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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정효공 홍담(貞孝公 洪曇), 홍담 효자각(洪曇 孝子閣), 증 호조판서 홍종복(洪宗福)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4. 9. 23: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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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참찬 정효공 홍담 (左參贊 貞孝公 洪曇)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 산 30

 

 

 

 

 정효공 홍담(貞孝公 洪曇)

1509(중종 4)1576(선조 9).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태허(太虛).

홍귀해(洪貴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형(洪泂)이고,

아버지는 정랑 홍언광(洪彦光)이고

어머니는 南原梁氏  맹산현감  양윤(梁潤)의 딸이다.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조카이다.

 

1531(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 저작(著作), 설서(說書), 정언을 거쳐,

1546(명종 1) 예조와 이조의 정랑, 1547년 장령, 장악원첨정, 응교를 지내고

1548년 사간, 사복시와 사재감의 정(), 집의가 되고 이듬해 예빈시부정, 전한(典翰)을 거쳐,

1550년 직제학·동부승지, 1553년 호남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 우윤, 형조참판을 지냈다. 

 

 

 

1555년 한성부좌윤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부제학, 도승지, 대사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60년 영남관찰사, 홍주목사, 형조와 공조의 참판을

1565년 함경도관찰사, 지중추부사겸 도총관을

1568(선조 1) 병조판서, 동지경연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

 

1569년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를

1574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 좌참찬, 영중추부사를 거쳐

1576년 예조판서에 중임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한 뒤 지중추부사, 우참찬에 이르렀다.

 

응교로 있을 때 진복창(陳復昌)이 윤원형(尹元衡)의 권세에 빌붙어 사사로이 중상모략을 하자 이를 막았다.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서 김개(金鎧)와 함께 정철(鄭澈) 등의 사림파와 대립하였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시호는 정효(貞孝)이다.

 

                議政府左參贊贈諡貞孝洪公神道碑銘

                의정부좌참찬증시정효홍공신도비명

 

 

有 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  知經筵義禁府春秋館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洪公神道碑銘

유 조선국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동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홍공신도비명

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輔國崇祿大夫行  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晉原府院君 柳根 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보국숭록대부행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진원부원군 류근 찬

嘉義大夫兵曺參判兼 五衛都摠府副摠管世子左副賓客 吳竣 書

가의대부병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관세자좌부빈객 오준 서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金光炫 篆額 書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 김광현 전액 서

 

 

 

 

 

 

 

 

 

 

정효공 홍담묘역 후경

 

홍담 효자각 洪曇 孝子閣

화성시 향토유적 제4호

 

 

 

 

 

孝子左參贊洪曇之門

효자좌참찬홍담지문

 

 

 

좌참찬 정효공 홍담의 장남 홍종복

 

 

 

朝鮮國贈戶曹判書 洪公宗福之墓  贈貞夫人杞溪俞氏祔左

조선국증호조판서 홍공종복지묘  증정부인기계유씨부좌

 

 

 

 

 

 

좌참찬 정효공 홍담의 장남 홍종복 묘역후경

 


議政府左參贊贈諡貞孝洪公神道碑銘

의정부좌참찬증시정효홍공신도비명

근세에 이름난 재상으로서 효성스럽고 우애있고 청렴한 것으로 이름난 분으로는 남양(南陽) 홍참찬공(洪參贊公)이 으뜸이다.

병자년(선조 9, 1576)에 공은 재직 중에 돌아가셨다. 이 때 공의 종백씨(從伯氏)인 영의정(領議政) 인재공(忍齋公)

차마 스스로 행장을 짓지 못하고 공의 막내 사위인 상사(上舍) 오억령(吳億齡)으로 하여금 그것을 짓게 하였다.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지만 아직껏 묘도에는 신도비가 없으니 공의 손자인 희()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명()을 청하며

매우 간절히 말하길, “공의 외조조인 이조정랑 안의 비() 홍씨(洪氏)는 실로 나의 고조고 증영의정의 종매(從妹)이고,

나의 고조비(高祖妣)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조씨(趙氏)이니 정암(靜庵) 조선생(趙先生)의 고모이며, 공의 장모 숙부인(淑夫人)

실로 정암선생(靜庵先生)의 동생으로 원주목사(原州牧使) 조공(趙公)의 큰 딸입니다.

