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의 사남 충정공 만휴암 김약로(忠正公 晩休庵 金若魯) / 오남 익헌공 하계 김상로(翼獻公 霞溪 金尙魯)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 9-3
대제학 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의 사남 충정공 만휴암 김약로(忠正公 晩休庵 金若魯) 좌의정
대제학 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의 오남 익헌공 하계 김상로(翼獻公 霞溪 金尙魯) 영의정
朝鮮議政府左議政 贈諡忠正晩休金公若魯墓 贈貞敬夫人延安李氏祔左
조선의정부좌의정 증시충정만휴김공약로묘 증정경부인연안이씨부좌
충정공 만휴암 김약로(忠正公 晩休菴 金若魯)
1694년(숙종20) ~1753년(영조29)
본관은 청풍(淸風), 字는 이민(而民) 號는 만휴암(晩休菴), 시호는 충정(忠正),
대제학 문경공 검재 김유(金楺)의 아들로 어머니는 여산송씨로 군수 송박(宋摶)의 따님이다.
1726년에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3)에 증광문과 병과 급제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1729년『숙종실록(肅宗實錄)』 보완의 잘못을 논하다가 유배당하였으나 1930년에 석방되었다
1731년에 병조좌랑에 승진하여 정언, 지평을 거쳐 헌납, 이조좌랑으로 전직되어,
1735년에 응교(應敎)·군자감정·호조, 예조참의와 승지 대사간 대사성을
1740년에는 병조참지 송도유수(松都留守)에 발탁되어 공조,예조의 참판과 동지경연 동지의금 동지중추를 역임하고,
1742년에 판윤(判尹)에 제수되고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744년에 호조판서, 병조판서
1745년에 판의금부사, 좌참찬, 공조,형조,예조판서등을 역임하고,
1747년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의로써 굳이 사양하므로 여주목사로 다시 공조,호조판서가 되고,
1749년 경기감사로 나아갔다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러 세자부와 호위대장을 겸하였다.
1752년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가 되었는데, 왕세손이 죽자 파직당하였으나 판중추부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한때 형 김취로(金取魯), 아우 김상로(金相魯)와 함께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영위하였다. 諡號는 충정(忠正)이다.
익헌공 하계 김상로(翼獻公 霞溪 金尙魯) 영의정 (1702~1766)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당색으로는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字는 경일(景一). 號 하계(霞溪), 만하(晩霞). 諡號는 익헌(翼獻). 본관은 청풍이다
1702년 한성부에서 김유(金楺)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조정랑 김극형(金克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 김징(金澄)이고, 아버지 김유는 대제학을 지냈다. 어머니는 군수 송박(宋搏)의 따님이다.
숙부는 우의정 김구이고,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는 그의 형님이다.
1721년(경종1) 진사시에 합격, 1734년(영조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곧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바로 한림(翰林) 출신이라 하여 6품직에 승진하였다.
응교를 거쳐 1736년 사간원정언, 교리를 역임하였으며,
그 후 사간원과 사헌부의 여러 벼슬을 지내고 암행어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1739년 경기도 양정어사(良丁御史)를 다녀와 부교리가 되고 이어 사간원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고,
1740년 도청부사과(都廳副司果)가 되었다가 당상관으로 승진, 사간원대사간·승정원승지 등을 지냈다.
1742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상소하였고, 선정을 베풀고 돌아왔다.
1743년 성균관대사성, 부제학을 지내고 1744년 승지가 되었다.
1744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도내의 사태(沙汰)로 인하여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구휼할 것을 상소하여 허락받고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745년 한성부우윤, 사헌부대사헌, 승정원도승지, 병조판서 등을 거쳐
1746년 예조참판, 예조판서가 되었다. 48년 공조, 병조, 호조, 이조판서 등을 거쳐
1749년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탕평책 실시에 찬성했으며,
1750년 대사간 척당 이존중(惕齋 李存中)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1750년에 지경연 세자우빈객이 되었으나 사도세자와 의견이 달라서 마찰을 빚었다.
1751년 개성유수 담정 남태제(澹亭 南泰齊)가 재주와 견식이 있고 마음가짐이 공평한 것을 알고 승격시킬 것을 천거하였다
1752년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1753년 파직되었다. 이후 곧 풀려나
1754년 좌의정을 거쳐 175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말과 행동이 맞지 않은 사헌부 관리들은 교체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탕평책이 나왔을때 최초에는 찬성하였으나,
담와 홍계희(澹窩 洪啓禧),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 김귀주(金龜柱)와,
영조의 후궁으로 숙의 문씨(淑儀文氏)에 오른 문녀(文女)의 오빠 문성국(文聖國),
풍산인 홍인한(洪麟漢)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공격하였고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였다.
1759년 5월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그러나 8월에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개월만인
1759년 9월 사도세자의 장인 익익재 홍봉한((翼翼齋 洪鳳漢)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조의 사도세자 처벌 논의에 가담했다.
이후 1762년 담와 홍계희(澹窩 洪啓禧), 홍인한(洪麟漢) 등과 함께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으나, 후에 왕이 이를 후회하자 세자를 보호하는 사부이자 정승으로서 역할을 게을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청주에 부처되었다가 곧 특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여 세자를 죽이게 했다 하여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의 네 아들과 형제의 아들들도 모두 파직 후 유배당했다. 그 후 조선 고종 때 신원, 복권되었다.
