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헌 이장곤(琴軒 李長坤,1474∼1519)
경남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 산6.
금헌 이장곤(琴軒 李長坤,1474∼1519), 배위 청주경씨淸州慶氏 (군수 경상경慶祥敬의 딸)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字는 희강(希剛), 號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이다.
1504년 홍문관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이장곤이 유폐된 이유는 그를 천거하고 모셨던
이극균과 성준이, 연산군의 황음(荒淫)과 난정(亂政)을 바로 잡으려다가 모두 유배당한 후,
1504년 사사(賜死) 및 교살(絞殺)되었고, 이에 연산군이 평소 이극균, 성준과 가까운 이들을 모두 잡아
유배 보내거나 사사(賜死) 시키는 와중에 이장곤도 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갑자사화로 당시 거제시 舊신현읍 일대에는 20여명이 유배와 있었는데 마땅한 배소가 없어,
대부분 2채인 초가집 중에 윗채는 주인이, 아래채는 유배인의 거처로 정해 기거하게 했으며,
형식상 집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고 한 명당 한명의 병졸이 지켰다.
이장곤은 거제시 고현동 고현시장 아래 바닷가 어부의 집 아래채에 기거했다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兵曹判書知 經筵事判義禁府事李公兩位之墓
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겸병조판서지 경연사판의금부사이공양위지묘
1504년 말부터, 서울에서는 본격적인 갑자사화로 피의 소용돌이가 시작되었고,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비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대역죄로 몰려 참혹한 벌들이 내려지는가 하면,
그 죄를 동성팔촌에까지 연좌시키게 되었다.
연산군은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안뜰에서 함부로 마구 때려서 죽이고, 즉시 그 흔적을 없애 버렸다.
정숙의의 아들 봉안군(鳳安君) 봉(㦀)을 이에 연루시켜 생모 정씨를 때리게 하였다.
그리고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봉안군, 두 왕자를 거제도에 안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죽여 버렸다.
이때 거제도에서 귀양 살던 이장곤 홍언춘 이윤 등이 직접 이 사건을 보게 되었고,
이장곤이 거제도를 탈출하는데 결심을 굳히게 된 사건이었다.
중종반정 후 1506년 10월22일, 참찬관 이윤(李胤)이 아뢰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비록 예로 장사지내게 했으나, 그 시체가 아직도 거제도에 있고,
그 집 형세가 능히 운구할 수 없으니,
청컨대 그 가까운 족친에게 말을 주어 내려 보내서 보호하여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하였다.[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은 특히 문무를 겸비한 이장곤(李長坤)을 가장 두려워했다. 마침내 변을 일으킬까 싶다 하여,
경사(京師)로 잡아 보내게 하여 장차 먼저 죽이려고 하였다.
당시 거제도에서 귀양 살던 이장곤은 연산군이 처형하려 하자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눈치 챈다.
그는 주인 어부에게 부탁해 밤중에 웅천(진해)방향으로 배를 타고 도망갔다.
유배인을 감찰하던 근리사(謹理使) 유방(柳房)의 치계에
“죄인 이장곤(李長坤)이 도망갔다.”는 내용이 서울로 올라왔다.
거제현령과 경상감사가 파직 당하고
거제도 유배인들은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철저한 감시 속에서 어려운 귀양살이를 이어갔다.
한편 이장곤의 도망으로 왕은 크게 노하여 상금을 걸고 체포를 서둘되,
경조관(京朝官)을 보내어 모든 도에 있는 관원과 함께 군대를 풀어 찾게 하니, 도하(都下)가 흉흉하여,
혹자는 이장곤이 망명하여 무리들을 모아 거병(擧兵)한다 하였다.
이에 왕은 "장곤의 집을 즉시 폐쇄(閉鎖)하고 그 부모·동생과 족친을 수금(囚禁)하며,
의금부 낭원(郞員) 중 순직 근신한 자를 보내어 그 형 이장길(李長吉)과 함께 조치하여 잡되,
손바닥을 꿰어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오라."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의금부 낭원 중 활 잘 쏘는 무신 2명을 보내어 잡아오라.
이장곤은 활 잘 쏘는 용사이니, 그를 잡아 고하는 자는 익명서(匿名書) 때 잡아 고한 자와 같이 논상(論賞)하라.“
또한 이장곤(李長坤)을 잡을 때 수령 등이 힘쓰지 않았으니, 왕명을 거역하고 준수하지 않은 죄,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논죄하라했다.
