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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문충공 백헌 이경석 묘(文忠公 白軒 李景奭), 전주이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21. 2. 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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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문충공 백헌 이경석(文忠公 白軒 李景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0-7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경기도기념물제84

孝宗朝領議政文忠公白軒李景奭先生墓域

효종조영의정문충공백헌이경석선생묘역

 

 

문충공 백헌 이경석(文忠公 白軒 李景奭)

1595(선조28)∼1671(현종12)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字는 상보(尙輔), 號는 백헌(白軒), 쌍계(雙磎)

정종의 열째 아들인 종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손이며,

함풍수(咸豊守) 이계수(李繼壽)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충의위 이수광(李秀光)이고,

할머니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로 사과 김언정(金彦禎)의 따님으로 익원공 김사형(金士衡)7대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大護軍) 고한량(高漢良)의 따님이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인이며,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을 발탁하여 천거하였으나,

후일 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613년(광해군5) 진사가 되고 1617년(광해군9) 23세에 증광별시에 급제했으나,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1623년(광해군15)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이라는 검열·봉교로 승진하여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

1624년(인조2) 30세에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해 조정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이어 봉교(奉敎)·전적·예조좌랑·정언·교리 등을 두루 거친 뒤

1626년(인조4)에는 호당(湖堂: 독서당)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또한 같은 해 말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면(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원도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이 때에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

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629년 자청해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실적을 올렸다.

그 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14) 42세에 병자호란시 대사헌,부제학에 연달아 제수되어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1637년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 도승지에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을 겸임하며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1637년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얼마 뒤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조정 인사를 주관하였다.

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 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 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엄금하던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 조사해 답변함.)하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북 지역으로 돌아왔다.

 

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영부조용(永不調用: 영구히 등용되지 못함.)의 조건으로 귀국해,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인조22)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

1649년(인조27) 5월 55세로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과 나이가 같은 인조가 병석에 누워 졸하고 봉림대군 효종이 즉위하였다.

 

1650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 판서 및 양사(사헌부·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

이에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해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

이어 다시 영부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廣州)의 판교(板橋)와 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1653년(효종4)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효종10) 65세에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68년(현종9)에는 신하로서는 세기적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669년(현종10) 75세에 백헌(白軒) 자신이 등용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백헌(白軒)을 풍자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송시열은 고전의 수이강 부분을 언급하며 그를 조롱하였고,

그의 문하생들이 송시열의 비아냥에 분노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발탁한 사람 중의 한사람인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과 원수가 된다.

 

평생 『소학』과 『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했고, 노년에는 『근사록』과 주자가 지은 온갖 서적을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시문은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雄渾: 힘이 있고 원숙함.)해 광화현란(光華絢爛: 빛처럼 현란함.)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豔: 넉넉하면서 고움.)하다.”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 「삼전도비문」 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 중기에 해당하는

인조, 효종, 현종의 3대 50년 동안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 들어가,

사후에 특히 「삼전도비문」으로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백헌집』 등 유집 50여 권이 간행되었고,

용주 조경(龍洲 趙絅), 포저 조익(浦渚 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左相李廷龜碑文)」, 「이판이명한비(吏判李明漢碑)」,

「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有明朝鮮國領議政  文忠公白軒李先生景奭墓 貞敬夫人全州柳氏祔左

유명조선국영의정  문충공백헌이선생경석묘 정경부인전주유씨부좌

 

문충공 백헌 이경석(文忠公 白軒 李景奭) 묘역 후경과 원경(아래)

 

文忠公白軒李先生事蹟碑

문충공백헌이선생사적비

 

“白軒詩碑백헌시비”

“晴川灘夜渡청천탄야도”-白軒 李景奭(백헌 이경석)

長河月黑雨絲絲

장하월흑우사사   청천강의 밤은 칠흑 같고 비는 쉼 없이 내리는데

人語灘聲共漑時

인어탄성공개시   민심이 흉흉하니 물소리도 요란하다.

