연양군에 추봉되었고,
사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과 강진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부인(夫人) 홍씨(洪氏)는 군수 홍처성(洪處誠)의 딸이다.
아들 이선경(李善慶)은 찰방(察訪)이요,
세 딸은 안창선(安昌善)ㆍ기성헌(奇誠獻)ㆍ박거현(朴擧賢)에게 시집갔다.
찰방의 아들은 이태길(李泰吉)ㆍ이유길(李有吉)ㆍ이복길(李復吉)ㆍ이익길(李益吉)ㆍ이정길(李井吉)인데,
첫째와 막내는 모두 현감이요, 둘째와 넷째는 모두 현령이며, 셋째는 별제(別提)이다.
네 딸은 유희성(柳希成)ㆍ최기(崔墍)ㆍ이진선(李振善)ㆍ김접(金楪)의 아내가 되었다.
증손은 이수인(李壽仁)ㆍ이극인(李克仁)ㆍ이영인(李榮仁)ㆍ이우인(李友仁)ㆍ이호인(李好仁)이다.
이수인은 문과에 합격하여 전한(典翰)을 지내고 염퇴(恬退)하여 학행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이극인은 문과에 급제한 지평(持平)이다.
현손(玄孫)은 선전관 이석구(李碩耈), 참봉 이석형(碩亨), 이석창(李碩昌)ㆍ이석신(李碩臣)ㆍ
이석빈(李碩賓)과 도사 이석관(李碩寬)으로 서출(庶出)과 아울러 14명이다.
청백리 이후백선생
청련거사 문청공 이후백(靑蓮居士 文淸公 李後白)의 배위 정경부인 남양홍씨묘
貞敬夫人南陽洪氏之墓
정경부인남양홍씨지묘
청련사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산 89번지에는 연안이씨 부사공파 유택지로
문장공 휘 숙함(副使公派 文狀公 諱 淑瑊)을 비롯해
청련공의 배위 남양홍씨(配 南陽洪氏),
충의공 휘 유길(諱 有吉), 그리고 함종현령(咸從縣令) 휘 정길(諱 井吉)공의 유택이 있다.
묘역입구 청련사(靑蓮祠)는 광국공신에 녹훈(錄勳)돼 불천위(不遷位)에 오른
청련공 이후백(李後白)의 제각인 청련사(靑蓮祠)가 있다.
청련공이 공신(功臣)으로 녹훈(錄勳)돼 받은 사패지(賜牌地)
발랑리 산 49번지(또는 발랑리 50-8=네비59-2)에 공의 유택이 모셔져 있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된 조부(祖父) 휘(諱) 세문(世文)공을 비롯,
사복시정(寺僕時正)에 증직(贈職)된 아드님(子) 휘(諱) 선경(善慶)이 모셔져있다.
충의공 이유길의 5대조 문장공 몽암 이숙함(文莊公 夢菴 李淑瑊)묘역
(이숙감)
문장공 몽암 이숙함(文莊公 夢菴 李淑瑊) 충의공 이유길의 5대조
본관은 연안(延安). 字는 차공(次公), 號는 몽암(夢庵)·양원(楊原),
이명(異名)은 이숙감(李淑瑊)이다.
이양(李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백겸(李伯謙)이고,
아버지는 연성부원군 이말정(李末丁)이다. 어머니는 한옹(韓雍)의 딸이다.
다섯째 아들로 형 이숙황(李淑璜), 이숙형(李淑珩), 이숙규(李淑珪), 이숙기(李淑琦)
嘉善大夫吏曹參判贈崇政大夫 吏曹判書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諡文莊延安李公諱淑瑊之墓
가선대부이조참판증숭정대부 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시문장연안이공휘숙감지묘
配貞敬夫人江陵金氏祔
배정경부인강릉김씨부
1454년(단종 2)에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경창부승(慶昌府承)이 되고,
15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고, 감찰이 되었다.
145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1459년(세조 5)에 세자사경(世子司經)으로 한관(閑官)을 제수받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64년에 집현전 대신문사를 둘 때에 겸예문에 뽑히고, 이어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으로 나아갔다.
1466년 응교(應敎)로 있을 때인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사섬시첨정이 되고, 이어 군기시정·판교 등을 역임하였다.
1484년에는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485년에는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88년에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수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490년에 성균관대사성·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에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대제학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저서에는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이 있다.
대제학에 증직되고, 문장(文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함흥 문회서원(文會書院)과 구성면 상좌원리 도동서원(道洞書院)에 향사되었다.
咸從縣令延安李公井吉之墓
함종현령연안이공정길지묘
//충의공 이유길 가계//
8대조 이양(李亮)
7대조 이백겸(李伯謙)
6대조 예빈소윤 증 연성부원군 이말정(延城府院君 李末丁)
5대조 문장공 이숙함(文莊公 李淑瑊), 화석정 이름을 짓고 현판을 쓰다.
고조부 현감, 증 이조참판 이원례(李元禮)
증조부 증 영의정 이국형(李國衡)
조부 청련거사 문청공 이후백(靑蓮居士 文淸公 李後白)
조모 정경부인 남양홍씨, 군수 홍처성(洪處誠)의 따님
부친 찰방 이선경(李善慶)
형님 현감 이태길(李泰吉)
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
동생 별제 이복길(李復吉)
동생 현령 이익길(李益吉)
동생 현령 이정길(李井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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