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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노동서원(魯東書院), 문헌공 성재 최충(惺齋 崔冲), 문화공 최유선(文和公 崔惟善), 해주최씨

홍천

by 碧巖 2019. 8. 2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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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서원魯東書院 

강원도 홍천군 서면 어유포리 84-2

문헌공 성재 최 충(文憲公 惺齋 崔冲),  문화공 최유선(文和公 崔惟善)

강원도 지방문화재 제510, 511

 

 

노동서원(魯東書院)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원조인 성재 최충(惺齋 崔冲)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

그리고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있다.

최충의 12대 손인 최변(崔汴)이 홍천으로 낙향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지었다가 후에 노동서원이라 개칭되었다.

 

서원에 봉안된 두 분의 영정은 1628(영조24)의 거작(巨作)으로서,

1984627일 강원도 일반 동산문화재로 각각 등록되었으며

그 외 제기(祭器) 일체가 또한 문화재로 등록, 현재 서원(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대지 1500평에 건평 20평의 정전(正殿)14평 의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으며

내삼문(內三門)과 외삼문(外三門)이 각각 2씩 있다.

정전(正殿)에는 문헌(文憲), 문화(文和) 두 분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동재와 서재는 유인(儒人)들이 체류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강론하는 곳이다.

또 유교적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 을 위한 행사의 장으로도 쓰이며

특히 인근 초,,고 학생들의 유적순례지로서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본 서원은 원래 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있던 것을 수호(守護)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19325월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6.25동란에 소실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일부를 개축(改築)하고 수차에 걸쳐 중수(重修)하였다.

또한 정례 행사인 제향을 유림행사(儒林行事)로서 받들며 년 1회 봉제사를 올린다.

제향일은 음력 9월 상정일(上丁日)

 

노동서원입구

 

 

홍천 노동서원 주벽 : 성재 최충(惺齋  崔冲, 9841068)

고려 전기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는 호연(浩然), 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고려 성종때 판리부사(判吏部事)에 해주 목민관(海州 牧民官)을 지낸 해주최씨 시조 최온(崔溫)의 아들.

 

1005(목종8, 22) 갑과(甲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서경 장서기(西京 掌書記)에 임명. 

1011(현종2, 28) 수제관(修制官)보임되어 있다가 거란군과의 2차 전쟁에 참여하여 좌복야(左僕射) 임직.

1012년  우습유(右拾遺). 

1013(현종4, 30) 수찬관으로 거란군 침입으로 불탄 역대문적 편수하고 태조~목종까지 7대 실록 편찬. 

1020(현종11, 37) 중서문하성 기거사인(中書門下省 起居舍人)에 임명되다. 

1024(현종15, 41) 중추원직학사(中樞院直學士)에 임명되다. 

1025(현종16, 42)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 왕명으로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비문을 짓다.

           거돈사는 소실되었으나 탑비(塔碑)는 현존하여 대한민국 보물 제78호로 지정되다.

1026(현종17, 43) 한림학사 지공거(知貢擧)로 과거시험을 주관,

           갑과 최황 등 2, 병과2, 동진사과 7, 명경과 1명을 선발하다.

          4월 왕명을 받아 직산 홍경사 비문을 지은 공로로 태자중윤에 오르다.

           홍경사는 소실되었으나 비갈은 현존하여 대한민국 국보 제7호로 지정되다.

 

 

1030(현종21, 47) 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에 임용되어 현종의 왕자(德宗 靖宗 文宗)들을 가르치다. 

1031(현종22, 48) 현종이 승하 후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선정을 베푼 22년의 치적을 찬양명문  공표하다. 

1033(덕종2, 50)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제수되었다가 4월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로 제수

1034(덕종3, 51)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임명되어 법률, 소송, 형옥을 관장하다. 

1035(정종1, 52) 중추형부상서(中樞刑部尙書)를 거쳐 지공거(知貢擧)로  과거시험을 주관, 

1037(정종3, 54) 참지정사(參知政事) 수국사(修國史)에 올라 현종과 덕종의 실록편찬을 감수하다. 

1040(정종6, 57)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국정운영의 중요 현안을 왕에게 건의하여 시행하다. 

1041(정종7, 58) 판서북로병마사 상서좌복야로 중용되어 북쪽변방 천리장성의 기틀을 구축하다.