오늘날 우리 선세의 내외 가법을 공만큼 상세히 아는 분이 드므니 감히 이것을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아아! 오늘날 선세의 뿌리가 아득한데, 내가 공께서 선세의 분의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자주 들어서

귓전에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고루한 내가 그것을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은 휘가 담()이고 자는 태허(太虛)이다. ()는 휘가 언광(彦光)이고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을 지내셨고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의 손녀인 맹산현감(孟山縣監) ()의 딸에게 장가갔다.

정덕(正德) 기사년(중종 4, 1509) 정월에 공을 낳았다. 공의 지위가 올라가 귀해지자 고에게는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 추증되었다.

고조는 휘가 익생(益生)이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가 귀해(貴海)이며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를 지냈으며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휘가 경()이며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를 지냈으며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 은전이 삼세까지 추증되었으니 공의 백부 문희공(文僖公)의 지위가 높아져 귀해졌기 때문이다.

 

공은 태어난 지 2년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므로, 조모(祖母) 조씨(趙氏)가 거두어 길렀다.

조씨는 일찍이 공의 등을 도닥이며 판서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아이는 기도가 남달라서 언젠가는 반드시 공을 세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말할 수 있게 된 때부터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공은 겨우 9살 나이에 조모 상을 당하였는데 빈소(殯所) 곁을 떠나지 않고, 발인 날에 상여 줄을 잡고 호곡(號哭)하였다.

어른들이 그 어린 아이를 가련히 여겨서 멈추게 하였지만, 상여의 행렬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백부(伯父)와 선고(先考)를 좇아 여막 살이 3년을 하니, 의젓하기가 다 큰 어른과 같았다.

 

문희공(文僖公)은 공이 조모를 추모(追慕)하기를 어머니같이 하였던 것에 대하여 기특하게 여겨서 시를 지어 주고

수년 뒤에 시험 삼아 그 시에 대해 물어보니, 공은 그 시를 무릎 꿇고 외우니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신묘년(중종 26, 153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정유년에 내간(內艱:모친의 죽음)을 당하였다.

기해년(중종 34, 1539)에 중종이 문묘(文廟)에 알현하고 나서 횡경성의(橫經盛儀)를 거행하니,

공은 명을 받아 서경(書經)을 강하였다. 공은 경의 뜻과 주해에 관통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많은 선비 중에서 1등을 차지하였으므로

그 해 겨울 별시(別試)와 전시(殿試)에 직접 나아가도록 하는 명을 받았다. 다시 그곳에서 뽑혀 괴원(槐院)에 들어갔다가

이윽고 홍문록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고 저작(著作), 박사(博士) 등을 역임하였다.

홍문관 7품 이하의 관들은 한 세대의 일류들만을 뽑아서 그곳에 있게 한다. 조의(朝議)에서 이르기를,

서연에서 권강하는 데에는 이 사람이 없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춘방(春坊)의 설서(說書)를 겸임케 하였다.

임인년(중종 37, 1542)에 부수찬(副修撰), 수찬(修撰)으로 옮기고 이어 사서(司書)를 겸직하였다.

자주 미원(薇垣: 사간원)의 정언(正言), 이조정랑와 병조정랑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병오년에 이조정랑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예조로 옮겼다가 이어

중종실록과 인조실록을 찬수하는데 참여하였다가 다시 이조정랑을 제수받았다. 겨울에 의정부의 전거로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정미년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겨울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으로 옮겼다가

곧 홍문관에 들어가 응교(應敎)가 되었다. 진복창(陳復昌)이 당시 요직에 있었는데 사감(私憾)을 품고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자 하였으므로 공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복창은 매우 화가 났으므로 공이 외지로 나가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공이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공은 그것을 보기를 아무 일이 없는 듯이 하였고 끝내 해를 당하지 않았다.

무신년에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다시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에 제수되었다가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 승진하여 태복시정(太僕寺正)으로 옮기고 이윽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제수 받았다.

 

기유년에 언사(言事)가 시의(時議)에 저촉되어 체직되었다고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서 전한(典翰)을 제수받았다. 경술년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시강원에 오래 있으면서 아뢴 말이 명확하고 통창하였고 지적한 것이 절실하고 곧아서 좌우가 경청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승정원의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다. 임자년에 상께서 몸가짐이 염치있고 삼가는 자를 뽑아서

대궐에서 잔치를 베풀라고 명하였으므로 공과 그 뽑힌 사람들은 자주 도읍에 이르렀다.

