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시 신창현 역사공원
牙山市 新昌縣 歷史公園
충남 아산시 신창읍 읍내리 357
조선시대 신창현의 관아터는 신창학성 동남쪽 500m지점(현지점 신창면 읍내리 357 부근)으로,
2015년 1월 28일 ‘신창현 역사공원’으로 새롭게 조성하고 공북정(拱北亭)을 복원하였다.
아산 김육비牙山 金堉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
잠곡(潛谷) 김육비(金堉碑)
조선 현종 때 대동법을 주장하여 시행토록 한 김육 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잠곡(潛谷) 김육(金堉,1580∼1658)은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제도개혁을 추진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선조 38년(1605)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충청도 관찰사, 도승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다.
그는 특히 각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게 하는 공물법을 폐지하고
쌀과 포로 대신하는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하였는데,
이 대동법의 실시로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국가의 재정도 나름대로 확보하게 되었다.
비는 거북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에는 서로 노려 보는 두 마리의 용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조각해 놓았다.
비에 새긴 '순치 17년명'이라는 기록이 있어, 현종 1년(1660)에 이 비를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대동법(大同法)
대동법(大同法)은 조선 중기인 16세기 광해군, 숙종 시기에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로서, 토지의 결수에 따라 1결당 12두씩을 통일하여 부과하게 되었다.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데 100여 년의 시일이 소요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들은 부담이 급증하게 되어 이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였다
김육(金堉)은 조광조와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죽음을 맞은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다.
아버지 김흥우(金興宇)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문간공 우계 성혼(文簡公 牛溪 成渾)과 문성공 율곡 이이(文成公 栗谷 李珥)에게서 수학하고,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및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등과 교류한 인물로 서인의 정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육은 다섯 살에 《천자문》을 익혔으며, 열두 살에 《소학》을 통달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란을 떠났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열세살부터 어머니와 할머니, 세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그는 전란중에도 책을 읽고 다녔으며, 가문을 일으키고 술을 입에 대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평생토록 지켰다.
1605년(선조 38) 25세에 사마 회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1년 당시 집권 세력의 영수인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출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육은 성균관 재임으로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광해군은 노하며 김육(金堉)을 비롯한 성균관 학생들을 모두 그 자리에서 쫓아냈다.
잠곡 김육(潛谷 金堉)은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과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광해군의 조정에 나갈 뜻을 접고,
1613년 가평의 잠곡 청덕동에서 10여 년간 은거했다.
이곳에서 그는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호를 잠곡(潛谷)이라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省傜便民 相國金公堉永世不忘碑 創設大同
성요편민 상국김공육영세불망비 창설대동
順治十七年庚子五月日立
순치십칠년경자오월일립
1660년 경자년 5월 세움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인조는 광해군 시절 박해받던 인물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잠곡(潛谷) 김육(金堉)도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나이가 마흔네 살이었다.
그러나 죄인 압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관직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파직된 다음 해인 1624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성이 반란군에게 점령되자 인조는 공주까지 피란을 가게 되었고, 이때 김육도 왕의 피란길을 따라갔다.
난이 평정되자 피란 시절의 공으로 그는 음성 현감에 제수되었고,
그해 9월 중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고위직 진출을 위한 자격을 얻기도 했다.
작은 고을 음성 현감시 피폐해진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특히 각종 세금 중에서 공물의 폐단이 제일 컸다.
그는 민생고의 원인과 타개책을 고민한 뒤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금과 요역 징발이 민폐의 원인이므로 이를 감해 줄 것과
이웃 충주가 관할하기 어려운 죽산과 진천의 행정구역을 음성현 소속으로 바꾸어 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온 그는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충청 감사에 제수된 그는 다시 한 번 목민관이 되었다.
충청도 현지의 사정은 전쟁을 겪고 난 터라 음성 현감 시절보다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있었다.
그런데도 각종 세금으로 인한 수탈은 한층 극심해져 견디기 힘든 형편이었다.
특히 공물의 폐단이 제일 컸다. 그는 시급히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이미 경기 일원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고 있었고,
인조 때에는 강원도에까지 확대 실시되고 있었다.
그는 대동법의 유용성이 이미 확인되었으므로 충청도에서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나아가서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는 권문세가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그러던 1651년, 마침내 조정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전라도 지역도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두번의 상소를 올린 덕분인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의 숙원이던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을 끝내 보지 못한 채 다시 조정으로 올라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동법을 찬성하는 김육 등을 ‘한당(漢黨)’이라 하고,
반대하는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등을 ‘산당(山黨)’이라 했다.
