恒陽閣항양각
항양공 박원겸 신도비恒陽公 朴元謙 神道碑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한터길 4, (보룡리 327-1)
양평군 향토유적 제12호
항양공 박원겸 恒陽公 朴元謙
박원겸(朴元謙,1479~ ?) 字는 희익(希益), 號는 항양(恒陽),
본관은 무안(務安)으로 박효순(朴孝順)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단월면 보룡리에 있는 보산정(寶山亭)에서 수학하였고,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뒤
1514(중종9)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 사예(司藝)등을 역임하였다.
비문의 내용 중 초나라의 효자인 노래자(老萊子)처럼 매우 효성스러웠다는 것이 눈에 띈다
비의 건립연대는 뒷면에 『崇禎紀元後 四丁巳月 日 立』 이라 음각된 것으로 철종 8년(1857)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문경공 매산 홍직필(文敬公 梅山 洪直弼)이 글을 짓고,
형조판서 심의면(沈宜冕)이 글씨를 썼으며,
문헌공 규정 서승보(文憲公 圭庭 徐承輔)가 전(篆)하였다.
박원겸의 호를 딴 “향양각(恒陽閣)”이란 현액이 달린 비각은 맞배지붕의 겹처마로 좌․우측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관련유적으로 박원겸이 수학한 양평군 향토유적 제11호 보산정(寶山亭)이 신도비와 마주하고 있다
參判朴公神道碑
砥平縣北大岱洞掛日山下有坐酉之原即故禮曹參判朴公諱元謙攸藏也公字希益系出務安以高麗平章事諱文晤爲鼻祖
再傳至諱禎麗季秉義自靖是爲公五世祖也高祖諱天龍進士曾祖諱誠輔 贈執義祖諱仲 贈左承旨
考諱孝順參議 贈戶曹參判參判公娶驪興閔氏牧使好德女以成化己亥擧公弘治甲子中司馬甲戌闡文科選湖堂
己卯辭退累承召不進養親劬書 若將終身丙戌拜司諫五上章乞終養出補楊根郡守治化升聞戊子移安岳郡守
爲便養乞加楊根一年因顔其齋曰恒楊歷光州牧使召拜承旨按察忠淸道政平化成光州及湖南之民頌德竪碑拜
成均館大司成止禮曹參判有二配延安李氏大提學㙉女原城元氏副司直季康女俱贈貞夫人繼配有三男蔘牧使
苓進士葱護軍絓組相襲繁衍之盛神理報善豈苟然哉公夙負士望所交遊者皆並世名賢晦齋李文元公甞許公以雅度豁達
文學優長出處以時惟義所在慕齋金文靖公亦謂公以我師兩賢非苟譽人者而月朝有準斯可以知公也公居家舞老萊之衣處官載鬱林之石 固已模楷衿紳而且工於文詞著述甚富遺稿及傳家文獻盡佚於兵燹後孫文欽收輯斷爛印行于世零金
片鱗尤可珍也文欽又謀揭表玄述公行治謁文于不侫徵其所可信者詎有間於晦慕兩賢哉撰次如右俾鐫于牲石焉
資憲大夫 行司憲府大司憲 兼經筵官成均館祭酒 唐城洪直弼謹撰
자헌대부 행사헌부대사헌 겸경연관성균관좨주 당성홍직필근찬
嘉義大夫 行承政院都承旨 兼經筵參賛官春秋館修撰官 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沈宜冕謹書
가의대부 행승정원도승지 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 심의면근서
通訓大夫 行司諫院正言 徐承輔謹篆
통훈대부 행사간원정언 서승보근전
崇禎紀元後 四丁巳 月 日立
숭정기원후 4 정사년(철종8, 1857년) 월 일 세움.
