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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정혜옹주貞惠翁主, 연초재 해숭위 문목공 윤신지燕超齋 海崇尉 文穆公 尹新之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2. 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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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옹주, 연초재 해숭위 문목공 윤신지 묘소

貞惠翁主, 超齋 海崇尉 文穆公 尹新之 墓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84-3

 

정혜옹주(貞惠翁主, 1584~1638)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와 그 후궁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신성군(信城君),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 등의 친동생이며, 인조(仁祖)의 고모이다 

정혜옹주의 생모 인빈김씨는 수원김씨 김한우(金漢佑)의 딸로,

명종(明宗)의 후궁으로 있던 경빈이씨(慶嬪李氏)의 외사촌이었던 관계로 궁중에서 자랐다.

이후 선조의 후궁이 되어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으며, 또 선조의 자식을 가장 많이 낳았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의 생모인 공빈김씨(恭嬪金氏)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8세의 어린 나이에 피난 생활을 해야 하는 등 고생을 겪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정혜옹주가 나이가 어렸고, 피난길도 어수선하여 말 등을 준비할 수 없게 되자

선조가 옹주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간 후 무사히 난리를 피하면 큰 상을 내릴 것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내수사(內需司)의 관원으로 있던 윤백상(尹百祥)이 자원하여

옹주를 황해도의 산 속으로 들어가 용케 적을 피하고, 그 해 겨울이 되어서야 의주(義州)로 들어갔다.

이후 정혜옹주는 1596(선조 29) 해평 윤씨 윤방(尹昉)의 아들 윤신지(尹新之)와 혼인하였다.

이때 윤신지는 해숭위(海嵩尉)에 봉해졌다.

 

 

정혜옹주는 병자호란이 발발한지 2년 후인 1638(인조 16) 사망하였다.

당시 왕실에는 정혜옹주 말고도 여러 왕족들이 죽었으나 그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인조는 정혜옹주에 대해 예장(禮葬)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반발하였지만  인조는 자신의 명대로 거행되었으며,

후일 남편 윤신지가 같이 합장되었다.

 

연초재 해숭위 문목공 윤신지燕超齋 海崇尉 文穆公 尹新之

(1582선조15~1657효종8)

본관은 해평(海平). 는 중우(仲又), 는 연초재(燕超齋).

사용 윤희림(尹希琳)의 현손이자 국자감정 윤변(尹忭)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 아버지는 문익공(文翼公) 윤방(尹昉)이다.

윤신지는 선조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여 해숭위(海嵩尉)에 봉하여졌다.

선조가 때때로 시를 지어 바치게 할 정도로 윤신지의 재능을 아끼고 인정하였다.

인조 연간에 군덕(君德)을 극론하는데 서슴지 않았으나 인조는 이를 잘 받아들였으며,

능묘(陵廟)의 대사가 있을 때마다 윤신지에게 감독하게 하였고 마침내 정1품에 올랐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왕명을 받아 노병재신(老病宰臣)들과 함께 강화에 갔다.

당시 묘사(廟社)를 지키고 있던 아버지 윤방이 소모대장(召募大將)으로 죽진(竹津)에 있게 하였다.

갑진진(甲津鎭)이 청군에게 점령되고 부성(府城)인 강화성까지 적이 육박해 오자 진입해오자 자살을 기도하여,

언덕에서 투신했으나 목숨을 건졌다.

이후 전란 중에 아비를 버렸다는 이유로 죄를 주라는 탄핵을 받았으나 인조가 이를 듣지 않았다

널리 사람을 사귀었으나 이름을 나타내기를 꺼렸으며 오로지 내수(內修)에 힘썼고,

현호(玄湖)에 복거(卜居)하면서 스스로 현주산인(玄洲散人)’이라고 불렀다.

(), (),()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현주집(玄洲集)·파수잡기(破睡雜記)가 있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貞惠翁主 綏祿大夫海崇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尹公新之之墓

  정혜옹주 수록대부해숭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윤공신지지묘

 

 

貞惠翁主는 병자호란이 발발한지 2년 후인 1638(인조 16) 사망하였는데

당시 왕실에는 정혜옹주 말고도 여러 왕족들이 죽었으나 그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정혜옹주에 대해 예장(禮葬)을 하도록 명하여,

여러 대신들이 반발하였으나인조는 자신의 명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현재 그녀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으며, 남편 윤신지와 합장되었다.

 

정혜옹주는 윤신지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

남편 윤신지는 품계가 정1품에 올랐으며, 글을 잘 짓고 서화에 능하여 장인인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게다가 두 아들까지 총명하여 한때는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두 아들이 자신보다 일찍 죽는 바람에 약 20여년을 은거하며 지내다가 1657(효종 8)에 죽었다.

 

장남은 윤지(尹墀)이며, 차남은 윤구(尹坵)이다.

장남 윤지(尹墀)는 광해군 때 사직하였다가 인조반정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고,

훗날 예조참판과 전라도관찰사, 경기감사 등을 지냈다. 또 글씨를 매우 잘 썼다고 한다.

윤지의 딸이 김만기·김만중의 어머니로,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 김씨이다.

차남 윤구(尹坵)는 이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윤신지 가계도 해평 윤씨(海平 尹氏)

   조부 : 해원부원군 영의정 문정공 윤두수(海源府院君 領議政 文靖公 尹斗壽,

   조모 : 정경부인 창원황씨(貞敬夫人 昌原黃),  목청전 참봉 황대용(穆淸殿 參奉 黃大用)의 딸

아버지 : 해창부원군 영의정 문익공 윤방(海昌府院君 領議政 文翼共 尹昉)

어머니 : 정경부인 청주한씨(貞敬夫人 淸州韓氏), 상의원판관 한의(尙衣院判官 韓漪)의 딸

            형 윤이지尹履之

               해숭위 문목공 윤신지(海嵩尉 文穆公 尹新之)

               정혜옹주(貞惠翁主),   -선조대왕(宣祖大王),    -인빈수원김씨(仁嬪 水原金氏)

                          <정혜옹주>오빠 : 의안군 성(義安君 珹)

                                         오빠 : 신성군 우(信城君 珝)

                                         오빠 : 추존 원종대왕(元宗大王)

                                          조카 : 16대 인조대왕(仁祖大王)

                                          언니 : 정신옹주(貞愼翁主)

                                         동생 : 정숙옹주(貞淑翁主)

                                         동생 : 의창군 광(義昌君 珖)

                                         동생 : 정안옹주(貞安翁主)

                                          동생 : 정휘옹주(貞徽翁主)

                 장남 : 예조참판 윤지(禮曹參判 尹墀)

                 자부 : 남양홍씨(南陽 洪氏, ) 경기도관찰사 홍명원(京畿道觀察使 洪命元)의 딸

                           손녀 : 정경부인 해평윤씨(貞敬夫人 海平尹氏)김익겸(金益兼)에게 출가 -

                                                                       김만기,김만중의 어머니이며, 인경왕후의 조모

                          손서 : 광산인 생원 증 영의정 광원부원군 충정공 김익겸

                                            (生員 贈 領議政 光源府院君 忠正公 金益兼)

                    차남 : 이조정랑 윤구(吏曹正郞 尹坵)

                   자부 : 청풍김씨(淸風金氏),  영중추부사 김신국(領中樞府事 金藎國)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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