 

계축년에 명종이 자전(藉田)을 친경하고 집사에게 상전을 행하여서 공은 가성대부에 올랐다.

여름에 특별히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은 당로(當路)에 있으면서 본디 공을 시기하였다.

윤원형은 남방에 경계가 있어야 하이 방면의 중책을 백면서생에게 맡기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니,

상이 말하기를, “홍담(洪曇)에게는 책략이 있어서 내가 그를 특별히 보내서 남쪽의 근심을 풀어주고자 한다.”고 하였다.

공은 명을 받고 자리에 나아가니 적체된 업무를 일거에 해치웠다.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한성부좌우윤과 형조참판으로 옮겼다.

 

을묘년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경사(京師)로 조회를 갔다가 돌아와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대제학으로 옮겼다가

다시 병조정랑(兵曹正郞), 형조정랑(刑曹正郞),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도승지. 대사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네 번 백부(柏府)의 장이 되고 한번 미원(薇垣)의 장이 되어서 홀로 기풍을 잡고 문란해진 기강을 바로 잡았다.

경신년 봄에 나가서 경상관찰사가 되었다. 영남은 번병이 되고 땅이 넓고 할 일이 많아서 조정의 의논에서

마땅히 사람을 뽑아 보내야 한다고 하였는데,

당시 이량(李樑)이 공을 시기하였지만 공은 응당 뽑혀서 천거되어 그 실제로 그곳을 다스렸다.

돌아와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이량은 그때까지도 정권을 잡고서 자신에게 붙지 않는 자를 배척하였으므로

공은 홍주목사가 되었다. 들어와 형조정랑이 되었다가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승정원은 지위가 목과 혀에 해당되니 모든 관청이 관련된 곳이다. 공이 앞 뒤 출납에 오직 윤허하며

엄히 서리와 노복들을 타일러서 감히 멋대로 방자하게 하지 않도록 하니 오래 묵은 폐단들이 모두 혁파되었다.

가을에 예조의 아경이 되었고 이조정랑으로 옮겼다. 을축년에 한성부윤으로 승진되었고 여름에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들어와서 지중추겸도총부도총관(知中樞兼都摠府都摠管)에 제수되었다겨울에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마침

중국 사신이 와서 영접할 때가 되어서 이치에 맞게 대처하였으므로 폐해가 백성에 미치지 않았다.

무진년에 병조판서가 되고 동지경연성균관사(同知經筵成均館事)를 겸대하였다.

 

기사년에 이조판서로 지위를 옮겼고 이어 동지경연(同知經筵)을 겸대하니 문정이 고요하였다.

공은 오랫동안 요직에 머물러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병을 칭탁하여 체직되었다.

공조판서에 제수되고 형조판서로 옮겼다. 공은 자주 형부에 들어가서 반 마디로 옥사를 결단하여서 이치를 펴는 것이 심히 많았다.

 

임신년에 계모상을 당하였고 갑술년에 복이 끝나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고,

병조판서로 옮겼고 얼마 있지 않아서 사퇴하고 체직되었지만 서반직을 부쳤다.

겨울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고 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에 제수되었다.

이 당시 의옥(疑獄)이 있어서 의논이 자못 중대하였는데 공이 힘껏 원통하다고 쟁론하니

좌중이 모두 얼굴색이 변하는 데에 미치었어도 오히려 그 쟁론을 멈추지 않았다.

 

을해년에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에 공은 빈전도감(殯殿都監) 제조(提調)를 예겸(例兼)하여 밤낮으로

자기 직분에 이바지하다가 몸이 파리하게 되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절친한 이들이 잠깐 쉬라고 하였지만 공은 따르지 않았다.

여름에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옮기고 가을에 지중추(知中樞)에 체직되었지만

종형(從兄)인 영중주추부사 섬()은 곧 인재(忍齋)로서 영상에 제수되었으므로 공은 법례 상 응당 피혐하여야 했다.

 

병자년에 다시 대종백(大宗伯)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사직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었다가 좌공(左公)으로 승진하여 늙음에도 불구하고 복무하다가 문득 국상을 만나 사퇴하지 못하고

병이 심해지는 데 이르렀다. 이 지경에 이르도록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저 순순히 하다가 나라 일만을 걱정하고

한마디도 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손톱을 깍고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부녀들을 물리치고

편안히 침실에 나아가는 것같이 하였으니 이때가 92일이었으며 향년 68세였다.