함흥으로 달아난 이장곤은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서 발을 붙이고 숨어 살다가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후 예조 이조 병조판서에 올랐다.
1928년~1940년까지 연재된, 벽초 홍명희의 미완성 대하역사소설 ‘林巨正’ 中,
‘이교리의 귀양’ ‘왕의 무도’ ‘이교리 도망’ 등에는 거제도를 역사적 상상력의 장(場)으로 펼쳤다.
소설 내용에 따르면, 북방으로 숨어든 양반 이교리는 신분을 속이고
함경도 함흥 땅의 고리백정인 양주삼의 무남독녀 18세 봉단과 결혼하게 된다.
집주인이자 장인이 된 백정신분인 양주삼의 처질(妻姪)이 임돌이 이고
임돌이의 아들이 이후 유명한 ‘소설 임꺽정’의 주인공이다.
거제도를 탈출한 이장곤은,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로 도망쳐 가던 중에 경북 울진(蔚珍)에 이르렀다.
기골이 장대했던 이장곤은 발이 크다고 소문나 있었다.
관군들이 어찌나 급하게 뒤쫓아 수색하는지 달아나도 벗어날 수 없기에 이르렀다.
이장곤이 길가에서 잠자는 체하고 있었는데 그의 발이 드러났다. 뒤쫓던 자가 그를 지나치면서 말하였다.
“이장곤은 필시 이런 데 있지 않을 텐데
어쩌면 저리도 발이 비슷할까? 아마 산 도둑이지 선비는 아닐 것이다“라며 지나쳐,
위기를 넘겼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여기서 살아난 이장곤(李長坤)은 이후 함흥 어느 고리백정의 집에서 데릴사위 노릇을 하며, 난을 피하였다.
나중에 중종(中宗)왕이 들어선 후, 나가서 우찬성(右贊成)까지 지냈다.
그는 체구가 거대하여 소년 시절에는 장군이 될 사람이라고 하였다.
발이 커서 생명을 건졌고, 또 함흥에서 취한 백정의 딸을 버리지 않고,
늙을 때까지 고향 경남 창녕에서 해로하여 더욱 명성을 떨쳤다.
중종반정 후에 이장곤이 상경하여 임금에게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그에게 떠돌아다니던 전말을 물으므로 이장곤이 그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다.
“이러한 여자를 천첩(賤妾)으로 대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며
새삼 감탄하며 특별히 후부인(後夫人)으로 올려주었다. <기묘당적보(己卯黨籍補)>
양수척의 딸이라 하며, 천민중의 천민에서 정경부인까지 오른 중화양씨, 임꺽정전에도 나온다고 한다.
덧붙여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로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의 재실(齋室)인,
금호재(琴湖齋)가 경남 창령군 대합면 대동리 265번지에 있으며, 경남 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있기 전까지 창녕의 연암서원에서 그의 제사를 모셨다.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 금호재에서 약 1Km 지점에는 그의 묘소와 함께
금헌묘석상(大同里 琴軒墓石像)이 경남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일찍이 문무를 겸비하였고 다른 사대부와는 다르게 품성과 행실이 특히 소탈(疏脫)하였다.
당시 백성은 물론 양반층까지 아우르는 그의 덕성(德性)으로 인해 연산군이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런고로 1512년 7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시에는,
야인 2,000여명이 창성에 쳐들어오자, 군사를 거느리고 맞서 싸워 격파할 정도로 용맹했으며,
그의 학문도 출중해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조선전기 이장곤은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 속에서, 남녘 거제도에서 북녘 함경도까지 도망자 신분에서
이조•병조판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수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으며,
그가 백정의 딸과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그 의리를 지킨 점에서, 수백 년 동안 민중들의 이야기꺼리가 되었다.
이장곤은 말년에 경기도 여강(驪江 여주) 강가 우만(祐灣)에서 기거하다가,
다시 고향 경남 창녕으로 내려와 살다가, 46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여생을 마쳤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다
貞敬夫人中和楊氏之墓
정경부인중화양씨지묘
琴軒 李先生 墓道碑
금헌 이선생 묘도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9호
有明朝鮮國右贊成琴軒李公墓碑銘
유명조선국우찬성금헌이공묘비명
이상정(李象靖: 1711~1781) 撰, 조윤형(曺允亨: 1725~1799) 書
조선조 연산군 10년,
생모윤씨의 폐위실체을 임사홍으로부터 알게 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과 그 소생의 왕자들을 죽이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은 무덤을 파 시체를 꺼내어 부관참시를 했다.
