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신채호 丹齋 申采浩 단생신채호 丹生申采浩
1880년 11월 7일(음력)~1936년 2월 21일
고령신씨(高靈申氏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20세 경부터 신채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으며,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 산동학원(山東學院) 설립, 신교육운동 전개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의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1906년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서호문답(西湖問答)」·「영웅과 세계」·「
학생계의 특색」·「한국자치제의 약사」·「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을 실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신채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옷이 다 젖는 한이 있어도 일제에 머리 숙이지 않겠다.”
“내가 죽거든 시체가 왜놈들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띄워달라.”
//단재신채호 丹齋,申采浩 가계도//
증조부 신명휴(申命休)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장령
할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
아버지 신광식(申光植1849~1887)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
형 신재호(申在浩, 1872~1899)
단재신채호 丹齋,申采浩(1880.11.7.일(음력)~1936.2.21.)
배위 풍양조씨(豊壤趙氏, 1895년 결혼, 1910년 이혼)
아들 : 신관일(申貫日, 1909년 출생 후 요절)
배위 박자혜(朴慈惠, 1895.12.11.~1944.10.16)
아들 신수범(申秀凡)
아들 신두범(申斗凡, 1924~1941, 영양실조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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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이회영 友堂李會榮
우당이회영 友堂李會榮
1867년(고종 4)~1932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1907년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이회영 본인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시급한 교육진흥운동을 위하여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 이동녕(李東寧), 주진수(朱鎭洙),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여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가족 전체가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 한용운(韓龍雲), 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1932년 11월에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만주의 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몇 대에 걸쳐 풍족하게 쓸 명동 일대의 토지, 현재 시가 600억 원
이회영의 집안은 선조인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를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였다.
또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이 거의 이 집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다.
가진 재산과 조상 대대로 쌓은 명망으로 그들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여섯 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월남 이상재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하였으나,
그러나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조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재산을 몽땅 내놓고 고난속의 망명의 삶을 택했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집과 논밭을 팔아 40여만 원을 마련했다.
소값으로 환산하면 오늘날 600억 원, 땅값으로 치면 2조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흔히 사회적 지위에 맞게 솔섬수범하는 자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하는데,
이회영의 가문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여섯 형제, 재산과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단 한 명만 살아남아
이회영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자제였던 이들 6형제는 일제 때 나라가 망하자
'대대로 명문이란 우리 가문이 일제 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 통탄했다.
이들은 백사 이항복의 10세 후손으로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유승(李裕承)의 여섯 아들이었다.
이들 형제는 60명의 대가족 모두를 12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1910년 겨울에 서울 명동을 떠나 눈 내리는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첫째는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이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은 넷째였던 이회영이었다.
후일......
첫째 이건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둘째 이석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셋째 이철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넷째 이회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다섯째 이시영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여섯째 이호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우당이회영 友堂李會榮 가계도//
10대조 백사이항복 白蛇李恒福 영의정
9대조 이정남李井男 성천부사 예빈시정
8대조 이시술李時術 이조참판
7대조 구천 이세필, 龜川 李世弼 형조참판, 증 좌찬성 문경공(文敬公)
6대조 아곡 이태좌 鵝谷 李台佐 좌의정, 충정공(忠定公)
5대조 오천 이종성 梧川 李宗城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4대조 이경륜李敬倫 관찰사
종증조부 동강 이석규 東江이석규 이조판서, 효정공(孝貞公
증조부 이정규李廷奎
조부 이계선李啓善 이조판서
부 이유승李裕承 우찬성 효정공(孝貞公)
백부 이유원李裕元 영의정
형 이건영李健榮
조카 이규룡李圭龍, 이규면李圭冕, 이규조李圭助
형 이석영李石榮
조카 이규준李圭駿, 이규서이규서---无后
형 이철영李哲榮
조카 이규붕이규붕, 이규상이규상, 이규화이규화
동생 이시영李始榮
조카 이규봉李圭鳳--이종건이종건
조카 이규홍李圭鴻--이종문이종문, 이종택이종택
동생 이호영李護榮
조카 이규황이규황, 이규준이규준--无后
우당이회영 友堂李會榮
배위 달성 서씨(達城徐氏,1866년~1907년 1월): 서신보의 딸 2남 1녀
자 이규룡李圭龍 계 이건영
자 이규학李圭鶴
손자 이종무이종무, 이종원李鍾遠, 이종찬李鍾贊,
배위 한산이씨 영구 이은숙 榮求 李恩淑(1889~1979) 3남 4녀
자 이규호李圭虎
자 이규창李圭昌
자 이규동李圭東
손자 이종걸李鍾杰, 이종헌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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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단장 김구金九,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 석린 민필호 石麟 閔弼鎬
최흥식崔興植
1909년~1932년
1931년 중국 상하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국제연맹조사단 환영식참석차 만주에 오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시게루를 비롯한
일본 고관들을 처단하기위한 계획을 유상근 등과 추진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여.
