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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대사헌 홍흥(洪興), 문종 숙빈홍씨(肅嬪洪氏),남양홍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5. 2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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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숙빈홍씨(肅嬪洪氏)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사곳리 119

 

 

숙빈 홍씨(肅嬪 洪氏, 1418년 이후 ~ ?)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후궁, 본관 남양(南陽).

아버지는 한성부윤을 지낸 홍심(洪深)이며, 좌의정을 지낸 홍응(洪應)과 남매간이다.

문종이 세자로 있던 1431(세종 13) 음력 119,

권전의 딸 권씨, 정갑손의 딸 정씨와 함께 세자의 후궁으로 정식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이후 세 후궁의 아버지들은

음력 212일 동궁에 딸을 바친 공으로 쌀과 콩 각각 30석을 하사받았다.

한편 세 후궁은 음력 315일 모두 종4품 승휘(承徽)에 봉해졌다.

이후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가 연달아 폐출되면서

당시 권씨가 홍씨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고 이미 딸을 낳았기에

세자빈에 적합하다는 세종의 판단으로 세자빈(世子嬪)은 권씨가 되었다.

그러나 홍씨도 1441(세종 23) 세자의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은 1444(세종 27) 음력 1244살의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다.

 

1450(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한 후에는 종1품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

문종의 정비 현덕왕후는 1441년 아들 홍위(훗날의 단종)를 낳고 곧바로 죽었기에

궁 안에는 중전의 자리가 비어있었던 관계로, 당시 내전은 홍씨가 맡아서 다스리고 있었다.

단종 즉위 후인 1452(단종 즉위년) 음력 87일 정1품 빈()에 책봉되어 숙빈(肅嬪)이 되었다.

 

1453(단종1) 세종의 3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사사된 후에는 안평대군의 작은 집을 하사받았으며,

1454(단종 2) 단종비 정순왕후를 간택하는 자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1485(성종 16)에는 속공 노비를 줄 것을 상소하여 80구의 노비를 받기도 하였다.

그녀가 언제 사망했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호는 숙빈(肅嬪)이다. 남편 문종과의 사이에서 딸이 하나 있었으나, 딸은 4살에 요절하였다.

 

남동생 홍응의 아들이며

숙빈에게는 조카가 되는 홍상은

1466(세조 12) 덕종과 소혜왕후의 딸인 명숙공주와 결혼하여 당양위에 봉해졌다.

 

 

 

        肅嬪 洪氏 之墓

        숙빈 홍씨 지묘

 

 

 

 

 

 

 

 

숙빈홍씨묘역 후경

 

 

대사헌 홍흥(洪興)

 

대사헌 홍흥(洪興)

1434(세종 16)1501(연산군 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字는 사걸(士傑).

홍용(洪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덕보(洪德輔)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윤 홍심(洪深)이며,

어머니는 윤규(尹珪)의 따님이며,  좌의정 홍응(洪應)의 아우이다.

 

1453(단종 원년) 사마시 합격, 음보(蔭補)로 세마(洗馬) 등용.

감찰을 거쳐 평택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1479(성종 10) 지평으로 내직에 들어왔고,

이어서 형조정랑·호조정랑·장령이 되었다가 형조참의로 초배(超拜)되었다.

그 뒤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1490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94년 개성부유수로 전임하였다.

1495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부좌윤을 거쳐, 호조참판·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였고, 인물과 풍채가 준수하여

성종이 자주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우리나라의 인물로 자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南陽洪公諱興之墓 貞夫人廣州李氏之祔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 남양홍공휘흥지묘 정부인광주이씨지부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南陽洪公諱興之神道碑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  남양홍공휘흥지신도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사곳리 68-4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南陽洪公諱興之神道碑銘 竝序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 남양홍공휘흥지신도비명 병서

 

홍씨(洪氏)는 남양(南陽)의 대성(大姓)으로,

그 상세(上世)에 홍은열(洪殷悅)이라는 분이 있어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명신(名臣)이 되었으며,

그 뒤로 이름난 사람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5백 년 동안이나 이어져 내려왔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가장 두드러진 분은 익성 부원군(益城府院君) 홍응(洪應)이며,

그 공명(功名)과 도덕(道德)이 일세(一世)의 으뜸이었는데, 공은 그의 아우이다.