 

부음이 상에게 전해지자 애도하며 조회 보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부조하였다.

이 해 겨울 11월 갑진일에 남양(南陽)의 부치(府治) 서쪽 청명산(晴明山) 홍법동(弘法洞) 간좌(艮坐)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조가 있어서 자신을 믿는 데 독실하였고 조정에 선 이래로 한 마음으로 공적인 것을 받들고

나라를 근심하기를 집안에 일을 만난 것 같이 하였다. 감히 기꺼워하지 않는 것을 말하였고 시세에 따라 하더라도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도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서도 변천하는 바가 있었다.

대개 그 품부받은 성품이 밝고 민첩하며 실천하는 것이 굳건하여서 강직하고 단정하고 올바르게 하여서 안팎을 한결 같이 하였다.

집에서는 수신하고 나가서는 임금을 섬기는데 힘을 다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었다.

늘 옛날 말을 외우고 말하기를, “ 상신(上臣)은 다른 사람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중신(中臣) 자신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내가 비록 상신은 될 수 없지만 중신만은 되고 싶다.”고 하였으니

그에게 하늘이 부여한 것이 두텁고 그 자임하는 것도 무겁다.”고 하였다.

 

매번 공은 물러나 문을 닫고 꼿꼿이 앉아 경사를 읽고 더욱 역학에 잠겨 주기고

주자강목을 숙독하여 음양소장의 이치를 궁구하고 역대 득실을 관찰하였다.

본래 성품이 번잡스럽지 않고 중후하며 교유하는 것을 즐기지 않고 선을 즐거워하고 현자를 그리워하는 정성은

실제로 사람들이 채 미치지 않는 것이 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굳건하여 바깥으로 달리는 것을 병으로 여겼다.

공은 늘 자제들에게 가르치기를,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가는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손히 하며

말을 신중히 하고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 곧 학문하는 것이다.

여기에 힘쓰지 않으면 실제를 버리고 번화한 것에 힘쓰는 것이니 마땅히 기피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효도하고 우애 있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 났다.

계모 이씨(繼母 李氏)를 섬기기를 정성을 다하여 맛난 음식을 반드시 갖추어서 환심을 얻기에 힘썼다.

나갈 때 어디에 갈지를 알렸으며 돌아와서는 잘 다녀왔다고 인사를 여쭸다.

이러한 일들은 비록 바쁜 업무와 쇠약한 지경이라 하여도 일찍이 하루라도 그만 둔 적이 없었다.

동생 하나를 만나도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여 먹고 마실 것을 주었다.

상중에는 몸이 훼손되어 거의 생명에 지장이 될 지경이었으며 제례를 끝낸 뒤에 재산을 나누어 주되 모두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선조들을 받드는데 삼가고 가난하여 선대의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종족들에게 집에다 설치해 주었다.

봉록의 수입은 반드시 내외 친당(親堂)들에게 균등히 나누어주고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박하게 대하였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주는데 만일 의에 합당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물리쳐서 받지 않았다.

사는 집이 좁아도 더 크게 보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둘레에 한언덕도 심은 것이 없었으니 보는 사람이 송구해 하고

대하기를 넉넉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공이 죽은 지 4년 뒤에 읍인들은 공의 효행을 있는 대로 조정에 보고하여서 조정에서는 특별히 정려를 명하였다.

대개 선량하게 복종한 것이니 인심 중에 이것을 아는 자가 있었다.

 

부인은 조씨(曺氏)이니 창녕(昌寧)의 명망있는 씨족이다.

고는 휘가 익수(益修)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이고 행용인현령(行龍仁縣令)이다.

()는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진사(進士) () ()의 딸이다. 정덕(正德) 갑술년 6월 초10일에 태어났다.

부인(夫人)은 나이 15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유순하고 올곧고 조용하다고 칭찬받았고 시

어머니 이부인(李夫人)을 모시는데 어긋남이 없어서 이부인은 매번 칭찬하여, “현명한 며느리구나 현명한 며느리구나.”라고 하였다.

공에게는 과부인 자매(姊妹)가 있어서 궁핍하게 살았는데 부인은 공의 뜻을 예우하여 그를 섬기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였다.