영조는 손자 정조에게 남긴 금등에서
'너의 아비를 죽이게 한 것은 아무래도 김상로(金尙魯)다. 그자야 말로 바로 너의 원수다'라고 지목했다.
1777년 정조 즉위 후 정수재 이병모(靜修齋 李秉模) 등으로부터 탄핵당하였고,
이후 탄핵상소가 빗발치자 김상로는 삭탈관직 되고 그의 아들 네 명과 조카들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며 금고령에 처해졌다.
후손 김동한(金東翰)의 상소로 고종 때에 복권되었다.
한편 사도세자의 처벌에 가담하지 않았고 노론 벽파(老論 僻派)에서 노론 청명당(老論 淸名黨)으로 전향한
사촌형님 청사 김재로(淸沙 金在魯)의 후손들은 정조 때에 불이익을 받지 않고 관직에 머무를 수 있었다.
하계 김상로(霞溪 金尙魯)는 사후 경기도 과천에 있었으나,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쌍봉산에 하단의 형님 김취로의 묘소 옆으로 이장하였으며
1920년 그의 7대손 김진한(金鎭漢)이 묘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웠으며,
2017년 6월 종중의 결의에 따라
의왕시 왕곡동의 아버지 대제학 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의 묘역 하단으로 새로이 조성하였다.
대제학 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의 손자 이조참의 김치양(金致讓) / 손자 김치영(金致永) /현손 순흥부사 김숙연(金肅淵)
//대제학 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 가계//
6대조 청평군 김우증(淸平君 金友曾) 증 병조판서 청풍김씨 의왕 입향조
5대조 김여광(金汝光) 대호군
고조부 김계(金繼) 생부 우후 김숭의(金崇義)
증조부 김인백(金仁伯) 증 이조판서
할아버지 김극형(金克亨) 공조정랑
아버지 감지당 김징(坎止堂 金澄) 전라도관찰사 동부승지
형님 충헌공 김구(忠憲公 金構) 우의정
조카 김희로(金希魯)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손자 고은당 김치만(高隱堂 金致萬) 세자익위사 시직(侍直
재증손 본암 김종후(本庵 金鍾厚)
재증손 문충공 몽오 김종수(文忠公 夢梧 金鍾秀)대제학 좌의정
조카 충정공 청사 김재로(忠靖公 淸沙 金在魯) 영의정
손자 김치일(金致一)
재증손 헌숙공 고정 김치인(憲肅公 古亭 金致仁) 영의정
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 대제학, 증 의정부좌찬성
배위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 호군 이명진(李鳴震)의 따님, 월산대군 이정(李婷)의 후손
배위 정경부인 여산송씨, 군수 송박(宋摶)의 따님, 참판 송시길(宋時吉)의 손녀
장남 김정로(金正魯) 정랑
배위 청주한씨, 생원 한석좌(韓碩佐)의 따님
손자 김치량(金致良), 생부 소애 김취로(疎涯 金取魯)
차남 충헌공 소애 김취로(忠獻公 疎涯 金取魯) 대사헌,병조,예조,이조,호조판서
배위 한산이씨, 공조판서 이기하(李基夏)의 따님
재배위 청주정씨, 사인 정호(鄭鎬)의 따님
삼배위 남양홍씨, 사인 홍중채(洪重埰)의 따님
손자 김치량(金致良), 생부 하계 김상로(霞溪 金尙魯)
증손자 김종건(金綜健) 생부 김치공(金致恭), 생조부 김약로(金若魯)
현손 김숙연(金肅淵) 순흥부사
삼남 김성로(金省魯) 상주목사, 양주목사, 연안부사
배위 도사 조상적(趙尙迪)의 따님
사남 충정공 만휴암 김약로(忠正公 晩休庵 金若魯) 좌의정
배위 연안이씨, 감사 이해조(李海朝)의 따님
손자 김치공(金致恭) 대사간, 김치검(金致儉)
오남 익헌공 하계 김상로(翼獻公 霞溪 金尙魯) 영의정
배위 정경부인 가림조씨(嘉林趙氏), 참판 조정만(趙正萬)의 따님
손자 김치양(金致讓) 대사성 이조참의
손자 김치량(金致良, ) 출계 중부 충헌공 김취로(忠獻公 金取魯)
손자 김치현(金致顯)문과
동생 김무(金楙)---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규식의 7대조부
조카 김흥로(金興魯)
조카 김익로(金益魯)--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규식의 6대조부
파주-여성군 민무질 묘(驪城君 閔無疾), 여흥민씨, (0) | 2021.01.02 |
---|---|
의왕-어모장군 김도(金濤),장수현감 김혼(金混),공주목사 김무(金楙) (0) | 2020.12.31 |
의왕-김정로(金正魯),충헌공 소애 김취로(忠獻公 疎涯 金取魯) (0) | 2020.12.28 |
의왕-대제학 문경공 검재 김유 묘(文敬公 儉齋 金楺), 청풍김씨 (0) | 2020.12.27 |
의왕-증 이조판서 김인백 묘(金仁伯),김극부(金克孚),청풍김씨 (0) | 2020.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