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
경기도 기념물 제98호
경기도 광주시 신현동 산120-1
상촌김선생신도비
高麗忠淸道都觀察使 桑村金先生神道碑銘幷序
고려충청도도관찰사 상촌김선생신도비명병서
十代外孫 嘉義大夫吏曹參判 兼 守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 蔡裕後 撰
십대외손 가의대부이조참판 겸 수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동지경연춘추관사세자좌부빈객 채유후 찬
後學崇祿大夫前判敦寧院事尹用求 書
후학숭록대부전판돈녕원사윤용구 서
十七代孫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義禁府事 文濟 篆
십칠대손가선대부예조참판겸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의금부사 문제 전
상촌 김자수 와비 (桑村 金自粹 臥碑)
묘비는 김자수(金自粹)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600여년이 흐른 1926년경에 땅에 묻혀있던 신도비를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새로 채유후(蔡裕後 조선 중기의 문신, 대사헌)가 내용을 지어 건립하였다.
옛 신도비는 누워 있기에 ‘와비(臥碑)’로 불린다.
이 와비(臥碑)는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가 스스로 자진하기 전에 아들 김근(金根)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비석을 세우지 말라.” 고 해서 상촌(桑村)의 묘소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후손들의 새로운 해석으로
"세우지 말라고 했으니 눕혀 놓으면 된다."는데 의견을 모아서
8대손으로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문정공 학주 김홍욱(文貞公 鶴洲 金弘郁:1602~1654)의 주관으로
신도비를 만들어 세우지 않고 눞혀 놓았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김자수 선생의 순절비(殉節碑)가 다시 세워져 있다.
김홍욱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때 소현세자 姜嬪(강빈)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는
應旨上訴(응지상소, 임금의 요청에 응해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격노한 효종의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학주 김홍욱(鶴洲 金弘郁)은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대찼다.
학주 김홍욱(鶴洲 金弘郁)의 자손 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으며, 7대손으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있다.
상촌 순절비와 시비
高麗忠臣桑村金先生自粹殉節碑
고려충신상촌김선생자수순절비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
경기도 기념물 제98호
본관은 경주. 字는 순중(純仲), 號는 상촌(桑村).
검교태자태사 김인관(金仁琯)의 8세손으로, 조부는 삼사부사 김영백(金英伯),
아버지는 통례문부사 김오(金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낭장 권수(權隨)의 딸이다.
아들은 평양소윤 김근(金根)이고, 사위는 중랑장 권후(權厚)이다.
공평공 퇴재 김영유(恭平公 退齊 金永濡)가 손자이며,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이 4대손이다.
문정공 불훤재 신현(不諼齋 申賢)의 문인으로, 생원시에서 장원하였고
1374년(공민왕23)에 친시 문과에서 또 장원하여 덕령부주부에 임명되었다.
편모를 주야로 섬기고 봉양하다가 돌아가자 3년간 시묘를 살며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고 입에 밥을 넣은 일이 없었다 한다.
우왕(禑王) 초 (재위:1374~1388)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는 전날 김해와 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교서 작성을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 때에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져 각지에서 위문객이 끊이지 않았으며,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참지문하부사 남을진(南乙珍) 등 명재상이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그 후 시묘하던 곳을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양왕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1년 후에 고신(告身)을 받고 다시 몇 년 후에 전교부령이 되었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충청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사헌부대사헌에 명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후에 다시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이 형조판서를 제수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김자수의 후손이 음성에 터를 잡아 살았고 지천서원에 제1위로 배향하면서 음성에 경주김씨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가 시묘할 때 남을진(南乙珍)이 시를 짓기를,
“여묘를 사는 그대를 와서 보니 / 거적자리 앞에 제례가 분명하구려 /
죽순이 난 것은 정성된 뜻이 간절함이요 / 잣나무가 말라 죽는 것은 효심을 기울인 까닭이구려” 하였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목은 이색(牧隱 李穡),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등과 친히 교우하였다.
충청도관찰사를 지낼 때 고려가 장차 망할 걸 알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시와 술로 회포를 달랬다.