          이때 왕이 문무겸전(文武兼全)장군이라 치하하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등용하다. 

1043(정종9, 60)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 문하시랑(守司徒 修國史 上柱國 門下侍郞)에 오르다. 

1047(문종1, 64)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1049(문종3, 66) 문하시중 수태보(守太保)에 임명된 후 다음해 사추충찬도공신(賜推忠贊道功臣)이 되다.

         이때 최충은 나라의 元老, 老人, 義士, 節婦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어 음식을 대접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폐인, 병자, 봉양해 줄 이가 없는 사람들을 편안히 보살펴 근심이 없도록 하는 복지정책 실현하다.

1050(문종4, 67) 도병마사 문하시중으로 서북지역의 휼민대책을 건의하고

         국경을 침범하여 구금된 여진의 추장 염한(鹽漢) 등을 석방하여 여진과의 친선외교를 도모한 공으로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 守太傅)에 오르다.

  

 

노동서원 외삼문 흥학문(魯東書院 外三門 興學門)

 

 

1053(문종7, 70) 퇴직을 청했으나

문종의 교시는

    [문하시중 최충은 누대로 내려오는 선비들의 영수이며 삼한의 덕망 높은 어른이다.

     이제 비록 은퇴하기를 청하나 내 어찌 그 청을 허락하랴!,

     주관 부서에서는 마땅히 전래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편한 의자와 지팡이를 주어 나라 일을 계속 보게 하라]

     명하여 시중(侍中)의 직무를 계속하다. 

1055(문종9, 72)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致理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上柱國)으로 퇴임(致仕)하다.

     퇴임 후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창설하고 신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선발하여 유학교육에 진력하다.

1058(문종12, 75) 국가 중요정책이나 군국대사를 자문(諮問)한 공로로 문종이 공에게 예물로 포상하며

         [그대의 뛰어난 계책을 채납하여 백성들을 문명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무궁한 국운이 흥성되었도다]

         관고(官誥)를 내리다.

 

1065(문종19, 82) 문종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

       중서령(中書令)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상주국(上柱國), 양평부원군(楊平府院君)에 봉()하고

       치사(致仕)를 선고(宣誥)하다. 이로써 다섯 임금을 섬기며 60여년간 벼슬하며 재상(宰相)으로 14,

       수상(門下侍中)으로 9년,  자문관(諮問官)으로 5년 동안,

       문덕(文德)으로 왕도 정치에 헌신진력(獻身盡力)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이루다.

 

 

海東孔子廟庭碑

해동공자묘정비

 

 

1068(문종22, 85) 음력 915일 향년 85세에 서거.

        백성들의 조문은 [만복을 누리며 문덕을 베푸시고 승천하셨다]하고

        문종의 조문은 [그대의 아버지는 봉황처럼 뛰어난 인물로 나라에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해주었도다.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만한 높은 학문을 지니고 일찍부터 대신의 지위에 올랐으며

            우수한 계책을 세워 정책을 보좌하였으니 공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시법(諡法)에 의거 시호를 문헌(文憲)으로 정하고 정종 묘정에 배향하다.

공은 유학 교육에 진력하여 유능한 인재를 연이어 배출하니 동방학교의 흥성이 시작되고,

성현의 가르침이 성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이루는데 공헌하니 사학의 시조로,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해왔다.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인데,

이것은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오산시 내삼미동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노동서원 서재 보덕재(魯東書院 西齋 普德齋 )

 

 

 

 

海東孔子칭호의 유래

 최충 선생은 고려 현종, 덕종, 정종, 문종의 왕조(王朝)에서

60여 년 간 문덕정치(文德政治)를 실현하여 백성들을 문명(文明)시키고 평화롭게 만들었으며

치사(致仕) 후에는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최충 선생이 서거하자

고려 제11대 문종(文宗1019~1083)은 조문에서 백성들이 문명(文明)하는데 초석이 되었음을 추모하며

임금을 도와 울타리처럼 든든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공자가 돌아가신 것 같이 슬프다라고 애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사람들은

사학의 시조(始祖)인 최충 선생을 중국의 공자에 비유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부르게 되었다.

