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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용호터 동민기념관(東民紀念館), 홍천 도깨비 집,다락방, 연규환선생 감은비,연규환(延圭桓)

홍천

by 碧巖 2019. 11. 2.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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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터 동민기념관(東民紀念館)

강원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956

 

 

 

 

 

 

경주김공덕원의사공적비

 

 

 

 

 

동민기념관(東民紀念館)

 

 

 

 

다락방 중건기

 

 

 

 

 

 

 

 

 

 

 

 

 

 

 

 

 

 

 

 

 

 

 

 

 

 

 

 

 

 

 

 

 

 

 

 

 

 

 

 

 

 

 

 

 

 연규환 선생 감은비(延圭桓 先生 感恩碑)

 

 

 

 

 연규환 선생 감은비(延圭桓 先生 感恩碑)

실로 머리 숙여 감사해야할 분이 이곳에서 세상을 살다가 가셨으니 그분이 바로 연규환 선생이시다.

선생은 중농으로서 대대로 윤택한 생계를 누리던 어른으로

일제하에 멸문지화를 무릅쓰고 독립투사를 은닉하여 항일운동을 도운 애국자이시다.

기미년 43일 물걸리 동창에서 5개 면민 3천여 군중의 항일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왜경에게 쫓기며 피신하던 김덕원 의사를 자신의 집 벽장에 은신케하고

3년간이나 의사의 활동을 알뜰히 보살펴드린 일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 아니리이까?

당시 왜경 치하의 삼엄한 학정속에서

항일 독립투사를 은닉했다가 발각되면 바로 처형당할 것을 각오해야 함은 말할것도없다.

선생은 평범한 가정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사의 고초를 감수하며

김의사의 은신을 도우신 내외분의 죽음과 삶을 초월한 충정은 어찌 김의사 개인만을 위해서 였겠는가?

이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민족을 구하려는 충정에서 온 헌신이 아니리요!

 

 

선생은 지금 저 압록강변 강계(후창)에 말없이 잠들어 계시고 무덤위엔 찹초만이 무성하리!

김의사의 후손이며 선생의 후학인 나는 지금 선생에 대한 뜨거운 추모의 정을 느끼며

선생의 사생취의한 구국정신과 행적을 살펴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여

잊혀져가는 왜구침략경계의 교훈으로 삼아 선생의 호국의지를 높이 받들어 그 크신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선생은 어찌하여 그 공포의 모험을 행하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사를 원망했다고 전하는데 선생은 무슨 사연으로 김의사를 벽장에 숨겼습니까?

무슨 사연으로 위조 돈을 만들었습니까?

무슨 사연으로 머나먼 타향인 압록강변에서 외로이 하세하셨습니까?

하지만, 선생은 말이 없고, 그 세월속에 사시던 님들은 모두 다

가셨으니 유고 한 장 찾을 길 없고 증언 조차 얻을 길 없습니다.

민족의 분열과 양분된 장벽으로 꽃 한송이, 한개비 향불조차 선생의 영전에 바칠길 없니

일제침략의 아픔에서 민족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지는 이 어인 운명인가?

 

 

! 애달프다!

하늘보다 높은 선생의 은공 무엇으로 보답 하오리까!

다만 여기 이 돌에 그 사연을 적어 선생의 숨결이 배어 있는 옛 집터 앞에 세워 그 유덕을 기릴 뿐입니다.

선생이시여

일제는 2차세계대전에서 패망 후 50년을 조용히 넘기더니 경제대국의 국력을 과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 한일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멀리는 신라 30대 문무제는 사후 동해속에 묻혀 만백성들에게 왜국의 경각심을 높였으며,

임진왜란의 잔학한 살상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지 못하게 참혹했으며,

가깝게는 을사조약과 경술강제 합방은 3천만 민족이 나라 없는 백성으로 슬픔을 안아야 했습니다.

선생 역시 고귀한 희생을 강요당하셨습니다.

선생이시여 7천만의 가슴에 민족의 슬픈 역사를 잊지 않도록 음우하소서,

분단된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이루도록 음우하소서.

그리하여 선생의 거룩한 염원을 성취하는 후손되게 하소서.

극락의 영복을 누리 시옵소서.

그리고 선생의 자손만대가 세세토록 번창하시길 기원하며 삼가 이 글을 영전에 바치나이다.

199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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