참판 박원겸 신도비參判 朴元謙 神道碑
지평현 북쪽 대대동 괘일산 아래 유좌의 언덕은 고 예조참판 박공 휘 원겸(元謙)이 묻힌 곳이다. 공의 자는 희익(希益)이고, 무안에서 계출하였으니 고려시대 평장사를 지낸 휘 문오(文晤)를 시조를 삼고 있다. 2대를 내려와 휘 정(禎)은 고려말에 의를 지켜 은거하였으니 공의 5세조이다. 고조 휘 천룡(天龍)은 진사요, 증조 휘 성보(誠輔)는 집의로 추증되었고 조부 휘 중(仲)은 좌승지로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효순(孝順)은 참의를 지냈고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참판공이 여흥민씨 목사 호덕(好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479년(성종10)에 공을 낳았다. 1504년(연산군1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4년(중종9)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으며 1519년(중종14)에 사퇴하여 여러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고 글이나 읽으면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다. 1526년(중종21)에 사간을 제수하니 다섯 번이나 글을 올려 이를 사양하였고 부모를 죽을 때까지 봉양하기 위하여 양근군수로 나가니, 그 다스림의 치적이 빛나 왕의 귀에까지 이 소식이 들렸다. 1528년(중종23)에는 안악군수로 옮겨지니 부모님을 편안히 봉양할 수 있도록 양근에 1년만 더 있게 해 주기를 간청하고 그 집에는 항양이라 편액하였다. 그 후 광주목사를 지내고 승지로 제수되었다가 충청도를 안찰하니 정사는 공평하고 교화는 이루어져 광주와 호남의 백성들이 공의 덕을 기리어 비를 세웠다.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고 예조참판에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배위 연안이씨는 대제학을 지낸 이전(李㙉)의 따님이고, 계배 원성원씨는 부사직을 지낸 원계강(元季康)의 따님인데 모두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계배에서 3남을 두었으니 박삼(朴蔘)은 목사를 지냈고, 박령(朴苓)은 진사요, 박총(朴絓)은 호군을 지냈다. 벼슬이 이어지면서 자손도 번성하니, 신의 이치는 선에 보답한다는 말이 어찌 구차한 말이겠는가? 공은 일찍부터 선비들의 기대를 받고 있었고 교유한 사람들도 모두 동시대의 명현들이었으니 회재 이 문원공은 일찍이 공을 허여하기를 “단아한 풍도는 넓고 통달하며 문학은 넉넉하며 출처도 때에 맞게 하여 오직 의리에 따랐다.”라 하였고, 모재(慕齋) 김 문경공(文敬公,金安國)이 공을 이르기를 “나의 스승이다.”라 하였다. 두 현인은 구차하게 남을 추앙하는 분들이 아니고 평가의 기준이 있었으니 이로써 공을 알 수 있겠다.
공은 집에 있어서는 노래자가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춘 것처럼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였고, 관직에 나가서는 울림석을 실은 것처럼 진중하고 청렴결백하였으니 참으로 사대부의 모범이었다. 또한 문장에도 힘써 저술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유고와 대대로 집에 전해 내려오던 문헌들을 병화에 다 잃어버려, 후손 박문흠(朴文欽)이 흩어진 단편만을 수집하여 발간하였으니 영금과 편린은 더욱 보배로운 것이다. 문흠(文欽)이 또 묘비를 세워 공의 행실과 치적을 새기려 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는데 사실만을 기록하매 어찌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양 현인(賢人)과 간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쓰노라.
