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헌공 홍섬 景憲公 洪暹 남양홍씨
경기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 산 35
曲座齋곡좌재
有 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贈諡洪公神道碑銘幷序
유 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증시홍공신도비명병서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監春秋館事 金貴榮 撰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 영경연감춘추관사 김귀영 찬
嘉善大夫禮曹參判 南應雲 篆
가선대부예조참판 남응운 전
活人署別提承議郞 韓濩 書
활인서별제승의랑 한호 서
황명(皇明) 만력(萬曆) 13년(1585년) 2월 임자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 중추부사 겸 영 경연사 홍공(洪公)이 집에서 졸하여,
4월 경신일에 남양(南陽)의 서쪽 청명산(淸明山) 동북쪽에서 서남향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선영에 모신 것이다.
1년이 지난 뒤에 공(公)의 손자가 찬성 심수경(沈守慶)이 편집한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묘비문을 청하면서 하는 말이
“붓을 잡을 분 중에서 선군을 알기로는 공(公)이 가장 적임자이기에 청합니다.”라고 하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휘(諱)는 섬(暹)이오, 자(字)는 퇴지(退之)이며, 호(號)는 인재(忍齋)이다.
홍씨(洪氏)는 본래 남양(南陽)의 번창한 성씨로 먼 조상의 휘는 선행(先幸)이니 고려에서 벼슬하여 금오장군(金吾將軍)이 되었고,
장군의 7세손 휘 덕의(德義)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며,
전서가 휘 자경(子儆)을 낳으니 본조에 들어와 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 분이 증병조판서 행동지중추부사 휘 익생(益生)을 낳으니, 공(公)의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는 휘 귀해(貴海)는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형(泂)은 우부승지를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부친 휘 언필(彦弼)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문희공이 영의정 송질(宋?)의 따님을 맞이하여
홍치(弘治) 갑자년(연산군 10, 1504년) 9월 10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태어날 때부터 영리하고 슬기로와 남보다 뛰어났는데
장성하여 경서를 가르치니 눈으로 한번만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워버렸다.
드디어 학문에 전력하여 무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기축년 정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신묘년 전시에서 급제하여
겨울에 홍문관 정자(正字)로 선발되었으며 두 번 박사(博士)로 옮겨 시강원 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일찍이 입시할 때 아뢰기를, “일전에 복성군 미(福城君 嵋 : 중종의 아들)의 모자(母子)분이 죄를 입었는데
그것은 비록 죄를 스스로 부른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대하시는 방도에 실수가 없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일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오나 앞으로는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께서도 “네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갑오년에 부수찬으로 승진하여 지제교와 사서(司書)를 겸하고,
사가독서의(賜暇讀書 : 휴가를 주어 학문을 수양하게 하는 것) 명을 받으니 이는 당시에 가장 영예로운 선발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등영(登瀛 : 登瀛州, 당태종이 문학지사 18인을 초빙하여 개관하니
시인들이 그들을 등영주에 비유한데서 온 말. 瀛州는 三神山의 하나)에 비유하였다.
얼마 후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좌랑으로 옮겼다.
이때에 권간(權奸)들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어 사람들이 삼흉(三兇 : 김안로, 임백령, 허자)이라 지목하였는데
공(公)이 일찍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자에게 그 잘못을 면전에서 배척하니 그 무리들이 함께 공(公)을 무함하여
조옥(詔獄 : 왕명으로 죄인을 가두는 옥사)에 가두고 신문하여 예측할 수 없는 위경에 처하였다가 흥양현으로 장류(杖流)되었다.
정유년에 흉한 무리들이 처벌되어 수찬으로 소환되었는데 도중에서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그 때에 권간에 아부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무리들을 다스리는 일이 매우 강경하였는데,
공(公)은 조금도 사심이 없이 힘써 정대한 의론을 주장하니 식자들이 크게 보았다.
무술년에 홍문관 교리로 옮겨 여러 차례 응교(應敎), 전한(典翰), 사헌부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거쳐
경자년에는 직제학(直提學)에 승진되고, 겨울에는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신축년에는 여러 번 대사간, 대사성, 이조 참의로 옮겼고,
그 해 겨울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전임하여 도승지에 이르렀으며,
계묘년 겨울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별 승진하여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임기가 끝나자 동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을사년에 예조 참판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칙사(勅使)가 나와 명종을 책봉하였는데, 공(公)이 원접사가 되어 접대하는 것이 예절에 합당하였다,.
