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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장천부원군 양후공 설죽 이종무 묘(長川府院君 良厚公 雪竹 李從茂), 장수이씨,장천이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21. 2. 3.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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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부원군 양후공 설죽 이종무(長川府院君 良厚公 雪竹 李從茂)

경기도기념물 제25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

 

양후공 설죽재실(良厚公 雪竹 齋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702

지난 2016년도에는 한 여름에 와서 잔디가 우거져 있었으며

진입로 또한 개인 주택 사유지를 지나야 했으나

지금은 양후공 종회에서 재실도 짓고 묘역 진입로도 새로이 개설하였다.

 

 

장천부원군 양후공 설죽 이종무(長川府院君 良厚公 雪竹 李從茂)

1360년(공민왕9)~ 1425년(세종7)

경기도기념물 제25호 

본관은 장수(長水), 일명 장천(長川)

할아버지는 군기시윤 이길상(李吉祥)이며

아버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시 팔도도통사 조전원수를 지낸 장천부원군 이을진(李乙珍)

어머니 홍천용씨로 통훈대부 용지우(龍之雨)의 따님이며, 부인은 정경부인 평양조씨로 중추원부사 조화(趙禾)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1381년(우왕7) 22세에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7년(태조6) 옹진만호로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하여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으며,

1400년(정종2) 41세에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상장군으로 회안대군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6) 47세에 좌군총제에 제수되었고 이어 우군총제를 겸했으며, 이해에 장천군(長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08년 남양, 수원 등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1409년 안주도병마사, 1411년 안주절제사를 거쳐,

1412년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었다.

1417년 좌참찬·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년(세종1) 60세에 삼군도체찰사에 임명되니

이 해에 왜선 50여 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을 했으며,

절제사 이사검(李思儉)을 해주의 연평곶에서 포위하는 등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이에 조선정부는 왜구가 본거지를 비운 틈을 타 그 뿌리를 뽑고자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게 되었다.

 

1419년(세종1) 당시 삼군도체찰사의 직위에 있던 이종무는 상왕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의 명을 받아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 7,285명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 정벌에 나섰다.

이종무는 섬에 상륙해 왜구의 크고 작은 배 129척과 가호 1,940여 호를 불태웠으며,

적 114급을 베고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 수백 명을 구출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봉서를 보내 퇴각할 것을 애걸하므로 군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돌아왔는데,

이를 기해동정(己亥東征,일본에서는 강옥전쟁)이라 하며,   제3차 대마도 정벌이라고 한다.

 

1차 대마도 정벌은 1389(창왕1) 충의군 박위장군(忠義君 朴葳將軍)이

경상도도순문사로 전함100여척을 이끌고 대마도(쓰시마 섬[對馬島]를 진격하여 적 전함 300여척을 불태우며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제2차 대마도 정벌은 1396년(태조5년)에

문하우정승 낙포 김사형(洛圃 金士衡)을 오도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 都統處置使)로 명하여,

예문춘추관 태학사 귀정 남재(龜亭 南在)로 도병마사로, 중추원부사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로,

전 도관찰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서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를 치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대마도를 정벌하고 귀환시에는 태조가 직접 흥인문까지 나아가 맞이하였다고 한다.

 

설죽 이종무(雪竹 李從茂)의 대마도 정벌로 고려말 이래 우리나라의 해안지역을 노략질하던 왜구의 활동이 거의 사라지고,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쓰시마 섬과의 평화적인 통상관계가 지속되었다.

정벌에서 돌아와 찬성사로 승진했으나,

대마도 정벌시 불충한 김훈(金訓)과 노이(盧異)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탈 관직되어 상원(祥原)에 유배되었다.

1420년 관직이 회복되고,

1421년 62세에 부원군에 봉해졌다.

1422년 사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행했던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보고하지 않아

1423년 다시 과천에 부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관직이 회복되었다.

1425년 세종7년 66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諡號는 양후(襄厚)이다.

후면에 '長子昇平立'장자승평립, 장남 승평이 세우다. 라는 글씨가 있다고 하는데 알아볼 수가 없다.

贈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 行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 三軍都體察使 長川府院君

증추충분의익대좌명공신 행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삼군도체찰사 장천부원군

對馬島征伐東征元帥 長川李公從茂 配貞敬夫人平壤趙氏之墓

대마도정벌동정원수 장천이공종무 배정경부인평양조씨지묘

// 장수이씨, 장천이씨 양후공 설죽 이종무장군(襄厚公 雪竹 李從茂將軍) 가계//

   고조부 시조 문하시중 평장사 장천부원군 문정공 일헌 이임간(文正公 一軒 李林幹)

   증조부 문하시중 이원만(李元萬)

   증조모 청주한씨, 정의대부 한석모(韓碩謀)의 따님

할아버지 문하시중 군기시윤 이길상(李吉祥)

   아버지 순충적덕보조공신 장천부원군 무정공 이을진(長川府院君 武靖公 李乙珍)

   어머니 홍천용씨, 통훈대부 용지우(龍之雨)의 따님

            양후공 설죽 이종무장군(襄厚公 雪竹 李從茂將軍)

            배위 정경부인 평양조씨, 중추원부사 조화(趙禾)의 따님

                   장남 장천군 평후공 지산 이승평(長川君 平厚公 芝山 李昇平), 세조원종공신

                      초배위 수원백씨, 판윤 백창(白蒼)의 따님

                      재배위 담양전씨, 문명공 야은 전록생(文明公 野隱 田錄生)의 따님

                   차남 이덕평(李德平)

                   삼남 중추원부사 충정공 지봉 이사평(忠定公 芝峰 李士平), 세조원종공신

                      초배위 안동권씨, 총판 권나위(權那緯)의 따님

                      재배위 진주강씨, 군수 강중선(姜中善)의 따님

                   사남 장의공 지암 이후평(壯毅公 芝庵 李後平) 분충장의공신 예문관 대제학

                    1녀 덕천군 이후생(德川君 李厚生) 정종 10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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