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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주부 김광춘(金光春),강릉김씨 예안파조, 주부공 김광춘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10. 28.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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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 예안파조 주부 김광춘(金光春)

경북 안동시 녹전면 녹래리 산 42

江陵金氏主簿公 諱光春墓所入口

강릉김씨주부공 휘광춘묘소입구

主簿江陵金公之墓 配宜人南陽洪氏祔

주부강릉김공지묘 배의인남양홍씨부

江陵金氏禮安派 靈顯位碑

강릉김씨예안파 영현위비

 

 

강릉김씨 예안파조 주부공 김광춘(金光春)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487-3

 

강릉김씨 예안파조 주부공 김광춘(金光春) 기적비

江陵金氏禮安派祖 主簿公諱光春之紀績碑

강릉김씨예안파조 주부공휘광춘지기적비

 

主簿金公紀蹟碑銘飜譯

주부김공기적비명번역

안동 녹전의 용각산 아래에 양사리(讓仕里)라는 마을이 있으니, 강릉김씨 예안파의 시초발상지요. 여기 팔척짜리 높은 비석은 그분들의 파조이신 주부공을 위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두고 높이 추모하는 비(碑)이니라. 이 길을 다니는 사람들은 그모습을 우러러 보는구나. 상고하여 살펴보면 공의 이름은 김광춘(金光春)이오 성은 김씨니, 신라 대보공 알지에 이어진 후손이다. 태종 무열왕 6세손 김주원(金周元)이 나라를 양보하고 물러나와 명주(溟州)에서 살았는데 신라 원성왕(元聖王)이 동해안의 5개군(양양,강릉,삼척,울진,평해)을 떼어주면서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작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강릉으로 본관을 하게 되었다. 고려 조정에 이름이 김상기(金上崎)란 분이 있었으니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이요, 문하시랑평장사였다. 이 뒤로 연달아 재상 반열에 오른 훌륭한 분들이 무려 3대(三代)에 걸쳐 6명이나 되었다. 화려한 소문이 멀리 전파되니 사람들은 진(晉)나라때 왕사(王謝)의 문벌과 같다고 비유하여 말하였다. 이씨 조선에 들어와서 김추(金錘)라는 분은 벼슬이 공조판서였으니 공과의 사이에는 6세조가 되느리라. 고조부의 이름은 김치(金錙)니 직장이었고, 증조부의 이름은 김구석(金龜石)이니 사간이고, 조부의 이름은 김유악(金由岳)이니 한성판관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김혼(金渾)이니 사재감정이요 증직으로 좌승지를 지내시었다. 어머니 파평윤씨는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정경왕후의 친정아버지, 중종의 장인) 윤여필(尹汝弼)의 딸로서 궁궐을 출입할만한 범절을 갖추시었다. 3형제를 길렀으니 공께서는 3형제 중에 막내이다. 맏형과 둘째형 두 분은 벼슬이 참판이며, 공은 주부(主簿)이었다. 인종(仁宗)대왕과는 이종 사촌으로서 서기 1545년 을사사화를 당하여 윤임(尹任, 인종의 외삼촌)과 윤원형(尹元衡, 명종의 외삼촌)이 속칭 대윤(大尹) 소윤(小尹)이라 하며 권력을 향해 우뚝서 난리를 꾸몄으며, 간신배들이 이 틈을 타 권세와 세도에 끼어들어 큰 형님은 귀양을 가게 되었고, 민심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공은 홍패(紅牌,과거시험의 합격증) 5장을 가지고 남쪽으로 떠돌며 내려왔으나 뜻하지 아니하는 화재가 발생하여 홍패는 모두 잿더미로 변한 가운데에 들어가고 말았으니 몇일 동안을 통탄하다가 이어 선성(宣城,예안)의 용각산 아래를 향해 낙남(落南)하시어 다시는 벼슬에 진출하려 하지 아니하고 영달(榮達)도 누리려 원하지 않으면서 삶을 마치시었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분이 살던 마을을 양사리(讓仕里,벼슬을 사양하는 마을이란 뜻)라고 이름지어 부른다고 하니 그분의 높으신 규범과 넓으신 운치를 이런 일만 보아도 충분히 증험(證驗)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중형인 참판공이 선조 임금의 파천(播遷)을 따라 임금을 호위하다가 용만관(龍灣館)에서 순직하였고 아내인 정부인 성씨(成氏)와 그의 아들 판서공이 절의를 굽히지 않고 동시에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이어 아들과 손자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일찍부터 국가에 맡긴 몸이 아니었던가?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나가라” 라고 명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에 반대도 아니하고 지체하지도 않으면서 아들은 실천하였고 손자도 아버지를 따라 진영으로 함께 나갔으니 가정에서 절의를 강론하며 배우지 않았더라면 능히 3대(三代)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었겠는가? 의병에 입영하니 의병장 근시재선생(近始齋先生)이 중군장(中軍將)의 직책을 맡기시었다. 적개심에 감동하여 계림(鷄林,경주) 전투에서 아침 저녁으로 승전보를 올리는데 의병대장 김선생이 진중에서 불행히 순직하고 말았으니, 중군장께서는 어수선하고 위태로운 난리판에서 시체를 거두어 싸가지고 고향으로 되돌아와 장사를 지내는 그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자분이 함께 하시고, 근시재공(近始齋公)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라 하답하는 시를 지었는데 국가에 보답하는 평생의 절의로, 당당하게 한번 장군의 철갑옷을 입었구나. 영혼은 남아서 다시 전투에 응해보려고 했을 터이니, 관곽(棺槨)을 싣고 돌아가는 나에게 심히 꾸중을 하시겠지 라고 시로서 화답하였다. 커다란 줄거리의 충절은 이미 이와 같이 드러 났으므로 그 나머지 행적은 가히 그와 대등하리라 추상(推想)하여도 옮을 것이다. 공의 출생과 사망년월일을 상세하게 알수 없으니 정말 슬퍼할 일이로다. 묘는 양사리 동쪽 래동(來洞)의 뒷산에 있으니, 곧 지금의 녹전 녹래동 산42번지의 간좌곤향(艮坐坤向)의 능선이다.

