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모부(旦暮賦), 단모부답부(旦暮賦答賦)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29-1
∎단모부답부
상락공 김방경은 1295년 8월 동안거사 이승휴로부터 단모부를 받고 4개월이 지난 1296년 2월에 답부를 보내며 동안거사 이승휴의 삶과 행적 학문에 대해 평가하며 출처(出處)에 때를 잃지 않았음을 칭송하였다 출사하여 벼슬할 때는 경상(卿相)으로 혹은 장수도 되었고 처사로 물러나서는 산림과 강호로 은둔하였음을 표현하였으며, 또한 불교의 청정, 유가의 충의, 도교의 근원을 수행하는 이승휴의 삼교합일 태도와 경지를 높이 평가하며 고사와 주역과 병서를 통달한 문장체로 운(韻)에 맞춰 답하였다 이승휴의 호는 동안거사로 불리고 있지만 또 다른 호 둔헌(遯軒)은 김방경의 답부에서 처음 알려지고 있다
김방경과 이승휴가 활동한 시기는 최씨 무신정권의 횡포, 몽고의 침입, 무신정권의 붕괴와 원나라의 간섭 등 고려가 내우 외환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김방경과 이승휴는 무신정권에 반대하고 왕권 강화에는 찬성하였으며 충렬왕의 측근 정치에는 비판적이었다.
고려의 독자적 생존을 모색했던 김방경의 정치적 입장에 이승휴의 인식도 같았다. 다만 김방경은 도원수와 재상의 역할 등 현실적인 참여속에서 모색을 해 나갔다면 이승휴는 사류의 입장으로 보다 강경하게 민족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파직당하여 몇 차례 은둔하는 일도 있었다. 김방경과 이승휴는 같은 해에 서거했지만 김방경이 12년 선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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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모부 병서(旦暮賦 竝序)
전(傳)에 이르기를 만세 이후에나 이 말 뜻을 이해하는 한 성인(聖人)이 나타나면 그것은 아침에 만났다가 저녁에 만난듯이 대단히 일찍 만난 것이라 하였으니 정성스럽다 이 말이여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개국공경조 김방경(上洛郡開國公京兆 金方慶)저하는 원조(元朝) 十一年(一二七○年)에 재상이 되고 임금이 왕위에 있던 초에 이르러 지위가 상상(上相)에 올랐으며 송도(松都)에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뜻을 펴지 못하여 날뛰던 무리가 강화도에 까마귀 떼처럼 모여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모여 있으면서 인근 주를 삼키고 바다를 점거해서 날뛰니 일이 도모하기 어려웠다. 이에 상국(上國)이 명하여 관군(官軍)을 내여 본군(本軍)과 합하여 정벌(征伐)할 때에 공이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진퇴의 법칙이 평소에 훈련한 바가 아니었으나 양국의 군사가 모두 그 마음을 얻어서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았다. 한 번 거사함에 그들을 양떼 몰아내듯이 평정하니 부녀자들이 개가를 노래하고 군대는 돌아왔다. 또 상조(上朝)의 원수 혼다(元帥 欣篤)과 더불어 같이 왜국을 칠적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전쟁을 지휘하며 해가 돋아 오르는 바다 끝까지 들어갔다 황제의 위엄을 혁혁히 빛내고 미역(尾域) 지역을 편안히 하고 무덕(武德)을 선포해서 큰 공을 아뢰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고 전후(前後)의 공을 크게 드날려서 그를 동번제로(東籓諸路)도원수로 삼아서 특별한 은총으로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동쪽 정벌이 없는 해가 없었고 어떤 싸움에도 공이 거느리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의 수전,육전(水戰,陸戰)의 기이한 계책이 고려사(高麗史)에 갖춰 실려 있다. 이해 十一月 十二日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가 공경히 꿇어 엎드려 편지를 받들어 읽고 거듭 그 사실을 밝혀서 평하여 말하였다 종신(宗臣)과 석보(碩輔)로서 중국에 조알하고 왕래한 자가 고조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자취가 서로 이어졌으되 그 도원수의 직임을 받은 자가 있었던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도다. 또한 公이란 오등제후(五等諸侯)의 으뜸 작위(爵位)이므로 외부로 나가면 열국의 으뜸이 되고 천자에게로 들어오면 천자의 다음이 되니 그 등급은 발돋움을 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시 시기를 잘 타고 갑자기 일어나서 전쟁터의 털끝만한 공도 없으면서 다만 수도를 휩쓸 정도의 권세로써 외람되게 나아가서 높은 자리를 맡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일이 잘못되고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니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공과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패왕(覇王)을 보필할 만한 영특한 재능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갔는데 험한 파도가 용솟음 쳤으나 뱃머리는 그 어지러운 것을 헤치고 나아갔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 말발굽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그래서 해외의 다른 나라에 우리나라의 무공을 드날려 조공(朝貢)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하여 천자에게 승첩을 바쳤다 사해의 군주이신 황제가 헌함에 기대어 돌아보고 물었는데 위엄스런 얼굴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재량껏 대답하는 논변을 발휘하여 또 다시 천자의 장려를 입게 되었다. 