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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함경북도병마절도사 정현룡처(鄭見龍妻), 정경부인 우봉이씨 열녀지문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3. 3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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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부인 우봉이씨 지문, 정현룡처(鄭見龍妻) 정경부인 우봉이씨 지문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 223

烈女宣武一等功臣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 行正憲大夫 咸鏡北道兵馬節度使兼

열녀선무일등공신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정헌대부 함경북도병마절도사겸 

 鏡城都護府使 鄭見龍妻 貞敬夫人李氏之文 上之卽位 二年 壬戌十一月 日 重修

  경성도호부사   정현룡처   정경부인이씨지문  상지즉위  2년 임술 11월 일 중수

동래정씨 병사 정현룡(鄭見龍, 1547~1600)

정현룡은 자는 운경(雲卿),  아버지 증 좌찬성 정인수(鄭仁壽)와 장사랑 조승걸(趙承傑)의

따님 사이에서 21세(世) 사손(詞孫)으로 명종 2년(1547) 봉림리 성지동(聖智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골(氣骨)이 장대하여 비범한 기상으로 촉망을 받았다.

1577년 선조10년 31세에 알성시 무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1579년 초배 탐진안씨가 슬하에 자녀없이 세상을 떠나, 계배로 우봉이씨를 맞았으나

1580년 선조13년에 선전관을 거쳐 강계판관(江界判官)으로 북관방어 임무가 시작되어

함경도로 부임하였으며 선조18년에 통훈대부 경흥부사에 오르고

1591년 선조24년 45세에 통정대부로 경성부사겸 방어사에 올랐다.

1592년 선조 25년에는 회령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왜군이 침입하자 북관에서 정현룡(鄭見龍)은 정문부(鄭文孚)등과 연락,

회합하여 숨어있는 선비들과 관군을 모아 창의군(倡義軍)을 편성하였고

그 창의대장에 정문부(鄭文孚)를 세우고 정현룡은 중위장이 되었다.

1593년 종성부사를 역임하면서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고령첨사 유경천(柳擎天)과 함께 길주(吉州)에 머무르고 있던 왜적을 토벌하였다.

1594년에는 육진(六鎭)을 침범하는 오랑캐들을 진압하여 상을 받았다.

1595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로 재임하던 중에 중풍에 걸리자

왕이 의원을 보내어 정현룡을 돌보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1596년 정헌대부에 올랐으며, 1600년 전사하였다.

정현룡(鄭見龍)은 전사 당시 관찰사가 바로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사후(死後) 41년이 지난 1665년(현종6년) 관찰사 노봉 민정중(老峯 閔鼎重)과

북병사 외재 이단하(畏齋 李端夏)의 조사로 북관대첩의 진상이 밝혀져 선무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함경도 경성(鏡城) 어랑리에 정현룡을 모신 사당을 세우고 창렬사(彰烈祠)라 사액하였으며,

함경도 길주군에 정현룡의 전승 기록을 상세히 기록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세웠다.

 

정현룡 처 우봉이씨 정려는 정현룡(鄭見龍,1547~1600) 처 우봉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현룡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무신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예산 인물조에 의하면,

우봉이씨는 결혼 후 남편 정현룡이 함경도 강계판관으로 부임하여 20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였다.

우봉이씨는 대를 이은 자손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무변(武弁) 정현룡(鄭見龍)의 처(妻)이온데, 남편이 외직(外職)으로 나간지 십개성상 수년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나이가 50을 바라보니 아내로서 삼종지의(三從之義)를 쫓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남편이 있는 곳에 다녀와야 하겠사오니

이러한 정상을 살피시어 봉승(奉承)할 수 있게 허(許)하여 주시기를 엎드려 상소하옵니다."

우봉이씨(牛峰李氏) 정 북병사의 아내가 임금에게 감히 올린 상소의 뜻이다.

선조(宣祖)임금은 이를 가상하게 보고 특별히 윤허한다. 남편이 있는 함경도로 갔다.

그러나 정현룡이 법도에 따라 되돌아가라고 하자

하는 수 없이 돌아오면서 마천령에서 읊은 시를 남편에게 전하였다.