조금 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하는 법도를 의논하여 정하는데 명종이 발 안에 앉게 되니
공(公)이 아뢰기를, “임금은 마땅히 남쪽으로 향하여 임금의 자리에 앉아 만인이 함께 우러러 보아야 하는데,
지금은 자전(慈殿 : 임금의 어머니)께서 발 안에 계시어 전하께서 자전의 북쪽에 앉을 수도 없는 일이니 발 밖에 나와 앉아
군신들을 대하심이 가할까 합니다.”라고 하니 즉석에서 윤허하였다.
가을에는 공조 참판으로 옮겨 동지경연사와 부총관을 겸직하고 정미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가 되고 겸직은
계속하였다. 기유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을 벗고는 다시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한성 판윤으로 옮겼는데 두 겸직은 그대로였다.
임자년에는 임금께서 청렴하고 신중한 신하를 선발하라고 명령하였는데, 모두가 공(公)의 이름을 천거하니
대뤌 마당에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을 장려하였다. 겨울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갑인년에 공조 판서로 전직하여
동지경연사 성균관사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고, 을묘년에는 예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옮겼다.
정사년에는 춘궁(春宮 : 동궁, 순회세자)이 책봉되었는데 공(公)에게 좌빈객(左賓客)을 임명하였고,
명종께서 오릉(五陵)을 전알(展謁 : 성묘)할 때는 공(公)이 찬례(贊禮 : 제향때 왕을 이끌어 예를 행하게 하는 일)가 되어
백관이 단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주관함이 예절에 맞았다. 무오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하여 우찬성에 임명되고
예조 판서, 세자이사(世子貳師)와 여타 직은 그대로 겸직하였다. 가을에는 이조 판서가 되고 겨
울에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나머지 직도여 예에 따라 겸하게 되니 공(公)이 힘써 이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기미년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예조 판서가 되고,
경신년에는 어필(御筆 : 왕이 직접 어필로 써서 임명함) 특별히 좌찬성에 임명하였다. 가을에 별시를 관장하였는데
‘역대의 척리(戚里 : 임금의 외척)와 환시(宦侍 : 환관)의 화’를 들어 책(策 : 과거시험의 문체의 하나, 정사에 관한 논문)을 짓도록
시제를 내었은데 이에 당시의 정치를 가리켜 배척한 것이라고 참소하고 모함하니
공(公)은 병을 핑계하여 문을 굳게 닫고 손님도 사절하였으며 현직을 모두 내어 놓고 단지 판돈녕부사의 직위만 가지고 있었다.
계해년에 권간들이 쫓겨나니 다시 예조 판서에 복직되고 대제학도 다시 맡았다.
갑자년에는 좌찬성에 임명되었고, 을축년 문정왕후의 상에는 공(公)이 제조로서 산릉(山陵)의 역사를 맡았는데
그 보상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했다.
이해 겨울에는 흉년이 들자 공(公)은 진휼사가 되어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생명을 보존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병인년 봄에는 글을 올려 힘껏 사양하여 대제학을 내 놓았으며, 정묘년에는 예조 판서로 옮겼다.
6월에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 선조)께서는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으니
공(公)은 원상(院相 : 국상을 당하였을 때 26일간 대소정무를 맡아본 임시벼슬)으로 승정원에서 번갈아 가며 근무하였다.
무진년에 어필(御筆)로 우의정에 임명하여 총재로 명종 실록을 감수하였고,
기사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여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다시 글을 올려 과분하다는 뜻을 표하고 사직하려 하였으나, 상께서는 너그럽게 타일러 허락하지 않았다.
계유년에도 나이가 정년에 이르자 예에 의거하여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 나이많은 관원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책상과 지팡이)을 하사하였으며,
다시 병으로 사면을 청하니 영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그 때에 대부인(어머니)의 나이가 90이었으나 아직도 건강하였는데 공(公)이 궤장을 받고 술과 음악까지 하사받아 잔치를 벌리니
보는 사람마다 혀를 차면서 근래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였다.
갑술년에 영의정에 승진하였는데 가을에 힘써 사직하니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을사년에 다시 수상이 되었는데 공(公)이 다리에 병을 앓아 걸음이 불편하니
임금께서 젊은 환관에게 부축하고 출입하도록 명하였으니 항상 후하게 대우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병자년에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겨울에 다시 좌의정이 되었는데 공(公)은 쇠약하고 병든 것이 점점 더하고 어머니의 나이도 또한 많아서
여덟 번이나 상소하여 힘써 물러날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편지를 내렸는데,
대략 “경은 원로이며 나이많고 덕망이 높아 나라의 주석이고 또 90세 편모가 있으니
특별히 경의 어머니를 위하여 미두(米豆 : 쌀과 콩,곡식)와 술, 고기를 내려, 내가 대신을 후대하는 뜻을 보인다.”라고 하였다.