공의 휘()는 흥()이요 자()는 사걸(士傑)이다.

어려서부터 서적을 읽고 글을 지었으며 20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연이어 유사(有司)에게 뜻을 얻지 못하였다.

처음 벼슬에 나서서 세자 세마(世子洗馬)에 제수되었다가

재차 천전(遷轉)되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으며,

누차 천전되어 평택 현감(平澤縣監)이 되었다.

이어 소명(召命)을 받고 돌아와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발탁되었고, 형조호조 정랑을 역임하였으며,

세 번 전임되어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언사(言事, 나라 일에 관한 상소)에 연좌되어 체직되었다.

얼마 안 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초배(超拜)되었고,

조금 지난 뒤에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전임되어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가선(嘉善) 품계에 승진하여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되었고,

이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한 뒤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옮기었다.

별세한 때의 나이는 78세였는데

곧 우리 금상(今上, 연산군을 말함) 8년으로 홍치(弘治) 신유년(辛酉年, 1501)이었다.

그해 828(계유)에 남양(南陽)의 치소(治所) 서쪽에 있는 모리(某里)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기개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지목하였다.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지론(持論)이 정대하여 남에게 아부하거나 굴신(屈伸)하지 않았으며,

홀로 우뚝하게 서서 조수(操守)를 지켰으므로,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부임하는 곳마다 뛰어난 치적(治績)이 있었는데,

평택(平澤)을 다스릴 때에는 하리(下吏)와 백성들이 공을 두려워하고 친애하여

공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 공의 선정(善政)을 고마워하는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세 번 사헌부(司憲府)에 재직하는 동안에는 조정의 기강을 진작(振作)하였고,

유수(留守)가 되었을 때에는 도읍(都邑) 사람들이 서로 경하(慶賀)하여 말하기를,

이 땅을 빛낼 수 있게 하려면 마땅히 예전의 흔적을  씻어낸 뒤에 우리 새 유수가 앉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예전의 유수를 싫어하고 새 유수가 오는 것을 기뻐하여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밭을 갈던 어느 농부가 있었는데 꿩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 말하기를, 꿩아 꿩아, 너도 명부(明府, 유수현령(縣令) 등의 존칭)께서 새로 부임해오는 것이 기뻐서 우느냐? 그 분의 은택이 장차 너에게도 미칠 것이다.고 하였다.

 

목청전(穆淸殿)과 제릉(齊陵)후릉(厚陵)의 제관(祭官)은 으레 근읍(近邑)의 수령(守令)으로 차정(差定)하였는데, 하루는 장단(長湍)과 파주(坡州)의 수령이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는바, 재상(宰相)이 그 경내를 지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공이 조정에 치계(馳啓)하기를, 두 고을의 수령이 사사로운 이유로 공무(公務)를 폐기하였으니, 이래도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두 수령을 모두 파출(罷黜)하라고 명하고, 공에게는 상()을 내려 주었다. 호조(戶曹)에 재직할 때에는 제도(諸道)에 모두 흉년이 들고 오직 경상도(慶尙道)만 조금 농사가 영글었는데, 감사(監司)가 가부(加賦)하기를 요청하자 임금이 그 일을 재상(宰相)에게 내려 논의하게 하였는바, 공은 홀로 분연(奮然)이 나서서 말하기를, 백성들이 풍족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불가하다고 고집(固執)하자, 임금이 특별히 1()을 감()해 주었다. 평생 동안 어떤 일을 당해서도 굽히지 않은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만년(晩年)에는 무릇 벼슬에 제배(除拜)되면 그때마다 번번이 사양하였고,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때서야 벼슬에 나아갔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제(子弟)들이 약을 올리겠다고 청하였는데 공이 물리치며 말하기를, 내 나이가 일흔에 가깝고 임금에게 받은 은혜가 이미 중()하니, 약을 먹은들 다시 무엇을 구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운명할 때에 자서(子壻)들에게 글을 남기며 말하기를, 상사(喪事)를 간이(簡易)하게 치르고 신불(神佛)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다.

