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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단모부(旦暮賦)-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李承休),둔헌 이승휴(遯軒 李承休),가리이씨(加利李氏),단모부답부(旦暮賦答賦)-상락공 김방경(上洛公 金方慶)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11. 1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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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모부(旦暮賦),         단모부답부(旦暮賦答賦)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29-1

旦暮賦 答賦
天地高下兮爲經 천지가 높고 낮음은 날줄로 삼으니
聖賢往來兮如 성현이 오고 감은 씨줄과 같도다
或行或止兮不失時 행 하거나 그치는 것에 때를 잃지 않았으니
其出其處兮各以 나가거나 물러설 때도 더불어 했도다
處則山林兮或江湖 물러서면 산림에 있거나 강호에 있었으니
出則卿相兮又將 나가서는 정승도 하고 장수도 하였도다
剝之無咎兮在六三 이 허물이 없음은 六三에 있으니
遯之好吉兮當九 이 길하고 좋음은 九四에 있도다
唐高垂衣兮莫不稱 요임금 팔짱끼고 다스려도 칭송받았으니
許由洗耳兮亦所 허유가 귀 씻음도 또한 아름다웠도다
但復姓命兮忘其聲名 백성의 명을 회복코자 자신의 명성 잊으니
不必卷舒兮由乎亂 나가고 물러섬 없이 난세를 다스렸도다
先賢後賢兮或同 선현과 후현이 혹 같기도 하니
彼時此時兮何 이 때나 저 때가 어찌 다르겠는가
今吾聖主兮德如高 지금 우리 임금의 덕은 요임금 같고
適有隱士兮姓其 때 마침 은사 있으니 성은 李氏로다
立朝廷兮朝廷 조정에 들어가면 조정에서 벼슬하고
還鄕里兮鄕 향리에 돌아가면 향리에서 지냈도다
道緖不墜兮深於老莊 도통을 떨구지 않으니 노자 장자보다 깊고
儒門復開兮比之沬 유학의 문을 다시 여니 공자와 비교 되도다
旣淸淨兮終其終 이미 청정함은 그 끝을 이루었으니
何忠義兮始乎 어찌 충의가 처음과 같지 않겠는가
餐霞服氣兮有眞功 노을먹고 기를 다스림에 진실한 공덕있었고
談經禮佛兮無他 경을 말하고 예불함에 막힘이 없도다
如我功名兮豈君心 나의 공명이 어찌 그대 마음이겠는가
如君德行兮是我 그대의 덕행같은 것이 곧 나의 뜻이로다
원정(元貞) 2 2. 1296(충렬왕22) 2 上洛公 金方慶

 

단모부답부

상락공 김방경은 12958월 동안거사 이승휴로부터 단모부를 받고 4개월이 지난 12962월에 답부를 보내며 동안거사 이승휴의 삶과 행적 학문에 대해 평가하며 출처(出處)에 때를 잃지 않았음을 칭송하였다 출사하여 벼슬할 때는 경상(卿相)으로 혹은 장수도 되었고 처사로 물러나서는 산림과 강호로 은둔하였음을 표현하였으며, 또한 불교의 청정, 유가의 충의, 도교의 근원을 수행하는 이승휴의 삼교합일 태도와 경지를 높이 평가하며 고사와 주역과 병서를 통달한 문장체로 운()에 맞춰 답하였다 이승휴의 호는 동안거사로 불리고 있지만 또 다른 호 둔헌(遯軒) 김방경의 답부에서 처음 알려지고 있다

 

김방경과 이승휴가 활동한 시기는 최씨 무신정권의 횡포, 몽고의 침입, 무신정권의 붕괴와 원나라의 간섭 등 고려가 내우 외환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김방경과 이승휴는 무신정권에 반대하고 왕권 강화에는 찬성하였으며 충렬왕의 측근 정치에는 비판적이었다 

고려의 독자적 생존을 모색했던 김방경의 정치적 입장에 이승휴의 인식도 같았다. 다만 김방경은 도원수와 재상의 역할 등 현실적인 참여속에서 모색을 해 나갔다면 이승휴는 사류의 입장으로 보다 강경하게 민족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파직당하여 몇 차례 은둔하는 일도 있었다. 김방경과 이승휴는 같은 해에 서거했지만 김방경이 12년 선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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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모부 병서(旦暮賦 竝序)

