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지당(任允摯堂)
윤지당 임씨(允摯堂 任氏)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무장리 산 143-2
1721(경종 1) ~ 1793(정조 17)
윤지당 임씨 允摯堂 任氏
1721(경종 1) ~ 1793(정조 17)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 원주에서 활동한 여성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임윤지당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아버지는 함흥판관을 지낸 노은(老隱) 임적(任適: 1685∼1728)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윤부(尹扶)의 딸이다.
조선 후기의 대성리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의 누이이며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 1727∼1796)의 누님이다.
‘윤지당’은 오빠 임성주가 지어 준 당호이다.
녹문의 학설을 계승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의
성리설과 많은 시문을 담은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를 남겼다.
임윤지당은 부친 임적이 1721년(경종 1) 양성현감으로 나가던 해에 태어났다.
임적은 양성에서 5년의 임기를 마치고 41세 되던
1725년(영조 1)에 함흥판관으로 부임하자 그의 가족도 데려갔다.
1727년에 관직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와 낙향을 준비하였으나,
1728년 정월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1729년(영조 5)윤지당이 아홉 살 될때 가족과 함께 청주 근처의 옥화(玉華)라는 산골 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오빠 임성주로부터 『효경(孝經)』, 『열녀전(列女傳)』, 『소학(小學)』 및
사서(四書)와 같은 유교 경전과 중국 역사서를 배웠다.
윤지당은 여러 형제들과 함께 경서와 역사서들을 강론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칭찬을 받았다.
윤지당의 가족은 1737년(영조 13)에 조상들의 선영이 있던 여주(驪州)로 이사하였다.
그녀는 열아홉 살이 되던 1739년에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혼인하여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27세 되던 1747년(영조 23)에는 남편을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원주에서 시동생 형제들과 한 집안에서 같이 살았다.
시동생들은 윤지당을 공경하였고, 섬기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였다고 한다.
큰 시동생이었던 신광우(申光祐)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엘리트 관료였다.
윤지당은 40세가 넘어 신광우의 큰아들 신재준(申在竣, 1760∼1787)을 양자로 입양하였으나,
그도 윤지당보다 6년 앞서 28세의 나이로 죽었다.
1788년(정조 12)에는 학문의 스승이었던 둘째 오빠 임성주까지 작고하여 슬픔을 더하였다.
그녀는 1793년(정조 17) 음력 5월 14일 원주 자택에서 73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그녀의 묘는 원주시 호저면 무장리에 있다.
윤지당이 작고한 지 3년 후인 1796년(정조 20)에 그녀의 문집이 친정 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에 의해 간행되었다.
임윤지당은 어려서 오빠 임성주로부터 유교 경전과 사서 및 성리설을 배웠고,
시문에도 능하여 많은 학술 논문과 문학 작품들을 남겼다. 이들은 그녀의 사후 『윤지당유고』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본서는 상하 2편 1책의 목활자본으로 상편에는 인물 전기인 전(傳) 2편,
역사 인물 논평 11편, 학술 논문인 설(說) 6편, 발문(跋文) 2편이 수록되어 있다.
하편에는 일종의 자기 수양서라고 할 수 있는 운문체의 잠(箴) 4편, 명(銘) 3편, 찬(讚) 1편, 제문 3편
그리고 본서의 저자 서문에 해당하는 인(引) 1편과 유교 경전 해석서인 경의(經義) 2편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윤지당의 「언행록」과 「유사」 발문 2편이 실려 있다.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의 핵심은 성리설을 논한 설(說) 6편이다.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인심도심 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예악설(禮樂說)」,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 「치란재득인설(治亂在得人說)」, 「오도일관설(吾道一貫說)」 등이 그것이다.
이들 논문에는 그녀의 이기론(理氣論), 심성론(心性論),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예악론, 정치론 등이 잘 나타나고 있다.
「경의」 2편은 각기 『대학』과 『중용』에 대한 해설서인데,
중요한 장구(章句)마다 간단하게 설명을 붙이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혔다.
임윤지당
“나는 비록 부인의 몸이기는 하지만 천부적 성품에는 애당초 남녀차이가 없다.” -윤지당 유고 중-
//풍천인 임윤지당(任允摯堂)가계//
시증조부 평산신씨 신탁(申鐸)
시증조모 소현세자 증손녀 전주이씨
시조부 신사경(申思敬)
시부모 신보(申普)
임윤지당(任允摯堂)
부군 신광유(申光裕)1722~1747
시동생 신광우(申光祐) 1726~1798 대사간
//풍천임씨 임윤지당(任允摯堂)가계//
고조부 참판 임의백(任義伯) 관서관찰사
증조부 임승(任陞)
할아버지 임사원(任思元)
아버지 함흥판관 노은 임적(老隱 任適)
어머니 파평윤씨 호조정랑, 증 이조판서 윤부(尹扶)의 따님
오빠 사간원정언 임명주(任命周)
오빠 유학자 녹문 임성주(鹿門 任聖周)
오빠 임경주(任敬周)
동생 운호 임정주(雲湖 任靖周, 1727∼1796)
임윤지당(任允摯堂) 1739년 혼인
부군 신광유(申光裕) 1747년 졸
계자 신재준(申在竣) 28세 졸 , 생부 대사간 신광우(申光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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