유상근柳相根
1910년~1945년
일제강점기 대련에서 관동군사령관과 남만철도총재 등의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晋州). 강원도 통천(通川) 출신. 유기춘(柳基春)의 아들이다.
1918년 통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가족이 북만주 연길현 용정(延吉縣龍井)으로 이주하게 되자,
그 곳 동명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연길현 백평리 봉밀구 갑산촌(百坪里蜂密溝甲山村)으로 이사한 뒤로는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고,
야학과 소년단을 창설하여 후배교육과 항일사상 고취에 주력하였다.
1927년 갑산촌에 조사차 나온 일본경찰과 충돌한 뒤 이곳을 떠나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김구(金九)의 지시로 1932년 한국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 대련(大連)에서 김구의 지령으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동료 단원 최흥식(崔興植, 이성원(李盛元) 등과 함께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만주에 온 것을 계기로
일본의 관동군사령관, 남만철도총재 등 침략 원흉을 폭살하고자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관동청재판소(關東廳裁判所)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련 여순(旅順)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광복을 하루 앞두고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석린 민필호 石麟 閔弼鎬
1898년(고종 35)~1963년
1910년 7월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
1911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신규식(申圭植)이 경영하던 박달학원(博達學院)에 입학,
중국어와 영어를 배웠다.
1912년 7월 학원을 졸업하고 그 해 9월 다시 남양학당(南洋學堂)에 입학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미 1912년 2월 학생신분으로 동제사(同濟社)와,
그 뒤 확대 조직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 7월 남양학당을 졸업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된 뒤 그 해 7월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의 딸과 혼인하고
신규식의 비서로 일하면서 정풍문학원(正風文學院)에 입학, 중국 고문학을 연구하다가 다음 7월 졸업하였다.
1921년 10월 임시정부국무총리대리이며 외무, 법무 총장인 신규식 특사의 수행비서로,
손문(孫文)의 광둥호법정부(廣東護法政府)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는 데 공헌하였다.
1923년 10월~1936년 4월까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비서로 재무를 책임맡아 경비 조달주력.
1924년 1월 상해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이 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 운영과 교포 교육사업에 힘썼다.
1936년 김구(金九)를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의 호법의장(護法議長) 추푸청[褚輔成] 저택으로 피신케 하고,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엄항섭(嚴恒燮), 조완구(趙琬九), 안공근(安恭根) 등을 항저우[杭州]피신주선.
1937년 10월 난징[南京] 교통부의 전정사(電政司)가 되었다가
12월에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蔣介石) 시종실의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대령급)로 일하였다.
1939년 5월에 사임하였다.
1939년 5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 판공실장 겸 외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복간, 발행하였다.
광복이 되자 중국국민당과 교섭, 임시정부의 환국 경비 6억 원과 비행기 두 대를 빌리는 데 성공하여
임시정부 요인의 환국사무를 무사히 끝내도록 힘썼다.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부단장에 임명되어,
단장 박찬익(朴贊翊)을 도와 임시정부의 잔무를 정리하고 화북·화중·화남·만주 일대의 대표단 분단을 설치하였다. 1957년 7월에 귀국, 충칭에서 창설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재건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 중국에 남아 있던 한국교포 문제를 중국의 유력 정치가와 교섭하여 매듭지었으며,
1948년 8월 대만(臺灣)주재 초대총영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저서『한중외교사화(韓中外交史話)』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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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복도가 이리 넓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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