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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한서 남궁억 기념관 翰西 南宮憶 記念館

홍천

by 碧巖 2019. 8. 20.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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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남궁억 기념관 翰西 南宮憶 記念館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387

 

 

 

 

 

한서 남궁선생 신도비

 

 

 

한서 남궁억 기념관 翰西 南宮憶 記念館

(1863(철종14)~1939)

 

본관은 함열(咸悅). 는 치만(致萬), 는 한서(翰西)

아버지는 도사(都事) 남궁영(南宮泳)이다.

1884(고종 21)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해관(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고종 23) 내아문(內衙門) 부주사(副主事)가 되었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영국·러시아·독일 순방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소환되어 돌아왔다.

1889년 궁내부별군직(宮內府別軍職)을 거쳐, 1893년 칠곡군수를 지냈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에 내무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서울 종로,정동일대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896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그 해 7월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

            중앙위원·서기·사법위원·평의원 등에 선출되는 등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9월 나수연(羅壽淵),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

189811월독립협회 운동으로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붙잡히고 독립협회 해산

19007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25월에도 황성신문

1894년 일본이 동학농민운동 이래 우리나라를 침략하며 러시아와 맺은 러·일협정의 침략적 사설을 게재.

          이 사건으로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황성신문사장 남궁억과

           총무 나수연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 뒤 귀경하였다.

1906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정미칠조약을 체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11월 권동진(權東鎭), 여병현(呂炳鉉), 유근, 이우영(李宇榮), 오세창(吳世昌), 윤효정(尹孝定),

           장지연(張志淵), 정운복(鄭雲復), 홍필주(洪弼周)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8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하며,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하였다.

 

19108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새세대 교육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

            그 해 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남궁억은 1918년 자신의 선향인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모곡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191994년제 보통학교인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는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보급하였으나

일제는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였으며, 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그 후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여

1935, 8개월간 복역하고 노령으로 석방되어 개성의 윤치호 자택에서 잠시 요양하다가 고향 홍천으로 낙향.

 

저서로는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가정교육, 조선어보충(朝鮮語補充),

신편언문예법,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등이 있으며

이 중에는 기독교계열 학교의 교과서,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19371월에 부인양씨의 장례식을 치룬 뒤 그는 제자들과 친지들에게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2년 후인 석방된 지 4년 만인 193945일에 고문 후유증 등으로 사망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한서 남궁억 양양군수 부임 환영회 즉석시조

자유강산

설악산 돌을 날라 독립기초 다져놓고

청초호 자유수를 영 너머로 실어 넘겨

민주의 자유강산 이뤄놓고 보리라

 

 

 

 

 

 

 

 

 

 

 

 

 

 

 

 

 

 

 

 

 

 

 

 

 

 

 

모곡학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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