모두 한결같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성품이 근면하고 검소하여 늘 일찍 일어나서 몸소 칼을 잡고 가인(家人)들을 감독하여 지체가 높아진 뒤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힘드시다고 그만 쉬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청하면 부인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하셨다.

임진난에 적을 피하여 피난하여 숨었다가 56일에 이천(伊川) 땅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79세였다. 계사년 9월에 비로소 공의 묘 왼쪽에 부장하였다.

 

24녀를 낳았다. 장남은 종복(宗福)이니, 자주 천거되었으나 그 때마다 떨어졌고 일찍 요절하였다.

아들의 뜻으로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 되었고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증직되었다.

둘째 아들은 종록(宗祿)이니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이었다.

큰 딸은 첨정(僉正) 최덕순(崔德峋)에게 시집갔으며

둘째 딸은 별제(別提) 남황(南璜)에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좌랑(佐郞) 신종(辛宗)에게 시집갔다 

막내 딸의 사위는 오판서(吳判書)의 손자이다. 아들은 네 명을 두었다. ()는 가선대부이고 부호군이며 종복에게로 출계하였다.

그 밖에 징(). (), ()을 두었는데 헌은 종록(宗祿)에게 출계하였다.

()는 문과에 급제하여 종성판관(鍾城判官)을 지냈고 헌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지냈다.

손녀는 다섯 명이고 외손자는 아홉, 외손녀는 다섯이다.

생원(生員) 윤홍적(尹弘績),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안응(安應), 하종복(河宗福)이며

사위는 행판결사(行判決事) 심집(沈諿), 직장(直長) 이형윤(李亨胤)이며 사인(士人) 이선립(李先立)이다.

종록(宗祿)의 사위는 도()이니 생원(生員)이고, (), (), (), ()이니 모두 사인(士人)이다.

첨정(僉正)에게서 출계한 이는 계영(啓榮)이며 필선(弼善)을 지냈으며 좌랑에게서 출계한 이는 익()이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좌승지(左承旨)와 가선대부(嘉善大夫)을 지냈다. ()이 있으니 문과에 급제하였고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이 있으니 설서(說書)와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출계한 전은 곧 근의 막내 사위이다.

김경원(金慶遠)은 별제를 지냈고 사위는 사인(士人) 채이첨(蔡爾瞻)이고

급제(及第)한 오환(吳煥)과 진사(進士) 홍의원(洪義源)은 좌랑(佐郞)을 지냈고 사위인 봉교(奉敎) 한흥(韓興)은 판서(判書)를 지냈고

증손 넷째아들 희()의 아들은 진도(振道)이니 남양군(南陽君)이며 그 다음은 진문(振文)이니 장성현감(長城縣監)을 지냈으니

모두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다음은 진례(振禮)이다. ()는 아들이 어리다.

진도(振道) 1남을 낳았는데 부()이니 곧 공의 현손이다.

증손녀, 외증손자와 손녀가 대단히 많아서 이루 다 그 이름을 실을 수가 없다.

명은 이와 같다.

 

홍씨는 대대로 신하가 되어 울연히 높이 솟은 나무와 같도다.

문희공이 있으니 부자가 회나무와 가시나무 같도다.

정성스러운 참찬공이여 팔좌에 앉아 있도다.

문희공은 아들과 같고 인재공은 종제로다.

산앵도나무와 저나무가 서로 비추어 얼은 움이 저절로 잘리는구나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 효우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네

그 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오

공은 사욕을 제거하고 굳세어 욕심을 좇지 않네

누가 강관(講官)이 아니겠나 생각을 아뢰어 그 생각을 넓혀준다네

누가 고삐를 잡지 않았을까 뜻은 맑히고 깨끗게 하는 데 두었네

강령을 떨쳐 숙정케 하였고 형평을 잡고 평일케 하고자 하였네

곧은 도와 맑은 이름은 다른 사람의 이목에 있었다네

금구를 덮지 않고 갑자기 산악을 꺾었다오

자리는 덕을 채우지 않았고 인한 자가 장수를 얻지 못했다네

공이 선을 쌓지 않았다면 어찌 그 후세가 창성하였을까

나의 명은 결코 아부가 아니니 후손에게 까지 알려 썩지 않기를

숭정(崇禎) 132월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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