()에 이르기를 만세 이후에나 이 말 뜻을 이해하는 한 성인(聖人)이 나타나면 그것은 아침에 만났다가 저녁에 만난듯이 대단히 일찍 만난 것이라 하였으니 정성스럽다 이 말이여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개국공경조 김방경(上洛郡開國公京兆 金方慶)저하는 원조(元朝) 十一年(一二七)에 재상이 되고 임금이 왕위에 있던 초에 이르러 지위가 상상(上相)에 올랐으며 송도(松都)에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뜻을 펴지 못하여 날뛰던 무리가 강화도에 까마귀 떼처럼 모여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모여 있으면서 인근 주를 삼키고 바다를 점거해서 날뛰니 일이 도모하기 어려웠다. 이에 상국(上國)이 명하여 관군(官軍)을 내여 본군(本軍)과 합하여 정벌(征伐)할 때에 공이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진퇴의 법칙이 평소에 훈련한 바가 아니었으나 양국의 군사가 모두 그 마음을 얻어서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았다. 한 번 거사함에 그들을 양떼 몰아내듯이 평정하니 부녀자들이 개가를 노래하고 군대는 돌아왔다. 또 상조(上朝)의 원수 혼다(元帥 欣篤)과 더불어 같이 왜국을 칠적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전쟁을 지휘하며 해가 돋아 오르는 바다 끝까지 들어갔다 황제의 위엄을 혁혁히 빛내고 미역(尾域) 지역을 편안히 하고 무덕(武德)을 선포해서 큰 공을 아뢰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고 전후(前後)의 공을 크게 드날려서 그를 동번제로(東籓諸路)도원수로 삼아서 특별한 은총으로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동쪽 정벌이 없는 해가 없었고 어떤 싸움에도 공이 거느리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의 수전,육전(水戰,陸戰)의 기이한 계책이 고려사(高麗史)에 갖춰 실려 있다. 이해 十一月 十二日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가 공경히 꿇어 엎드려 편지를 받들어 읽고 거듭 그 사실을 밝혀서 평하여 말하였다 종신(宗臣)과 석보(碩輔)로서 중국에 조알하고 왕래한 자가 고조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자취가 서로 이어졌으되 그 도원수의 직임을 받은 자가 있었던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도다. 또한 이란 오등제후(五等諸侯)의 으뜸 작위(爵位)이므로 외부로 나가면 열국의 으뜸이 되고 천자에게로 들어오면 천자의 다음이 되니 그 등급은 발돋움을 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시 시기를 잘 타고 갑자기 일어나서 전쟁터의 털끝만한 공도 없으면서 다만 수도를 휩쓸 정도의 권세로써 외람되게 나아가서 높은 자리를 맡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일이 잘못되고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니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공과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패왕(覇王)을 보필할 만한 영특한 재능으로 충()과 의()와 인()과 용()과 지()와 모()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갔는데 험한 파도가 용솟음 쳤으나 뱃머리는 그 어지러운 것을 헤치고 나아갔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 말발굽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과 무()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그래서 해외의 다른 나라에 우리나라의 무공을 드날려 조공(朝貢)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하여 천자에게 승첩을 바쳤다 사해의 군주이신 황제가 헌함에 기대어 돌아보고 물었는데 위엄스런 얼굴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재량껏 대답하는 논변을 발휘하여 또 다시 천자의 장려를 입게 되었다. 비록 소백(小伯)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은 것과 진후(晉候)가 세차례 천자를 뵈러 간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 녹야당(三達尊 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구중궁궐에서는 공신에 봉하여 대려의 잊기 어려운 맹세를 돈독히 했고 온 나라에서는 아형(阿衡)만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겠는가? 라는 감탄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그 나이가 높을수록 그 덕은 더욱 높다 하겠다. 우리 전하께서는 덕은 중윤(重輪)보다 더 뛰어나고 뜻은 오로지 나라를 감독하는데 두었다. 그래서 어진 사람을 초치하는 북을 올리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는 깃발을 세워서 힘쓰고 노력하기를 급급하게 하면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마땅히 이런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일컬어 말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성심으로 사모하게 된다는 것은 천하의 공언(公言)이니 그 누가 이 일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우리 폐하께선 사람은 오직 옛사람을 구하고 착한 것은 반드시 따른다는 마음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대신(大臣)의 공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해서 마침내 훌륭한 명을 내려서 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으로 삼으니 이는 후현(後賢)들의 길을 넓힌 것이다. 이것은 실로 천하의 공적인 장려이니 그 누가 이 상()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오늘날 이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요행으로 이 된 것과는 다르다. 대개 하늘은 사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덕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이미 그 상수(上壽)를 주어서 그 몸을 편케 했으되 뜻이 오히려 부족해서 또 상작(上爵)을 주어서 그 지위를 높게 해주었다. 원컨대 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순응해서 그 분수를 편케 여겨서 영화를 누리소서. 앞에서 이른바 만세의 뒤에 한 번 성인을 만나 그 견해를 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机杖) 아래에 바친다. 그 부()는 다음과 같다.