공은 수염이 멋지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므로 성종(成宗)께서 일찍이 당양군(唐陽君) 홍상(洪常)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숙부(叔父, 홍흥을 말함)를 중국의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하러 보내고 싶다. 중국 조정 사람들이 그를 보면 필시 동국(東國)에도 이렇게 멋진 재상(宰相)이 있구나.고 말할 것이다.고 하였으니, 공이 군상(君上)에게 허여(許與)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공의 증조(曾祖)는 홍유룡(洪有龍)인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는 홍덕보(洪德輔)인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홍심(洪深)인데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익산 부원군(益山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윤씨(尹氏)로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된 파평 부원군(坡平府院君) 윤규(尹珪)의 딸이다.

공은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예손(李禮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34녀를 낳았다. 장남은 홍사위(洪士偉)으로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이고, 차남은 홍사부(洪士俯)로 성균진사(成均進士) 利川府使이며, 다음은 홍사우(洪士俁)이다. 맏딸은 직장(直長) 이옹(李顒)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감찰 이윤광(李允光)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진사 김윤문(允文)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딸은 사용(司勇) 정인호(鄭仁豪)에게 시집갔다.

 

()은 다음과 같다.

()의 지()는 단단하고 확실하였고, 후의 기()는 꿋꿋하고 엄숙하였네. 지는 장수인 셈이고 기는 졸병인 셈이어서, 향하는 곳마다 굽히거나 꺾이는 일 드물었으니, 그야말로 강()하도다 누가 그에 견주리오. 당시 사람들은 탁류(濁流)에 함께 휩쓸리기를 좋아하여, 서로 그래그래 하면서 그럭저럭 유유(悠悠)하게 보냈으나, 전연 아무 것도 성취한 것이 없으니, 필경에는 무슨 보탬이 있으리오. 후와 같은 분을 어찌 쉽게 얻으리오. 이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 빗돌에 의탁하노라

銘曰

侯之志堅以確侯之氣毅以肅志則帥氣則卒惟所向少屈折強哉矯誰比侔時之人喜同流相諾諾謾悠悠了無成竟何益如有侯豈易得名不磨托玆石

 

 

//남양홍씨 사헌부 대사헌 홍흥 가계 //

증조부 증 의정부 좌찬성 홍유룡(洪有龍

   조부  증 영중추부사 홍덕보(洪德輔

아버지 증 영의정 익산부원군 홍심(洪深)

어머니 정경부인 파평윤씨(尹氏), 증 의정부 좌의정 파평부원군 윤규(尹珪)의 따님

          누이 숙빈홍씨(肅嬪 洪氏,문종후궁)

          형님 홍긍(洪矜)

          형님 좌의정 익성부원군 홍응(洪應) 1428~ (역대 재상 중 최장수 정승 8년 기록)

                         조카  당양군 홍상(唐陽君 洪常) 덕종의 딸 명숙공주(明淑公主)와 혼인

          형님 홍칭(洪稱)

          형님 홍항(洪恒)

                 홍흥洪興 대사헌 1434~

                 배위 정부인 광주이씨, 형조참의(刑曹參議) 이예손(李禮孫)의 따님

                  34

                          장남 사옹원 참봉 홍사위(洪士偉

                          차남 성균관진사, 이천부사  홍사부(洪士俯

                          삼남 홍사우(洪士俁)

                           맏 딸 직장 이옹(李顒)에게

                        둘째 딸 감찰 이윤광(李允光)에게

                        셋째 딸 진사 김윤문(金允文)에게

                        막내 딸 사용 정인호(鄭仁豪)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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