폐위 사건에 관련된 김굉필 등 10여 명의 제신들도 학살했다. 이를 '갑자사화'라 한다.
이때 홍문관 교리(정5품) 벼슬을 하던 이장곤은 유배를 가게 됐다. 그가 김굉필의 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졸에 이끌려 거제로 귀양가던 중 금부도사가 뒤쫓아 왔다.
금부도사가 전할 어명이 무엇인지 그가 짐작 못할 바 없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장곤은 나졸과 금부도사들을 불시에 들이치고 도주를 감행했다.
연산군은 팔도에 명을 내려 그를 잡아들이게 했다.
쫓기는 몸이건만 너무 지친 이장곤은 어느 산골에서 그만 잠에 골아 떨어졌다. 이때 군졸들이 닥쳤다.
그런데 잠든 사나이의 발을 본 군졸들은 그 발이 어찌나 크던지 상놈의 발일 거라며 돌아가 버렸다.
이렇게 또다시 화를 면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함흥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 처녀를 우물가에서 만났다.
이장곤은 목이 타서 처녀에게 물 한 모금을 청했다. 이때 처녀는 물그릇에 버들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너무 목이 타 벌컥벌컥 들이켠 이장곤이 목이 축여지자 물었다.
어찌하여 버들잎을 띄워 주었냐고. 처녀는 말했다.
갈증이 심할 때 물을 급히 마시면 병이 되어 버들잎을 훌훌불며 마시라고 그랬노라고. .....
처녀의 집은 양수척(楊水尺)으로 버들로 키나 소쿠리를 만들어파는 고리장인 천민중의 천민이였다.
은신처가 필요했던 이장곤은 그 처녀와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눌러 앉았다.
하지만 서책만 읽던 서생이 소쿠리를 만들 줄 아나, 키를 만들 줄 아나, 돼지를 잡을 줄 아나.
양식만 축내는 판이니 처녀의 부모는 놀고먹는 사위가 미워 말투도 차츰차츰 변했다.
"이 서방님 일어나셨습니까?"
"이서방 일어나셨는가?"
"이서방 일어났나?"
"야, 이서방 이놈아 아직도 자빠져 자냐?"
"밥도 아깝다 그 자식 밥 주지 마라"
하지만 그의 아내가 그를 불쌍히 여겨
매양 솥바닥의 누룽지를 긁어 더 먹여주었고 남편의 몫까지 일을 하며 남편에게 지극정성을 다 하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낸지 몇 해 후,
어느날 게으름뱅이 사위가 느닷없이 장구경을 다녀오더니
내일 관가에 보낼 고리짝은 자기가 바치고 오겠다고 자청했다.
기가 막힌 장인은
"관가에 고리짝 바치기가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데 제깐놈이 감히 고리짝을 바치러 가겠다고?"
그 때 옆에 있던 이장곤의 아내가 말하였다.
“시험 삼아 한번 보내보도록 하시지요.”
그러자 장인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장곤은 등에 고리를 짊어지고 관아의 뜰로 바로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 곳에 사는 고리장이가 고리를 바치기 위해 와서 기다립니다.”
때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세상이 바뀌었으며 당시 함흥부윤은 이장곤과 동문수학했던 지기였다.
함흥부윤이 이장곤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라 섬돌을 내려와서 손을 잡고 자리에 올랐다.
“자네는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셨는가? 조정에서 공을 찾은지 오래되었네.”
이어서 술과 음식, 옷과 갓을 챙겨주었다.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
고리장이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구차스럽게 목숨을 연명하다가 뜻밖에 다시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네."
함흥부윤이 순찰사령에 급히 보고하여 곧 역마를 내어 상경하도록 재촉하였다.
“고리장이의 집에 3년 동안 주객의 처지로 있었으므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겸하여 조강지처의 의리가 있네.
지금 가서 작별을 고할 것이니, 그대는 내일 아침에 나를 찾아와 주시게.”
이튿날 아침에 이장곤이 일찍 일어나서 뜰을 청소하니, 장인이 좋아했다.