공(公)은 병든 몸을 이끌고 임금을 찾아 은혜에 감사드리고
재상직에서 물러나게 해 줄 것을 간청하니 임금께서도 부득이 이를 따랐다.
오래지 않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고 영의정에 나아가니 세 번째 수상이 된 것이다.
열 번째 차자(箚子: 상소문의 한 종류. 사실만을 간략히 기록)를 올려 다시 사면을 청하니
기묘년에 전임이 허락되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경진년에 대부인이 세상을 뜨니 임금께서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또 도승지를 보내서 하유하기를,
“경이 슬퍼하여 몸을 상하는 것이 예에 지나친다고 들었으나,
예법에도 나이 80이면 재최(齊縗 :상복의 한 종류)를 입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원로 대신은 자신을 가벼히 할 수 없는 것이니 경은 예문에 따라 시묘살이는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졸곡(卒哭)에도 승지를 보내서 개소(開素 : 육식을 함)를 권하였고 해당 관청에 명하여 달마다 주육을 내리라 하시니
공(公)은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힘써 사양하였으나
소상(小祥)을 앞에 두고는 미두를 내렸고 또 담제(禫 祭: 대상을 지냄 그 다음 다음달에 지내는 제사)에도 제물을 내렸다.
다시 영중추부사 겸 영 경연에 임명되었는데 공(公)은 경연과 봉조하(奉朝賀)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公)은 고령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슬픔과 추모를 그치지 못하고,
기력은 더욱 쇠약해지져서 병이 오래도록 낫지 못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졸하였으니 향년 82세이다.
임금께서 공(公)의 병이 더함을 듣고 승지를 보내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으나 이미 말을 못하였다.
임금께서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중지하고 어소(御素 : 소찬을 먹음)하였으며,
부조와 장례를 돕는 것이 모두 유달랐고, 벼슬이 높던 낮던 간에 분주하게 달려와 슬퍼한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공(公)은 타고난 천품이 빼어나게 아름다왔고 평소의 품행과 지조가 단정하고 중후하였으며,
오직 경적만 탐독하고 살림살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말을 거칠게 하거나 얼굴빛을 사납게 하지 않았고 따뜻하게 사람을 대하여 온화한 기운이 지극하였다.
위포(韋布 :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있을 때부터 두터운 명망을 지녔고, 벼슬에 나아가 일에 임해서는 힘을 다하여 봉직하였으나
조금도 이름을 얻으려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일찍이 성격이나 언행이 상도에 벗어나는 것이 없었고 항상 자신을 겸손하고 낮게 하여
선비들을 대하였으며, 4조를 내리 섬겨오면서 매번 임금의 자리 앞에서는 인재를 아끼고 선비들의 기상을 넓혀 줄 것을 권하였다.
작은 벼슬에 있을 때에는 강직하고 방정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려 누차 좌절되었으나 끝내 꺾이지 아니하였으며,
괴극(槐棘 : 삼공과 구경)이 되어서는 대체를 유지하여
이미 정해진 법률과 규정을 지키기에 힘쓰고 사소한 변경같은 것은 하지를 않았다.
문장은 고상하고 성실하며 온화하고 우아하였으며 화려하고 과장된 말을 절대로 쓰지 않아,
사대부들이 공(公)에게서 비문을 받으면 하나의 실록이라고 일컬었다.
어릴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종일 단정히 앉아 있어 남들이 한번도 태만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일찍이 송나라 현인들의 훌륭한 말과 선행을 가려서 ‘자경절기(自警切已 : 스스로 경계함이 나에게 절실함)’라 제목을 붙였고,
만년에는 이천선생(伊川先生 : 송나라 程頤)의 사잠(四箴)과 장사숙(張思叔)의 좌우명을 써서 벽에 붙이고
늘 눈여겨 보고 조심하였으니 집에서도 수양을 함이 이와 같았다.
문희공(文僖公)은 가법이 심히 엄하여 손님이 오면 공(公)에게 접대하게 하였는데
공이 가난한 선비처럼 의복을 입고 자제의 예를 행하며 매우 삼가하니 공인지 알지 못하는 손님도 있었다.