 

行行旦至磨天嶺

행행단지마천령  = 쉬지도 않고 가고가고 해서 당도한 것이 마천령이구나      

東海無邊鏡面平

동해무변경면평  = 끝없이 바라보이는 동해바다 그 수면은 거울과도 같은데    

千里婦人何事到

천리부인하사도  = 부인의 몸으로 이 천리 길을 그 무엇 때문에 왔단 말인가    

三從義重一身輕

삼종의중일신경  = 중한 것은 삼종지의이고 이 한 몸은 가벼워서인가 하노라   

                                                <마천령승전비(磨天嶺勝戰碑)의 재문(載文)>

 

남편이 있는 함경도를 멀다하지 않고 길을 떠나 마천령 고개에 올라서

원산(元山) 앞바다를 바라보고서 속치마에 쓴 즉흥시(卽興詩)이다.

속치마 폭에 쓴 아내의 시를 받은 정현룡은 왕의 허락을 받고 온 것을 알고 우봉이씨를 다시 불렀다고 한다.

1600년(선조33) 왜란 때 남편이 전사하고 남편의 애마가 머리[頭部]만 물고 돌아오자

우봉이씨는 선영(先塋)인 봉산면 옥전리에 장례를 치르고 일생 동안 소복하고는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정현룡이 선조 10년에 알성급제(謁聖及第)한 2년 후에 상처(喪妻)하고   

몇년 후 재취(再娶)부인으로 우봉이씨를 맞이하고,.

그리고 외직으로 강계판관(江界判官)에 배명되어 함경도로 부임한다.

우봉이씨는 시집오자마자 남편과 떨어져 있게 된다.  시가(媤家)에는 대를 이를 손(孫)이 없는 것을 심려하게 된다.

시집온 지도 어언간 20년을 바라보게 되자, 고민한 나머지 남편이 있는 곳을 아녀자가 갈 수 없는 법도이긴 하나

죽음을 결심하고 임금에게 감히 위와 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다행히 임금의 은총을 입어서 남편이 있는 함경도로 가는 도중에 마천령 고개를 넘을 때 위와 같은 시를 읊은 것이다.

아녀자로 험하고 먼 천여 리나 되는 길을 갖은 고행(苦行) 끝에 남편이 있는 곳에 당도하게된다.

그러나 남편 정현룡은 법도에따라

 "아녀자가 이곳까지 온단 말인가, 바로 되돌아가라!"

하고 호통을 치며 만나주지 않는다.  우봉이씨는 하는 수 없이 되돌아오면서

마천령 고개에 올라 원산(元山) 앞 바다를 바라보며 읊은 시를 속치마에 적어 전해달라고 한다.

속치마 폭에 쓴 아내의 시를 받아보고는 감동이 되고 임금의 윤허를 받고 온것을 알고 다시 부르게 된다.

선조 27년 북병사로 왜군(倭軍)을 토벌하고 무찌르는 공(功)을 세워

북병사로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이 해 딸을 얻는다.

선조 29년에는 오랑캐 호군(胡軍)을 토벌하는 공을 세워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우봉이씨가 바라고 바라던 아들 정언열(彦說)을 얻는다.

선조 31년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면서 또 다시 아들 정언일(彦逸)을 얻는다.

이때 정병사의 나이는 52세였다.

선조 33년(1600) 남편 북병사가 호적(胡賊) 토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戰死)하자

북병사의 애마가 남편의 두부(頭部)만을 물고 돌아온다.

우봉이씨는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얻은 남편과의 혈육인 3남매를 데리고

남편의 머리를 안고 애마와 함께 시집으로 아와서 선영(先塋)인 봉산면 옥전리(玉田里)에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일생동안 소복하고는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 동래정씨 가문의 혈육을 이어주고  우봉이씨도 남편을 따라 운명(殞命)하고 만다.

명현(名賢)의 세손(世孫)을 고행 끝에 잇게 하고 남편의 3년상을 정성껏 지낸 것은 정렬(貞烈)이요,

또한 3년상을 치르고 바로 운사(殞死)하는 것은 열녀라!  이 열행(烈行)의 정려(旌閭)를 조정에서 내리고 표(表)하였다.

 

정려현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판각되어 있다.

烈女宣武一等功臣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 行正憲大夫 咸鏡北道兵馬節度使

열녀선무일등공신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 행정헌대부 함경북도병마절도사

兼 鏡城都護府使 鄭見龍妻 貞敬夫人李氏之文 上之卽位 二年 壬戌十一月 日 重修

겸 경성도호부사 정현룡처 정경부인이씨지문 상지즉위 2년 임술11월 일 중수

그의 고택은 봉산면 봉리동의 그 한 자리에서 약 500년을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는데

고택의 건물이 충청남도에서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로 1987년에 제385호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우봉이씨(牛峰李氏)의 절행과 열행을 표하고 있는 열녀정려각(烈女旌閭閣)이 고택 앞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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