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서원(龜淵書院)의 문루 관수루(觀水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경남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100
구연서원(龜淵書院)의 문루인 관수루(觀水樓)는
1694년(숙종20) 구연서원을 짓고도 한참이 지난 1740년(영조16)에 건축됐으며,
당시 안음현감을 역임하던 문인 화가로 유명한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이 지었다고 하며,
병산서원의 만대루(屛山書院 晩對樓)와
남계서원의 풍영루(蘫溪書院 風咏樓)와 마찬가지로
누 아래는 출입문인 외삼문 역할을 하고 누 위의 마루는 주변경관을 감상하며 휴식을 하거나,
시회를 열고 강학하는 곳이다.
‘관수(觀水)’는 《맹자》〈진심장구〉상편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라는
觀水有術 必觀其瀾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에서 가져왔다.
관수유술 필관기란 유수지위물야 불영과불행
거창신씨 황산 입향조 신우맹(愼友孟)
산고수장(山高水長)-요수 신권(樂水 愼權, 1501~1573)
석곡성선생유적비(石谷成先生遺蹟碑)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1540~1594)
황천신선생유적비(黃泉愼先生遺蹟碑)-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 1688~1768)
요수 신선생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
구연서원 뜰 중앙 동쪽에는 거대한 비석 세 개가 귀부위에 우뚝하다.
맨 좌측 요수 신선생을 기리는 10척 ‘산고수장(山高水長)’비인데 1966년 초 여름에 세웠다.
원래 이 비문은 숭정 4 병인 초여름(1866)에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홍문관부제학 풍양인 충문공 혜인 조영하(惠人 趙寧夏, 1845~1884)가 지었으며
통정대부 종친부도정 홍문관부제학 완산인 우석 이재면(又石 李載冕, 1845~1912)이 전서하였으며,
이 비문을 받아놓고 후손들이 100년 후인 1966년에 수비(竪碑)하면서
서흥인 김태주(金兌柱)가 글씨를 썼다.
우석 이재면(又石 李載冕)은 왕족으로 대원군의 첫째 아들이며 고종황제의 형으로 구한말 정치가이다.
산고수장(山高水長)
산은 높고 물은 유유히 흐른다는 뜻으로,
북송 시대의 이름난 정치가이자 문학가에 교육자였으며 자가 희문(希文)인
문정공(文正공)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의 말미에 쓴 구절이다.
엄 선생은 엄광(嚴光)인데, 일명 엄자릉(嚴子陵)이라고도 부르는데
동한(東漢, 후한시대)시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6~AD57)의 절친한 친구로,
유수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를 도왔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에 은거했다.
훗날 광무제(光武帝)가 그가 보고 싶어 백방으로 찾았는데, 제나라 사람이 이렇게 보고했다.
“어떤 남자가 양 갓옷을 입고 연못에서 낚시하고 있습니다.”
광무제는 바로 엄광을 떠올리고 사신을 보내 그를 궁정으로 불러들었다.
광무제는 궁정에 도착한 그를 보고 기쁜 나머지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더불어 침소에서 잠을 잤다.
이때 엄광(嚴光)은 자신도 모르게 광무제(光武帝)의 배에 다리를 얹는 실례를 저질렀다.
이를 본 환관이 황망하여 태사(太史)에게 보고했다.
이튿날 태사가 광무제에게 지난밤 일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에 갑자기 혜성이 황제의 별자리를 침범했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짐이 엄광(嚴光)과 더불어 잤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건무(建武) 17년인 41년에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그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당시 엄광의 나이는 80세로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광무제는 매우 상심했고, 바로 조서를 내려 돈 1백만과 곡식 1천 섬을 하사했다고 한다.
엄광(嚴光)은 부춘산에 묻혔다. 후세 사람들은 부춘산을 ‘엄릉산(嚴陵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가 낚시하던 부춘강(富春江)을 ‘엄릉뢰(嚴陵瀨)’라고 부르고,
앉아 있던 돌을 ‘엄자릉조대(嚴子陵釣臺)’로 칭했다.
