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오씨 의병장 오인수(吳寅秀) 삼대독립항쟁기적비
義兵將海州吳公寅秀 三代獨立抗爭紀蹟碑
의병장해주오공인수 삼대독립항쟁기적비
의병장 오인수(吳寅秀, 1868戊辰2~1935乙亥10)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명은 오경수(吳敬秀)이다. 일명 오성수(吳盛秀), 字 경수(敬壽)
오인수(吳寅秀)는 18세부터 포수들이 모여 솜씨를 자랑하는 화포계(火砲契)에 참여하여
늘 1등을 차지하는 등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고종42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안성(安城)과 죽산(竹山), 양지(陽智) 등에서 일본 헌병대,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경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의병장 정철화(鄭哲和)와 합세하여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경기도 안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안성군 매봉재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대대와 일주야(一晝夜)로 대규모 격전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후퇴하게 되었다.
1907년 의진에서 이탈한 오인수는 산야를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왔으나,
일진회 회장으로 일제강점기에 백작 작위를 받은 제암 송병준(濟庵 宋秉畯)의 아들 송종헌(宋鍾憲)이 이끌고 온
일제의 토벌대가 그의 집을 에워싸고 달려들어 중과부족으로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8년 복역한 후 오인수는 출옥하였다.
이후 아들 오광선(吳光鮮)과 함께 만주(滿洲)로 망명,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68세에 졸 하였다.
오광선(吳光鮮, 1886丙戌5~1967丁未5)
용인의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의 아들이며 초명은 오철묵(吳徹默) 본명은 오성묵(吳性黙)이다. 號는 광선(光鮮),
아버지 오인수(吳寅秀)가 옥고를 치루는 동안 원삼면 죽능리 출신의 시당 여준(時堂 呂準) 선생이 설립한
삼악(三岳)소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가 청년학원에 입학하였다.
1917년 21세의 나이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면서 이름을 광선(光鮮)으로 바꿨다.
‘조선을 광복시키겠다’는 뜻이라 한다.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1918년 12월 졸업하여 동흥(東興)학교 군사교관으로 재직하였다.
이후 선배인 백산 지청천(白山 池靑天), 일명 이청천(李靑天)이 교육훈련대장에 취임하자,
항시 예하 단위부대장 또는 고급 참모로 행동을 함께 했다.
그의 부인 정현숙 여사(본명 정정산鄭正山)도
1919년경 부군을 따라 만주 유하현으로 망명하여 독립군 뒷바라지를 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광선은 이후 서로군정서의 별동대장과 경비대장을 역임했으며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의 대한독립군단에도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오광선은 러시아 흑해사변 이후 만주로 돌아와 중국 국민당 군과 연합하여 항전하였다.
이중 1933년 7월초 대전자(大甸子)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궤멸시켰다.
오광선은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광복군 중추 장교 양성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중국 관내인 산해관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 주석의 지시에 따라 공작원의 양성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36년 일본 관동군 참모장을 암살하라는 특명에 따라 잠행하다가 북경에서 1937년 1월 붙잡혀 신의주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가명으로 버티어 3년형의 옥고를 치른 후 1941년 11월 출옥하였다.
그 후 재차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광복 후에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관을 맡았으며 육군대령으로 임관되었다가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1967년 5월 졸 하였다.
오희영 여사(吳姬英, 1924甲子~1969己酉)
오광선의 장녀인 오희영(吳姬英)여사는
1939년 2월 창립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적의 기밀을 탐지하고 청년들을 초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으로 개편되자, 광복군 제3지대 징모 6분처 소속간부로 활약하면서
부군 신송식(申松植)과 함께 서안(西安)에서 활동했다.
1963년 정부는 신송식(申松植) 지사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부인 오희영 여사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합장하였다.
오희옥 여사(吳姬玉, 1926丙寅 ~ )
오광선의 차녀인 오희옥(吳姬玉) 여사는
1939년 유주(幽州)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정보수집과 일본군에 입대한 한국인의 초모활동에 종사하였다.
1941년 광복군 제 5지대에 편입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삼대 독립의병장 오인수(吳寅秀) 가계//
8대조 오세공(吳世恭) 호조참판
7대조 추은 오윤충(楸隱 吳允忠), 처사 증 통훈대부 장악원정
6대조 오달존(吳達尊), 선전관 증 형조참의
5대조 오도철(吳道徹) 증 공조참판
고조부 오수장(吳遂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증조부 오명록(吳命祿)
할아버지 오언철(吳彦喆)
아버지 오태한(吳泰漢)
형님 오흥수(吳興秀)
형님 오입수(吳立秀), 일명 오일수(吳一秀)
의병장 오인수(吳寅秀, 1868~1935), 일명 오성수(吳盛秀), 字 경수(敬壽)
장남 오광선(吳光鮮, 1896~1967), 초명 오철묵(吳徹默), 본명 오성묵(吳性黙)
손녀 오희영(吳姬英, 1924~1969) 독립운동 애국지사
부군 신송식(申松植, 1914~1973) 평산인, 독립운동 애국지사
손녀 오희옥(吳姬玉, 1926~ ) 독립운동 애국지사
부군 김창덕(金昌德) 청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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