아내이신 의인 홍씨는 남양이 그의 본관이요. 묘는 부군과 함께 합폄하였다. 아들은 일봉(日捧)이 뿐이었는데 이름을 처음에는 김공태(金公兌)라 하였고 이분이 중군장이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김은석(金銀碩) 김이석(金履碩)이요 이석이는 아버지를 따라 의병으로 출전하였다. 은석의 아들은 김복영(金福永)이요 이석의 아들은 김조영(金祚永)이다. 복영의 아들에는 김의용(金義龍)이니 벼슬이 동추이었고 조영의 아들은 김의규(金義逵)니라. 나머지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의 세대가 지금까지 근500년에 가깝도록 오래 되었다. 후손들이 서로 계획하기를 “살던 마을 길거리에 기적비(紀績碑)를 세워 출입할 때마다 항상 우러러 본다면 신리(神理)와 인정에도 또한 편안한 일이 아니 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니 모두들 이의없이 즐겁게 따라주었다. 종손 김동태(金東泰)가 문중 어르신들의 명령을 받들어 김성래(金星來), 김동석(金東奭)이와 함께 세적(世蹟)과 보록(譜錄)을 싸가지고 남루한 저의 집으로 와서 그 비석에 새길 비명을 부탁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우리 강릉김씨가 예안(禮安)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주부공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후손에게 끼친 은택(恩澤)이 적다고 말할수 없으나 난리에 서로 바쁘게 살면서 오히려 유지(遺址)를 밝혀 천명(闡明)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죄송함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하루라도 늦출일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면서 차마 말을 이어하지 못하였으니, 내 어찌 비문을 지어주지 못하겠다고 하겠습니까? 또 세적 한권은 외삼촌 김공 남식(南湜) 어르신이 편집하신 책으로서 손때가 남아 있었으며, 아름다운 충심이야 말로 더욱 더 심중에 와 닿으니, 실로 끝내 거역하기 어려웠습니다. 삼가 애간 이성화공(愛磵 李聖和公)의 지명과 인암 권상규공(忍庵 權相圭公)의 비갈을 살펴보니 모두가 근세에서는 믿을만한 글이었습니다. 이 글을 근거로 문맥의 줄거리를 잡아 서술하면서 믿을만한 것은 남기고, 의심나는 것은 모두 빼버렸으니 차라리 간단하게 짓는 글이 고인의 업적에 상처를 주지 않는 글일 것입니다. 명왈(銘曰) 강릉의 김씨들은 신라 왕족 혈통일세. 고려때에는 대대로 연이어서, 평장사가 6분이나 있었고, 이씨 조선에 들어와서도 유명한 신하가 훌륭하게 드러났더라.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이질이요, 두 형님들은 시랑(侍郞,當相官)이었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으므로 기회를 틈타 멀리 날아왔으며, 예안땅에 깊숙하게 들어와서 벼슬도 싫다하고 바쁘게 살았구나.

임진년 왜놈의 난리에는 자손을 보내어 왜적을 소탕하였네 동구에 비석을 세워드리니 서광(瑞光)이 영세(永世)토록 비치리라.

해는 을유년 정월 상순에 평해 황우섭(平海 黃牛燮)이 삼가 지음

서기 2005년 2월 길일에 추진위원장 후손 김남성(金南聖), 김남정(金南正) 증

先祖興替由來記 선조흥체유래기

 

 

//강릉김씨 예안파조 주부공 김광춘(金光春)가계//

고조부 직장 김치(金錙)

증조부 사간 김구석(金龜石)

    조부 한성판관 김유악(金由岳)

아버지 사재감정 증 좌승지 김혼(金渾)

어머니 파평윤씨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따님

            주부 김광춘(金光春),

            배위 의인 남양홍씨

                    자 중군장 김일봉(金日捧), 임진왜란시 근시재 김해(近始齋 金垓)의 의병 중군장

                               손자 처사 김은석(金銀碩)

                                           증손자 처사 김복영(金福永)

                                                       현손 동지중추부사 김의용(金義龍)

                               손자 처사 김이석(金履碩)

                                           증손자 처사 김조영(金祚永)

                                                       현손 김의규(金義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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