半夜直將忠信涉

반야직장충신섭   구국일념으로 야반에 이 강을 건너가네

此心誰直鬼神知

차심수직구신지   이 마음 오로지 천지신명만이 알 것이니 굽어 살펴주소서

 

                      “金剛禮讚금강예찬”

                     夢想平生在嶺東

                     몽상평생재영동    꿈에 그려온 금강산에 올라 소원을 풀었으나

                     紅塵空作白頭翁

                     홍진공작백두옹    풍진세상 헛되이 보내니 어느 덧 백발노인

                     於今始得尋眞景

                     어금시득심진경    이제야 참 경치를 찾았으니

                     還恐慈行是夢中

                     환공자행시몽중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꿈 깰까 두렵구나.

               “靑鶴洞청학동

              鳳城秋葉落紛緽

              봉성추엽낙분정    지리산 봉우리 가을잎 붉게 물들고

              方丈千峯入眼斥

              방장천봉입안척    산 정상 천봉이 누아래 보인다.

              驛騎未尋靑鶴路

              역기미심청학로    이번엔 말을 타고 왔으니 청학동 길이 미심적고

              白雲如挽舊遊人

              백운여만구유입    힌 구름이 떠나듯이 옛 친구는 없구나

 

문충공 백헌 이경석 신도비(文忠公 白軒 李景奭 神道碑)는 2개로 기구한 운명을 갖었으니...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

世子師 贈諡文忠李公 神道碑銘并序

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증시문충이공 신도비명병서

 

구 신도비는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1629~1703)이 찬하고

시와 서화에 능한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가 전액과 서를 하였다.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은 1702년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의 신도비를 절필로 남기며

백헌(白軒)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비교하며 논박하였다.

“제 멋대로 꾸미고 방자하게 속이는 문인이 있으니,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달라 제 멋대로 성내고 제멋대로 꾸짖는 것이라

불선자가 미워하는 것이니 군자가 무엇을 염려하리오.”

백헌(白軒)을 군자의 상징이 ‘봉황’에 비유하고 우암(尤庵)을 불선자의 상징인 ‘올빼미’에 비교헌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백헌의 신도비는 백헌이 77세로 졸한지

83년이 지난 1754년(영조30)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받아 신도비를 세웠으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따르는 노론에서 신도비의 글자를 갈아 땅에 엎어 버렸다고 한다.

이후 1975년 11대 종손 이훈상(李勳商)이 주선하여 새로운 신도비를 세우며,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이 찬하고,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가 전액과 글씨를 쓴 구신도비도 같이 세웠다고 한다.

 

//문충공 백헌 이경석(文忠公 白軒 李景奭) 가계//

    7대조 조선2대 정종 이방과(定宗 李芳果,1357~1419)

    6대조 덕천군 적덕공 이후생(德泉君 積德公 李厚生)

    5대조 신종군 공간공 이효백(新宗君 恭簡公 李孝伯)

   고조부 완성군 이귀정(莞城君 李貴丁)

   증조부 함풍군 이계수(咸豊君 李繼壽)

할아버지 이수광(李秀光), 충의위, 증 의정부좌찬성

   할머니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 부사과 김언정(金彦禎)의 따님, 익원공 김사형(金士衡)의 7대손

         백부 호군 이유신(李有信)

         중부 첨지중추부사 이유서(李惟恕)

      아버지 동지중추부사 우곡 이유간(愚谷 李惟侃)

      어머니 증 정경부인 개성고씨, 고한량(高漢良)의 따님

               형님 효민공 석문 이경직(孝敏公 石門 李景稷)

                         조카 효간공 서곡 이정영(孝簡公 西谷 李正英)

               형님 금구현령 이경설(李景卨)

               문충공 백헌 이경석(文忠公 白軒 李景奭) 영의정

               배위 정경부인 전주류씨, 관찰사 증 영의정 류색(柳穡)의 따님

                      장남 이철영(李哲英) 평시서 령

                            손자 이우성(李羽成) 형조정랑, 증 이조판서

                                    증손자 대제학 도운 이진망(陶雲 李眞望)         

                                            현손 대제학 관양 이광덕(冠陽 李匡德) 

                            손자 이하성(李廈成) 신천군수(信川郡守)

                                    증손자 직장 이진좌(李眞佐)

                                            증손자 진사 이진정(李眞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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