비록 소백(小伯)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은 것과 진후(晉候)가 세차례 천자를 뵈러 간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 녹야당(三達尊 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구중궁궐에서는 공신에 봉하여 대려의 잊기 어려운 맹세를 돈독히 했고 온 나라에서는 아형(阿衡)만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겠는가? 라는 감탄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그 나이가 높을수록 그 덕은 더욱 높다 하겠다. 우리 전하께서는 덕은 중윤(重輪)보다 더 뛰어나고 뜻은 오로지 나라를 감독하는데 두었다. 그래서 어진 사람을 초치하는 북을 올리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는 깃발을 세워서 힘쓰고 노력하기를 급급하게 하면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마땅히 이런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일컬어 말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성심으로 사모하게 된다는 것은 천하의 공언(公言)이니 그 누가 이 일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우리 폐하께선 사람은 오직 옛사람을 구하고 착한 것은 반드시 따른다는 마음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대신(大臣)의 공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해서 마침내 훌륭한 명을 내려서 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公)으로 삼으니 이는 후현(後賢)들의 길을 넓힌 것이다. 이것은 실로 천하의 공적인 장려이니 그 누가 이 상(賞)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公이 오늘날 公이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요행으로 公이 된 것과는 다르다. 대개 하늘은 사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덕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이미 그 상수(上壽)를 주어서 그 몸을 편케 했으되 뜻이 오히려 부족해서 또 상작(上爵)을 주어서 그 지위를 높게 해주었다. 원컨대 公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순응해서 그 분수를 편케 여겨서 영화를 누리소서. 앞에서 이른바 만세의 뒤에 한 번 성인을 만나 그 견해를 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机杖) 아래에 바친다. 그 부(賦)는 다음과 같다.
단모부(旦暮賦) - 이승휴(李承休)
단모부는 1295년 8월 김방경(金方慶)이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의 공작(公爵)을 받으면서 당시 세자로 있던 충선왕의 청에 의하여 이승휴(李承休)가 김방경을 칭송하는 글을 지은 것이다. 이승휴는 서문(序文)에서 김방경은 뛰어난 재주와 덕행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를 모두 갖추었으며, 위대한 장수, 훌륭한 재상,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나라를 안정시킨 안사공신으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이·벼슬·작위(爵位)가 모두 높아서 만세뒤에 성인을 한 번 만난 것 같다고 칭송하면서 김방경의 행적을 요약하여 서문과 아울러 부(賦)를 지었다.
저자 이승휴(李承休, 一二二四~一三00)
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李承休), 둔헌 이승휴(遯軒 李承休),가리이씨(加利李氏)
경산부 가리현(경북 성주)사람으로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둔헌(遯軒).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이다. 1252년 4월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현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혀 그 곳 두타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4년에 이장용과(李藏用)과 유경(柳璥)의 천거로 경흥부서기에 보임되었다가 내직으로 옮겨 도병마녹사가 되었다. 충렬왕 때에는 감찰어사를 거쳐 우정언이 되었으며 우사간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가 되어 뇌물을 받은 관리를 탄핵하고 가산을 적몰했다가 원한을 사 곧 동주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해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어 숭문관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했고 결국 8월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로 치사(致仕)하였으며 1300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불교에 몰입한 만년에는 그 이름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치기도 하였다. 이승휴는 삼척현의 용안당(容安堂)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한 동안거사집(東安居士集)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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