태종이 형조판서를 제수하자 탄식하며,
“남의 신하가 되어 국가가 망하면 같이 망하는 것이 도리이니
내 평생에 충효로써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왔는데
이제 만일 몸을 망치면 무슨 면목으로 임금과 아비를 지하에서 뵙겠느냐?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하고는
사당에 절한 후 영정을 고하고, 아들 김근(金根)에게 흉구(凶具: 장례용품)를 가지고 뒤따르라 명하였다.
당일로 길을 떠나 광주(廣州) 추령(秋嶺)에 이르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죽어서 오직 신하된 절개를 다할 뿐이니
내가 여기서 죽거든 여기에 매장하고 묘도(墓道)의 문자를 만들지 말라”하고는 약을 먹고 자진하였다.
이에 자손이 유언을 지켜 추령에 안장하고 감히 표석을 세우지 못하였다.
김자수가 광주 추령에 이르러 자결한 것은 이곳이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의대(衣帶)를 소장한 곳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촌 황희(厖村 黃喜)가 상촌(桑村)의 자진 소식을 듣고 만사(輓詞)를 지어 조문하기를,
有忠有孝難(유충유효난)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유효유충난)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이자기운득) 이 두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황우살신난) 하물려 살신의 어려움까지 겸했구려”라 하였다.
정순왕후 지문(誌文)에
“고려 말에 휘를 자수(自粹), 호를 상촌(桑村)이라 하는 분이 있어 효행이 있었고,
우리 태종대왕이 관직을 주어 불렀으나 스스로 고려 신하를 자처하고 자결로써 절개를 세웠다”하여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았음을 전하는데, 실록에는 벼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려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충북 영동에 은거하였으며,
상촌이 살던집은 영동 상촌 김자수 고가 선지당(永同 桑村 金自粹 古家 先志堂)으로 시도 기념물 제41호이다.
자손에게 결코 묘갈(墓碣)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진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김자수의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상촌묘역후경 前公 後配
며느님 증 정부인 우봉이씨묘역 후면에서 바라본 상촌묘역후경
경주김씨 태사공파(太師公派)
8대조 1세 김인관(金仁琯),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
7대조 2세 김칙려(金則麗),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
6대조 3세 김필균(金匹鈞), 주부(注簿)
5대조 4세 김정송(金貞松), 판관(判官)
고조부 5세 김종성(金宗誠), 예빈승(禮賓丞)
증조부 6세 김예(金裔), 합문지후
조부 김영백(金英伯), 삼사부사(三司副使) 3男 ①김오(金珸) ②김대(金玳)(양주목사공파) ③김인(金戭)
아버지 김오(金珸),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지제고 2男 김정(金汀)(전서공파) ②김자수(金自粹)-상촌공파
경주김씨 태사공파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 형조판서
배위 정부인 안동권씨, 낭장 권수(權隨)의 따님
자 평양소윤 김근(平壤少尹 金根)
배위 증 정부인 우봉이씨, 병조참판 이순(李淳)의 따님
손자 김영년(金永年) 강릉판관
손자 김영원(金永源) 병조좌랑
손자 김영전(金永湔) 사승공
손자 공평공 퇴재 김영유(恭平公 退齊 金永濡)
배위 정부인 청주한씨, 이조판서 한서용(韓瑞龍)의 따님
증손자 김훈(金薰), 충주목사 증 이조판서
배위 증 정부인 진천송씨, 군수 송학(宋翯)의 따님
현손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 이조참판, 증 이조판서
배위 정부인 고성이씨, 부사 이탁(李鐸)의 따님
증손자 김훤(金萱), 수사
현손 각회옹 김홍필(覺悔翁 金洪弼), 생부 김평(金萍),
증손자 김명(金蓂), 판관
현손 김종필(金宗弼), 좌랑
현손 김우필(金禹弼), 참봉
증손자 김저(金著), 현감
현손 김상필(金像弼), 참봉
증손자 김평(金萍), 참봉
현손 각회옹 김홍필(覺悔翁 金洪弼)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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