문희공(文僖公 : 아버지)이 늙고 병이 들자 공(公)은 반드시 손수 약을 다려 먼저 맛을 본 뒤에 드렸으며,
문희공이 졸하니 집상에 예를 다하여 3년 동안 여막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공(公)은 나이 70이 넘었어도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지성을 다하고 어김이 없었으며,
가벼운 병환이라도 있으면 식음을 폐하고 눈물지으면서 잠도 자지 않았고 상을 당하여서는 크게 슬퍼함이
그 전의 상(아버지의 상)과 같아서 비록 임금의 개소하라는 명을 받았어도 며칠 뒤에는 다시 소식(疏食)을 하였고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는 한번도 자녀에게 대행시키지 아니하였다.
상이 끝난 뒤에 자제들이 공(公)의 생일을 맞이하여 사죽(絲竹 : 풍악)으로 즐겁게 하여 드리려 하니 공(公)이 막으면서 말하기를, “전에는 어버이를 위하여 베풀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차마 이 소리를 듣겠느냐?”하고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니 자제들이 더 말하지 못하였다.
매번 집안이 너무 번창항 것을 걱정하여 일찍이 경연에서 문희공(公)은 영사(領事)로 공(公)은 지사(知事)로
동서에서 부하를 거느리고 들어오니 남들은 영광으로 여겼으나 공(公)은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였다.
항상 절약과 검소함으로 자제들을 경계하였고 지위가 백료의 우두머리였음에도 손님을 맞는 방은 쓸쓸하였으며,
자제들도 감히 함부로 부탁을 못하였고
노복들도 동네에서 방자히 멋대로 굴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어진 정승이라 일컬음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공(公)은 처음에 진산군(晋山君) 유홍(柳泓)의 따님을 맞이하였는데 현숙하였으나 일찍 돌아갔고,
계실 한씨(韓氏)는 좌의정 확(確)의 5대손 증참관 자(慈)의 따님으로,
어려서부터 선량한 자질이 있었고 홍씨 문중에 출가하였어도 집안에서의 행실이 온전히 갖추어져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동서간에도 화목하니 집안간에서 두루 칭찬하였다.
기묘년 정원 26일에 공(公)보더 먼저 졸하였으니 향년 57세요, 그 해 3월 28일에 공(公)묘의 좌측에 장사지냈다.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 기영(耆英)은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고, 딸은 종실 하원군(河原君) 정(鋥)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3남을 두었으니, 기년(耆年)은 천문교수(天文敎授)요, 기수(耆壽)와 기형(耆亨)은 모두 관상감 정(觀象監 正)이다.
첨정은 의정부 우찬성 심수경(沈守慶)의 딸을 맞이하여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경소(敬紹), 경철(敬哲), 경찬(敬纘)이고, 딸은 어리다.
하원군(河原君)은 3남 1녀를 낳았으니, 인령(引齡)은 당은도정(唐恩都正), 형령(享齡)은 익성정(益城正),
석령(錫齡)은 영제정(寧堤正)이며, 딸은 진사 기자헌(奇自獻)에게 출가하였다.
기년(耆年)은 2남을 낳으니 경윤(敬胤), 경승(敬承)이고, 기수(耆壽)는 2남 3녀를 낳으니 아들은 경창(敬昌)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기형(耆享)은 2남 4녀를 낳으니 아들은 경립(敬立), 경의(敬義)이고, 딸은 고응진(高應軫)에게 출가하였다.
경소(敬紹)는 딸 하나를 낳았다. 당은도정(唐恩都正)은 3남을 낳았고, 익성정(益城正)은 1남 1녀를 낳았으며,
영제정(寧堤正)은 1남 1녀를 낳았고, 기자헌(奇自獻)은 1녀를 낳았다.
경윤(敬胤)은 1남을 낳고, 경창(敬昌)은 1녀를 낳았다. 명(銘)하기를
달존(達尊 : 모든사람이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셋이 있으니 치(齒), 덕(德), 작(爵)이로다.
하나는 드물고 둘은 어려운데 하물며 세가지를 겸함에랴?
세가지를 다 누린 이는 처음 보았으니 오직 공(公) 하나 뿐이로다.
그 덕(德)은 어떠하였는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였도다.
그 작(爵)은 어떠하였는가? 벼슬이 황각(黃閣 : 재상)의 우두머리였도다.
그 치(齒 : 수명)는 어떠하였는가? 나이 대질(大耋 : 80세)을 넘었도다.
숙정(肅靖 : 송질의 시호)의 외손자요, 문희의 아들이로다.
경사스러움은 상은 선대에게서 받고 선에 힘씀은 몸소 하였도다.
시례(詩禮 : 선조의 가르침을 받음)가 아름답게 전해지고 존귀한 자리도 선대를 계승하였구나.