해동공자라는 칭호는 공자를 추종하기만 한 것이 아닌

최충 선생의 교육이념과 실행에 있어 공자와 비견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文憲公 戒二子詩 문헌공 계이자시

최충 선생이 벼슬길에 오른 두 아들 최유선崔惟善, 최유길崔惟吉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한 훈계시

 

吾今戒二子(오금계이자)           내가 두 아들에게 훈계하노니

付與吾家珍(부여오가진)              우리 집안의 보배로 삼아라

淸儉銘諸己(청검명제기) 청렴하고 검소함을 각자 몸에 새기고

文章繡一身(문장수일신)               문장으로 몸을 장식하여라

傳家爲國寶(전가위국보)   집안에 전하여 나라에 보배가 되고

繼世作王臣(계세작왕신)         대를 이어 어진 신하가 되어라

莫學粉華子(막학분화자)             사치와 허영을 배우지 마라

花開一餉春(화개일향춘)                꽃은 봄철 한때 피느니라

 

 

家世無長物(가세무장물)     집안에 전하는 귀한 물건은 없으나

唯傳至寶藏(유전지보장오직 지극한 보배로 간직하여 전하라

文章爲錦繡(문장위금수)           문장으로 부귀(錦繡)를 누리고

德行是珪璋(덕행시규장)        덕행으로 공명(珪璋)을 이루어라

今日相分付(금일상분부)             오늘 너희들에게 분부하노니

他年莫敢忘(타년막감망)        두고두고 감히 잊지 말도록 하라

好支廊廟用(호지랑묘용) 나라에 좋은 동량으로 쓰여 공헌하면

世世益興昌(세세익흥창)        대대로 더욱 흥하고 창성하여라

 

 

 

魯東書院 內三門 文憲堂 노동서원 내삼문 문헌당

 

 

 

문하시중 문화공 최유선(文和公 崔惟善, ?1075)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중서령(中書令) 최충(崔)의 아들이다.

1030(현종 21) 과거에 급제하여 7품으로 한림원에 들어갔다.

1047(문종 1)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105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역임했다.

 

1055년 지중추원사로 공부시랑 이득로(李得路)와 조상회장사(弔喪會葬使)가 되어

           거란 흥종(興宗)의 장례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061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를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추충찬화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師上柱國)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대를 이은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사리에 밝았으며 여러 차례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수태위 중서령(守太尉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화(文和)이다.

 

 

 

 

 

 

노동서원

 

魯東書院노동서원 정전(正殿)에는 문헌공(文憲公), 문화공(文和公) 두분의 영정과 위패가 있다.

 

 

 

 

 

 

 

 

 

魯東書院長高光桓功德碑

노동서원장 고광환공덕비

 

 

廟庭碑建立趣旨文

묘정비건립취지문

어진이를 높이 모시고 옳은 일을 사모하는 것은 인간의 떳떳한 일이요

성현의 글을 읽고 천추뒤에 평론하며...

 

 

廟庭碑建立感謝記文

묘정비건립감사기문

 

 

 

 <해주최씨 문헌공 성재 최충(惺齋 崔冲) 가계>

 시조 증 태자태보 최 온(崔 溫)

  문헌공 성재 최충(文憲公 惺齋 崔 冲,984~1068) 

    장남 문하시중 문화공 최유선(文和公 崔惟善, ?~1075) 

         손자 문하시랑 판이부사 양평공 최사제(良平公 崔思齊)

              증손자 예부상서 최약(崔瀹)

                    현손 지홍주사 시전중내급사 최윤인(崔允仁)

                 5대손 우복야 최민(崔敏)

                    6대손  한림학사 중서평장사 문청공 최자(文淸公 崔滋)

            현손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 최윤의(崔允儀) 

    차남 상서령 최유길(崔惟吉)

         손자 문하시중 수태사중서령 최사추(崔思諏) 

              증손자 평장사 정순공 최관(靖順公 崔灌) 

                    현손 문하평장사 판병부사 경문공 최홍윤(景文公 崔洪胤) 

                   5대손 상서호부시랑 최순(崔淳 )

                        6대손 판비서성사 제주목사 최서(崔瑞)

              증손자  문하시랑평장사 최진(崔溱)

                     현손 최윤의(崔允義)

                    5대손 최정(崔政)

                           6대손 최점(崔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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