시조 고려 평장사 박문오朴文晤
4대조 박윤구朴允球 무안박씨 지평공파조(務安朴氏 砥平公派祖) 정헌대부 호부상서
5대조 박정朴禎 간의대부 송림거사(諫議大夫 松林居士)
고조부 박천룡朴天龍 진사
증조부 박성보朴誠輔 집의
조부 박중朴仲 좌승지
부친 박효순朴孝順 참의 증 호조참판
모친 여흥민씨 목사 민호덕(閔好德)의 딸
예조참판 항양공 박원겸
배위 증정부인 연안이씨 대제학 이전(李㙉)의 딸
계배 증 정부인 원성원씨 부사직 원계강(原季康)의 딸
장남 박삼朴蔘 목사
차남 박령朴苓 진사
삼남 박총朴葱 호군
==========================================================================
간의대부 송림거사 박정 유허비
高麗國諫議大夫고려국간의대부
新羅開國始祖王 赫居世王孫 高麗國中書門下省諫議大夫 松林居士務安朴公諱精遺墟碑
신라개국시조왕 혁거세왕손 고려국중서문하성간의대부 송림거사무안박공휘정유허비
박정(朴禎)
1325-1425 號는 송림거사(松林居士), 고려 공양왕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있으면서 왕에게 직간을 여러 차례 하다가 좌천으로 자인현의 감무가 되었다가 1390년을 전후하여 국사가 어지럽자 관직을 버리고 파평北面의 산속에서 은거함. 스스로 號를 송림(松林)이라 하였는데 이는 松京(개성)을 사모하는데서 연유한 것이라 하며, 이후 낙향하여 시회장(詩會場)을 건립한 것이 보산정의 건립 기원이라 함. 조선조 이태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두문불출했다함.
송림거사 박정朴禎의 20대손 항양공 박원겸 恒陽公 朴元謙의 15대손
朴哲在先生追慕碑
박철재선생추모비
용문고등학교 이사장
박철재 朴哲在
원자력법 제정과 원자력원 창설을 주도하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한국에서 원자력 연구를 가능하게 한 학자이자 행정가로,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로 불린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의 별세로 공부를 계속할 수 없자 경상남도 산청에서 교편을 잡고 학비를 마련한 후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하여 1930년 졸업하였다. 1933년 연희전문학교 의탁생으로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이학부 생리학과에서 수학하면서
10년여 동안 X선회절법을 이용한 고무의 결정화 연구를 하여 1942년 한국인 최초로 이학박사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경성대학을 서울대학교로 개편하는 데 주력하였고, 개편 후 물리학과 주임교수로 일했다.
1948년 문교부 기술교육국 부국장으로 부임하였고,
1952년 한국전쟁 시기의 부산 피난시절에 기술교육 국장에 임명되어 실업교육 진흥책을 수립하였다.
1955년 미국 오크리지 원자력연구소에서 방사성동위원소에 관한 기술훈련을 받고, 그 해 제네바에서 열린 원자력평화이용국제회의에 참석한 후 원자력의 중요성을 정부에 알려 원자력 연구개발을 전담할 행정관서의 창설을 주장했으며, 원자력법의 제정과 원자력원 창설에 기여했다.
1958년 한국에 설치할 연구용 원자로 구매를 위해 3개월간 미국 원자력위원회와 교섭했으며 한미쌍무협정에 따라 원조도 받아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59년 3월 국내 최초의 연구소인 '원자력 연구소'를 건립하였고, 박철재는 초대연구소장에 취임했다.
1964년 인하대학교 학장 재직시 부설연구소를 특설하여 원자력의 핵연료가 되는 토륨의 분리추출연구를 주도하였다.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고, 1952년부터 10년간 부회장직을 맡았던 한국물리학회 명예회원을 지냈다.
1963년 문화훈장 국민장, 1967년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고, 사후에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 다음백과에서 --
송림거사 박정朴禎의 20대손 항양공 박원겸 恒陽公 朴元謙의 15대손
素庵朴丁在功德碑
소암박정재공덕비
전 양평 용문고등학교 이사장
雪松朴鎔得頌德碑
설송박용득송덕비
양평-동고 이유록(東皐 李綏祿),양평군 향토유적 제1호 (0) | 2020.05.22 |
---|---|
양평-충장공 유장 양헌수 忠莊公 儒狀 梁憲洙 (0) | 2020.05.21 |
양평-보산정寶山亭, 양평군 향토유적 제11호 (0) | 2020.05.20 |
양평-항일의병장 산남 김백선장군 山南 金伯善, 金栢先 (0) | 2020.05.19 |
양평-의병장 괴은 이춘영 義兵將 槐隱 李春永 (0) | 2020.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