청렴과 검소를 스스로 경계하고 공손함과 삼가함으로 직무에 종사하였도다.
아름다운 덕을 모아 여러 도움 받았으니 복록이 모였도다.
살아서는 영화로웠고 죽어서는 애도를 받았으니 처음도 좋았고 끝도 잘 마쳤도다.
옛날의 세신(세가)이란 공(公)을 말함이 아닐는지?
봉분과 집이 있으니 남양(南陽)의 세천(世阡)이로다,
돌 뜨고 글 새기니 천천년을 전하소서.
만력(萬曆) 14년 병술 9월 일 세움.
경헌공 홍섬 景憲公 洪暹 (1504년 ~ 1585년)
본관은 남양, 字는 퇴지(退之), 號는 인재(忍齋], 諡號는 경헌(景憲)이다.
홍귀해(洪貴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형(洪泂)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송일(宋軼)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1535년 이조좌랑으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3년 만에 석방되어, 수찬, 부제학, 경기도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1552년 (명종 7)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1559년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으며
1560년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당하였고,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67년 예조판서가 되고,
1568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연로한 정승)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이어서 우의정에 올랐으나 남곤(南袞)의 죄상을 탄핵하다 또 다시 파직되었다.
1571년(선조 4) 좌의정이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번이나 중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
흥양으로 유배당하였을 때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寃憤歌)」가 있으며,
저서로 『인재집』과 『인재잡록』이 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광국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慶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贈諡 洪公之墓 貞敬夫人淸州韓氏祔左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증시 홍공지묘 정경부인청주한씨부좌
贈貞敬夫人晉州柳氏之墓
증정경부인진주유씨지묘
경헌공 홍섬묘역 후경
경헌공 홍섬의 장자 군기시부정 정재공 홍기영묘소 靜齊 洪耆英
通訓大夫行軍器寺副正洪公之墓 淑人沈氏祔左
통훈대부행군기시부정홍공지묘 숙인심씨부좌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訓大夫軍器寺副正 靜齊南陽洪公諱耆英之墓 配贈貞夫人豐山沈氏祔左
증가선대부이조참판행통훈대부군기시부정 정제남양홍공휘기영지묘 배증정부인풍산심씨부좌
군기시부정 정제 홍기영묘역 후경
서빙고별제 홍류洪鋶
奉直郞西氷庫別提 洪公鋶之墓 恭人恩津宋氏祔左 恭人龍人李氏祔右
봉직랑서빙고별제 홍공류지묘 공인은진송씨부좌 공인용인이씨부우
홍류洪鋶 서빙고별제 묘역후경
홍섬묘역 측면의 묘소 ???
경헌공 홍섬 景憲公 洪暹 가계도
배위 진주유씨 - 유홍(柳泓)의 딸
배위 청주한씨 - 한확의 6대손, 한자(韓慈)의 딸
아들 : 홍기영(洪耆英) 군기시부정
며느리 : 풍산 심씨 - 심수경의 딸
손자 : 홍경소(洪敬紹)
증손자 : 홍류洪鋶 서빙고별제
홍석洪錫 손우재 遜愚齋, 세자익위사사어
손자 : 홍경철(洪敬哲)
손자 : 홍경찬(洪敬纘)
딸 : 남양군부인
사위 : 하원군 외손자 : 당은군 인령
외손자 : 익성군 향령
외손자 : 영제군 석령
외손녀 : 이희령(李稀齡)
외손서 : 기자헌
후배3남 홍기년(洪耆年) 천문교수(天文敎授)
손자 홍경윤(洪敬胤), 홍경승(洪敬承)
홍기수(洪耆壽) 관상감 정(觀象監 正)
손자 홍경창(洪敬昌)
홍기형(洪耆亨) 관상감 정(觀象監 正)
손자 홍경립(洪敬立), 홍경의(洪敬義)
화성-정효공홍담貞孝公洪曇, 홍담 효자각洪曇 孝子閣, 증호조판서 洪宗福 (0) | 2019.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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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홍형洪泂 익평부원군益平府院君, 동지중추원사 홍익생洪益生 (0) | 2019.04.09 |
화성-문희공 묵재 홍언필(文僖公 默齋 洪彦弼), 익산군수 홍경소(洪敬紹) (0) | 2019.04.08 |
화성-평산신씨 제정공파 전부공 신광희(典簿公 申匡禧), 신효무(申孝武), 신현(申晛), 신명후(申明厚) (0) | 2019.03.15 |
양평-문강공 용문 조욱 文康公 龍門 趙昱 (0) | 2019.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