“우리 사위가 어제 고리짝을 잘 바치더니, 오늘 아침에 집 뜰을 청소하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그 때 이장곤이 뜰에 짚으로 자리를 까니, 장인이 의아해하였다.
“어찌하여 자리를 까는가?”
사또가 행차할 것이라는 이장곤의 대답에 장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게. 사또가 어찌 우리 집에 행차하겠는가.
자네 어제 고리를 잘 바쳤다는 것도 필시 길에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허세를 부려 큰소리친 것이로구나.”
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함흥부의 아전이 채색 자리를 가지고 헐레벌떡 와서 방안에 깔았다.
“사또 행차가 곧 당도하십니다.”
고리장이 부부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색이 되어 울타리 사이에 피해 숨어 있었다.
조금 뒤에 수령의 앞길을 인도하는 전도 소리가 문 앞에 들리고 본관사또가 당도하여 인사를 한 다음,
이어서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디에 계시오? 청컨대 상견례를 행하겠습니다.”
이장곤이 아내를 불러내어 절하게 하였는데, 의복은 비록 남루하나 의용이 매우 안온하고 예절이 발라 천한 상민 여자의 촌스런 태도가 없었다. 본관사또가 경의를 다하여 말하였다.
“이학사(이장곤)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적에 아주머니의 힘으로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비록 의기의 남자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소.”
또 사또가 이장곤의 장인을 불러 술을 권하고 따뜻한 말로 위로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이 잇달아 오고 감사도 막료를 보내어 전하니,
고리장이의 집 문밖이 사람과 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장곤이 본관사또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비록 천한 상민이나, 내가 이미 아내로 삼았으니 버리는 것은 불가하네.
원컨대 가마 한 채를 빌려주어 같이 가게 해주시게.”
본관사또가 그 말대로 들어주었다.
이장곤이 상경하여 임금에게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그에게 떠돌아다니던 전말을 물으므로 이장곤이 그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다.
“이러한 여자를 천첩(賤妾)으로 대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임금은 새삼 감탄하며 특별히 정부인으로 올려주었다.
이장곤은 훗날 벼슬이 좌찬성(종1품)에 이르렀고 백정출신의 아내는 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
이장곤의 처는 백정에서 정경부인까지..
조선시대 신분상승의 정점을 찍은 여인
금호재(琴湖齋)
경남 창녕군 대합면 대동길 33,
경남 유형문화재 제262호
금헌묘석상(琴軒墓石像)
경남 유형문화재 제296호.
금헌 이장곤 묘역 뒷쪽에 위치한 고려말 조선 전기 형태의 묘역
경상남도나 창녕군 학예사들의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할것 같다.
김천의 창녕조씨 참의공종중에서는
참의공 조심(曺深)의 조부인 조우희(曺遇禧, ?~1350)의 부인 성산이씨로 추정한다고 한다.
//금헌 이장곤 가계도//
고조부 도원수 이희경(李希慶)
증조부 증 이조판서 이신지(李愼之)
조부 흥해군수 이호겸(李好謙)
부친 한성참군 이승언(李丞彦)
모친 완산이씨, 이조참판 춘양군 이래(春陽君 李徠)의 따님
형님 호조판서 이장길(李長吉)
형님 현감 이장견(李長堅)
형님 이장성(李長城)
동생 이장배(李長培)
금헌 이장곤(琴軒 李長坤),
배위 청주경씨, 군수 경상경(慶祥敬)의 따님, 无子
배위 정경부인 중화양씨, 양수척(楊水尺)의 따님
자 이덕남(李德南)
손자 이충서(李忠恕)
증손자 이경복(李慶復)
이상운(李尙雲)
대구-모하당 김충선 (慕夏堂 金忠善),녹동서원 (0) | 2019.07.12 |
---|---|
대구-녹동서원(鹿洞書院), 모하당 김충선(慕夏堂 金忠善) (0) | 2019.07.12 |
창녕-군수황후덕순애민비郡守黃侯德純愛民碑, 황덕순 창령군수 애민비 (0) | 2019.07.11 |
대구-곽규郭赳, 곽삼길郭三吉, 곽간郭趕, 곽재정郭再定,, 곽재열郭再烈 (0) | 2019.07.10 |
대구-곽재록郭再祿, 곽재지郭再祉, 곽인郭嶙, 곽재기郭再祺, 곽류郭瀏 (0) | 2019.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