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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정제(鄭濟), 정유(鄭濰), 정석빈(鄭碩賓), 정시광(鄭始光)-영일정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8. 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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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좌통예 행 효릉참봉 정제(鄭濟)

 

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  行孝陵參奉鄭公濟之墓

증통훈대부통예원좌통예  행효릉참봉정공제지묘

 

 

 

 

증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정유(鄭濰)

贈嘉善大夫戶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迎日鄭公諱濰之墓 贈貞夫人咸悅南宮氏祔左 贈貞夫人仁川蔡氏祔右

증가선대부호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 영일정공휘유지묘 증정부인함열남궁씨부좌 증정부인인천채씨부우

 

 

 

 

 

 

 

제주목사 정석빈(鄭碩賓),  배위 정부인 여흥민씨(貞夫人 餘興閔氏)

 

有明朝鮮國嘉善大夫 濟州牧使 鄭公墓碣銘

유명조선국가선대부 제주목사 정공묘갈명

 

제주목사 정석빈(鄭碩賓)

조선조의 무신. 숙종 때의 제주목사.

1717년(숙종43) 9월 전라수군절도사(全羅水軍節度使)를 마치고 

제주목사 홍중주(洪重周)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도임하여 17196월 현직에 재임 중 사망하였다.

이에 도민들은 슬퍼하여 방아찧는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특히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고 백성의 부역을 덜어준데 대하여 칭송이 자자했었다.

함께 재임한 제주판관은 정간(鄭揀)과 민치룡(閔致龍)이며

정의현감은 송내백(宋來栢), 대정현감은 김세화(金世華)이다.

정석빈이 목사 재임 중 세병헌(洗兵軒) 안에 전고(箭庫)를 건립하고 또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을 다시 복원하였다.

원래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이 단을 철폐시켰는데 도민들의 소원을 들어 이를 복원한 것이다.

1717년 신과원(新果園) 남쪽에 군기좌월청(軍器坐越廳)을 창건하였다.

이는 곧 세병헌이니 신찬(申纘)이 지은 세병헌기()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세병헌의 옛터는 현 관덕정 동북쪽 제주경찰서가 있었던 자리이다.

그리고 1718(숙종44)에 수산방호소(水山防護所)의 만호라는 직책을 조방장(助防將)으로 격하시켜 배치하였다.

이는 본래대로 환원한 것인데 당시 수산진에는 조방장 1, 치총(雉摠) 1, 성정군(城丁軍) 170,

서기 7, 방포수(放砲手) 1, 궁인(弓人) 3, 시인(矢人) 7, 그리고 사후선 1척이 배치되고 있었다.

1719년 사직단을 주성 남문밖 삼성혈 서쪽으로 옮겨 세우고 단직(壇直 : 담당자) 1명을 배치하였다.

 

 

 

호조참판 정시광(鄭始光)

 

//효릉참봉 증좌통례 정제(鄭濟) 가계//

    5대조 판결사공 정자원(鄭自源)

   고조부 첨정공 정함(鄭涵)

   증조부 장사랑공 정귀년(鄭龜年)

할아버지 통덕랑공 정선(鄭瑄)

   아버지 삭녕군수 정언규(鄭彦珪)

            효릉참봉 증좌통례 정제(鄭濟)

 

                 증 호조참판 정유(鄭濰)

                         제주목사 정석빈(鄭碩賓), 정부인 여흥민씨

                                호조참판 정시광(鄭始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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