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평공 단산부원군 이무, 翼平公 丹山府院君 李茂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산75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9호
익평공 이무 翼平公 李茂
1355(공민왕 4)∼1409(태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字는 돈부(敦夫).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우왕 때 밀직사사가 되었으나,
간관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이인임(李仁任)의 당으로 몰려 곡주(谷州)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다시 등용되어 1393년(태조 2) 개성부윤이 되었으며,
조정의 특명으로 경상도의 군사를 점검하였으며,
중추원사로 강서(江西: 禮成江)·강화 등지의 병선을 점검해 요소에 배치하는 등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396년 조정에서는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로 삼고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壹岐島]과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1398년 참찬문하부사, 판예조사,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가 되었다.
1398년 말에 세자 이방석(李芳碩)을 보필하던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이 남은의 첩의 집인 송현(松峴洞)에 모여 반란을 모의한다는 정보를
이방원(李芳遠: 태조의 다섯째 왕자)에게 밀고하여 그들을 급습,
평정한 공로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훈되었다.
朝鮮國定社佐命功臣議政府右議政 丹山府院君 諡翼平李公諱茂廟再建碑
조선국정사좌명공신의정부우의정 단산부원군 시익평이공휘무묘재건비
1400년(정종 2)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겸 의흥부윤(東北面都巡問察理使兼義興府尹)이 되었다.
그 해 7월남은·정도전과 친교가 두터운 불충지당으로 지목되어 강릉으로 유배되었으며,
곧 근기(近畿)에 안치되었다가 9월에 풀려났다.
그 해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어,
이방원을 도와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훈되었다.
1402년(태종 2) 우정승이 되었으며,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 해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가 되었다.
1409년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에 관련되어
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안성군 죽산(竹山)에 옮겨져 그곳에서 사형되었으며, 뒤에 신원되었다.
문관으로 입신했으나, 문무를 겸비해 왜구 격퇴와 대마도 정벌 등을 비롯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06년 익원공 낙포 김사형, 이회(李薈) 등과 더불어
원나라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광피도(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정리하여 합편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조선과 일본을 넣어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만들었다.
諡號는 익평(翼平)이다.
翼平祠
익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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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혈동맹'이라는 표현이 있다.
노루 등 살아있는 짐승을 잡아 서로 피를 나눠 마시며 변치말자고 굳게 맹약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청동기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으로,
맹세할 때의 '盟'(맹) 자에 '血'(피) 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야사에 의하면 이방원(후에 태종)과 이무(李茂·?~1409)도 삽혈동맹을 맺은 관계다.
익평공 이무는 1498년(태조 7)에
이방원의 오른팔이 되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오른다.
또 1400년(정종 2)에는 판삼군부사로서
다시 이방원을 도와 '방간의 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기여,
좌명공신(佐命功臣)에도 오른다.
이방원이 배다른 동생 방석, 방번을 죽인 1차 왕자의 난 때는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왕자의 난 때는 개성 선죽교 일대에서 시가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익평공 이무는 태종 7년
윤목( 尹穆·?∼1410), 이지성(李至誠·?~?) 등과 함께
세자의 친견 수행원 일원으로 명나라에 간 적이 있다.
이때 윤목, 이지성 두 사람이 "민씨 형제는 죄가 없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는데,
앞서 태종은 외척의 발호를 의식, 처남 민무구, 민무질 등을 처형한 바 있다.
이무도 이것에 연루돼 국문을 받고 유배가던 중 참수됐다.
'목진공 등이 이무를 쫓아가 죽주에서 만나 명령을 선포하여 전달하기를,
"너의 죄악은 처자까지 죽여야 마땅하나,
특별히 네 자식은 면죄(免罪)하여 각기 머리를 보전하게 한다" 하니,
이무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그 머리를 베어 달고, 이무의 아내와 딸은 적몰(籍沒)하여, 종을 삼았다'. -<태종실록>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현존하는 세계지도는
1402년(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크기가 가로 168cm 세로 158.5cm이고,
비단에 그려진 채색본으로,
지도 상단에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자간을 벌려 지도 제목이 커다랗게 차지하고,
아래로는 종서로 지도 제목에 부합하는
중국 역대 제왕의 국도(國都)와 원나라의 행정부 소재지가 나열돼 있다.
지도 하단에는 이 지도의 제작 경위를 밝힌 권근(權近)의 발문이 종서로 적혀 있는데,
그의 저서 양촌집(陽村集)에도 나와 있는 이 발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제작된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중국 역대 국도의 변천을 나타낸
천태승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합쳐 하나로 만들고,
거기에 조선과 일본을 그려 넣어 건문(建文) 4년(1402년)에 완성한 것이고,
익원공 김사형(金士衡)과 익평공 이무(李茂)의 명에 따라
이회(李)가 두 지도를 편집하고 조선과 일본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일본 류코쿠대학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진본은 아니고 16세기에 모사한 것이며,
이 지도가 일본에 전해진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역사학자 오다 다케오(織田茂雄)에 따르면
메이지(明治) 시대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려대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에 이와 비슷한 지도가 소장되어 있으나
지도 제목이 혼일역대국도강리도(混一歷代國都疆理圖)로 되어 제목이 약간 다르고,
198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구입해온 것이라 한다.
이밖에 류코쿠대학 소장본을
고 이찬(李澯) 선생이 사람을 시켜 모사해온 것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朝鮮國定社佐命功臣右議政 丹山府院君 翼平李公諱茂之墓
조선국정사좌명공신우의정 단산부원군 익평이공휘무지묘
有 朝鮮定 社佐命功臣議政府右議政 丹山府院君翼平李公諱茂之墓
유 조선정 사좌명공신의정부우의정 단산부원군익평이공휘무지묘
朝鮮國定 社佐 命功臣議政府右議政 丹山府院君諡翼平李公永慕碑
조선국정 사좌 명공신의정부우의정 단산부원군시익평이공영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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