 

旦暮賦단모부
聖君誕作兮啓風雲 성군이 태어나니 풍운이 열리고
碩輔同升兮圖經 재상과 함께 조정에 오르니 경위를 도모했네
復赤忠兮相三韓 타고난 충성심을 다하여 삼한을 도우고
首黃扉兮䌁萬 조정의 수상이 되니 만백성 편안하네
朝中朝兮奏膚功 중조中朝에 조회 가서 큰 공을 아뢰고
路東路兮都元 동로東路에 길잡이가 되어 도원수가 되었네
軍師百萬兮益辦多 군사가 백만이 되어도 더욱 힘써서 준비하고
春秋八十兮又過 춘추가 팔십에 또 네해가 지났네
神淸氣壯兮身其康強 정신은 맑고 기상이 굳세어 몸은 강건하고
年高德邵兮人焉嘆 나이 많고 덕 높으니 사람들이 감탄하네
中宸圖奮兮篤不忘 임금이 명성을 돈독히 하여 공을 잊지 않고
東宮監國兮嘉致 동궁이 나라를 다스리니 태평하고 아름다웠네
期礪後賢兮用以褒崇 후현을 격려함은 높이 쓰고자 포상함이고
開國上洛兮公而寵 상락군개국공으로 특별히 공작을 내렸네
嗣子令公兮身襲越篇 맏아들 영공은 월편을 이어 받고
季男學士兮門塡桃 막내아들 학사되니 문 앞에 인재들 모여드네
諸孫炟赫兮盈庭 빛나는 여러 손자들이 뜰에 가득하고
賓從懽譁兮塞 환호하는 손님들로 마을이 들썩이네
摩肩獻壽兮趨蹌 앞 다투어 헌수하며 종종걸음으로 맞춰가고
行路言賢兮涕 길가는 사람도 공이 어질다하며 눈물 흘리네
宋有王荊公兮讓經綸 송나라 왕형공도 공의 경륜만 못하고
唐有郭汾陽兮羞終 당나라 곽분양도 공에게 미치지 못한다네
歌騰朝野兮薦遐齡 송축 노래 조야에 드날리며 장수를 축원하고
話及漁樵兮誇盛 어부와 초부도 칭찬하며 성대한 일 자랑하네
猿鳴鶴唳兮送歡聲 원숭이 울고 학도 노래하며 환성을 보내고
柏悅松欣兮陳賀 잣나무 소나무도 기뻐하며 축하의 뜻 베푸네
1295 8 動安居士 李承休

 

단모부(旦暮賦) - 이승휴(李承休) 

단모부는 12958월 김방경(金方慶)이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의 공작(公爵)을 받으면서 당시 세자로 있던 충선왕의 청에 의하여 이승휴(李承休)가 김방경을 칭송하는 글을 지은 것이다. 이승휴는 서문(序文)에서 김방경은 뛰어난 재주와 덕행으로 충()과 의()와 인()과 용()과 지()와 모()를 모두 갖추었으며, 위대한 장수, 훌륭한 재상,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나라를 안정시킨 안사공신으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이·벼슬·작위(爵位)가 모두 높아서 만세뒤에 성인을 한 번 만난 것 같다고 칭송하면서 김방경의 행적을 요약하여 서문과 아울러 부()를 지었다.

 

저자 이승휴(李承休, 一二二四~一三00)

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李承休), 둔헌 이승휴(遯軒 李承休),가리이씨(加利李氏)

경산부 가리현(경북 성주)사람으로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둔헌(遯軒).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이다. 12524월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현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혀 그 곳 두타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4년에 이장용과(李藏用)과 유경(柳璥)의 천거로 경흥부서기에 보임되었다가 내직으로 옮겨 도병마녹사가 되었다. 충렬왕 때에는 감찰어사를 거쳐 우정언이 되었으며 우사간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가 되어 뇌물을 받은 관리를 탄핵하고 가산을 적몰했다가 원한을 사 곧 동주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해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어 숭문관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했고 결국 8월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로 치사(致仕)하였으며 130010월 세상을 떠났다. 불교에 몰입한 만년에는 그 이름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치기도 하였다. 이승휴는 삼척현의 용안당(容安堂)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한 동안거사집(東安居士集)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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