범중엄(范仲淹)은 절강 엄주 태수로 있을 때 엄광(嚴光)의 사당을 짓고
후손들의 조세를 면해주는 등 상당히 예우했으며,
사당기에서도 마지막에 그의 고고한 인품과 덕망 높은
“산고수장(山高水長)” 이라 하여 학문을 높은 산과 유유히 흐르는 물에 비유했다.
야천신선생유적비(夜川愼先生遺蹟碑)- 야천 신복진(夜川 愼復振,1536~1619)
신복진(愼復振)의 유적비문(遺蹟碑文)에는
선생의 자는 신지(伸之), 호는 야천(夜川)으로 황산 신씨사현(愼氏四賢)중의 한사람이며
요수 신권(樂水 愼權)의 넷째 아들로 중종 31년(1536)에 출생하였다.
청숙(淸淑)한 기품(氣稟)은 학담(鶴潭)의 물과 같았고,
빼어난 자태(姿態)는 정기(精氣)찬 금원산(金猿山)과 같았으며, 인륜(人倫)을 중시하였고,
지조(志操)가 강직하여 적극적으로 실행함을 근본(根本)삼았다.
외숙 첨모당(瞻慕堂林云)이 이르기를 양자징(梁子徵)을 비유하며 수승대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고,
동계 정온(桐溪 鄭蘊)이 제주유배지(濟州流配地)에서 선생의 부음을 듣고 만시를 짓기를
요수정 옆에 학(鶴)의 꿈이 시들었으니 樂水亭邊鶴夢凉
신선세계 어느 곳에서 홀로 방황하실까. 仙區何處獨彷徨
진심어린 효우라서 모든 사람이 칭찬했고 因心孝友人無間
덕이 충만한 연원이라서 근원이 분명했네. 浴德淵源溯不范
당당한 의논은 가볍고 탁한 이를 경책하였고 論議堂堂첨부촉
강직한 풍모는 어리석고 광망한 이를 감복시켰네. 風神侃侃服愚狂
사문의 옛 늙은이들 모두 떠나버리니 斯文古老云亡盡
긴 밤은 아득히 먼데 우리 고을을 어찌할까. 長夜漫漫奈我鄕
하였고, 도암 문정공 이재(陶庵 文正公:李縡)선생은 신선생 묘비에서
“넓은 학문과 돈독한 의지, 분수에 맞는 수신(修身)은 그의 천성이 온전함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강직한 성품에 오직 효제지의(孝悌之義) 정성이 탁월하였고,
특히 중형인 청송당과의 형제지간 우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해 11년(1619) 12월 15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4세라 화천사(花川祠)에 봉향(奉享)하였다.
선생을 기리는 유적비(遺蹟碑)가 구연서원 경내에 서있다.
구연서원사적비(龜淵書院事蹟碑)
구연서원사적비(龜淵書院事蹟碑)
구연서원 섬뜰아래 서쪽에 있다.
구연사(龜淵祠)에 향사한 요수(樂水), 석곡(石谷), 황고(黃皐) 삼현(三賢)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순조 26년(1826년)에 세웠다. 사적비내용은 삼현의 언행을 기록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순조 26(1694)년에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가 지었다. 강재 송치규는 우암 송시열의 6세손으로 순조 때 거유로 명망이 높았던 학자이다. 가선대부이조참판 풍양인 조종영(趙鍾永)이 글을 썼는데 조종영은 사마시와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순조 13(1813)년에 황해도관찰사, 여러 참판벼슬과 경기도관찰사를 하였다. 비문의 전서는 오위도총부도총관 연안인 이조원(李肇源)인데 이조원은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혼(景混), 호는 옥호(玉壺). 판서 이민보(李敏輔)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이듬해 호서암행어사로 나갔다. 순조 즉위 후 이조참의·대사간·이조참판·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는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구연서원(龜淵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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