잠곡 김육(潛谷 金堉)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 (同春堂 宋浚吉)등 당대의 문재들을 거느린 서인의 영수격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는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고,
효종이 즉위하며 충청도와 전라도에 이어 함경도(1666년), 경상도(1677년), 황해도(1708년)까지 확대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대동법을 경기도에 처음 실시한 이후 전국적인 정착까지 꼬박 10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대동법의 실시로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증가되어 사회는 안정되었다.
또한 대동법은 수공업과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고,
초기 형태의 산업 자본가들이 등장하면서 이후 신분 제도의 변화와 사회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
잠곡 김육(潛谷 金堉)은 대동법 실시 외에도 후기 조선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643년과 1645년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화폐를 만들고 유통시키는 방법과 수레를 만들고 보급하는 방법,
그리고 청나라의 역법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선은 300년에 걸쳐 만들어진 《칠정산내외편》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절기가 맞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때문에 농업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확한 역법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1645년 관상감 제조로 일하던 김육은 중국의 신역법을 연구해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로 하고
중국에 사람을 보내 그 방법을 배워 오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653년, 조선의 달력인 시헌력을 만들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시헌력을 공식 책력(冊曆)으로 채택했다.
이때 만들어진 시헌력은 1896년(고종 33)에 태양력이 사용될 때까지 조선의 공식 달력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 《유원총보(類苑叢寶)》,
일종의 견문록인 《잠곡필담(潛谷筆談)》 등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책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업은 하나의 가업으로 자손에게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신창 척화비 新昌 斥和碑
충남 문화재자료 제236호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더욱 의지를 굳혀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 주요 도로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를 치른 후 같은 해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대부분의 비들이 일본 공사의 요구로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다.
이 비는 현재 남아있는 몇 안되는 척화비들 가운데 하나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拱北亭 공북정
* 拱北(공북)이라는 말은 《논어》 〈위정(爲政)〉편을 인용해
“정치는 덕으로 한다.”는 말로 북두칠성으로 비유해서,
북두칠성이 있으면 그 주위에 많은 별들이 함께 자연스럽고 질서 있게 공존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며,
이는 ‘임금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더라도
백성들이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하며 자연스럽고 질서 있게 살아가면 된다.
사가문집(四佳文集) 제1권 / 기(記) / 신창현(新昌縣)의 공북정(拱北亭)에 대한 기문
문헌공 낙한재 윤자운 (文憲公 樂閑齋 尹子雲,1416~1478)이
문충공 사가정 서거정(文忠公 四佳亭 徐居正, 1420~1488)에게 말하기를,
“신창 수령 조군유(趙君愉)가 새로 정자를 짓고
‘공북(拱北)’이라 편액을 걸고 기문을 청해 왔는데, 그대가 한마디 해 주기 바랍니다.”하였다.
내가 생각을 더듬어 보건대, 병자년(1456, 세조2) 여름에 서원(西原)에서 공성(公城)으로 가는 길에
이른바 신창이라는 곳을 들렀는데, 동년(同年)인 태수 김률(金慄)이 길에 마중을 나왔다.
마침 날이 매우 더워서 잠시 나무 그늘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중에 고을을 다스리는 책략을 물었더니,
신창태수 김률(金慄)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땅이 좁고 사람이 적으며 토지가 척박하고 생산이 적은데,
아전은 교활하고 완악하며 백성은 어리석고 분쟁이 심합니다. 나는 복잡하게 얽힌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없으니,
단지 소란스럽지 않게만 할 뿐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일은 생선을 찌듯이 해야 한다.’라고 했으니,
그대는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거의 핵심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의 후임자가 그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그대와 같은 정치를 한다면
대체 다스려지지 않을 고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갈 길이 바빠서 마침내 작별하고 떠났었다.
등공북정(登拱北亭)-구봉령(具鳳齡)
幾日離丹闕 기일리단궐 / 대궐을 떠난지 몇일인가
通宵戀主情 통소련주정 / 밤새도록 임금을 그리는 마음
秋天千里眼 추천천리안 / 가을 하늘 천리 먼 눈 앞
曉色上高亭 효색상고정 / 새벽빛에 높은 정자에 올라본다
碧岩 承炳燮功績碑
벽암 승병섭공적비
벽암 승병섭(碧岩 承炳燮)
1933년 4월생으로 신창초등학교 34회 졸업생으로
기미만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당한 아버지 승일상(承壹相)의 영향을 받아
1958년 26세의 나이로 신창면 의회의원에 당선되고
1975년 아산군 새마을 지도자 협의회장에 추대되었으며
1978년 신창농협 조합장에 당선되는 등의 경력을 거치며 마을과 지역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다
1987년 5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승병섭(承炳燮)은
1977년에 아산 지역에 대학을 유치하기 위해 추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의 활약으로
현재의 순천향대학교를 유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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