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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김준용(金俊龍)장군 묘 및 신도비, 병마절도사 충양공 김준용(忠襄公 金俊龍)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8. 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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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절도사 충양공 김준용(忠襄公 金俊龍)

시흥시 향토유적 제13호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138-1

김준용장군 묘 및 신도비

贈兵曹參判 行北道節度使 金公神道碑銘

증병조참판 행북도절도사 김공신도비명

朝鮮國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行折衝將軍 守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兼

조선국증가선대부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행절충장군 수성함북도병마수군절도사겸

鏡城都護府使 金公神道碑銘 幷序

종성도호부사 김공신도비명 병서

原任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兼 領經筵監春秋館事 許穆撰

원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감춘추관사 허목

嘉善大夫吏曹參判兼 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 吳始復書 幷篆

가선대부이조참판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오시복서 병전

공의 이름은 준용(俊龍)이고, 자는 수부(秀夫)이다. 성은 김씨로, 신라의 후예이다.

고려 때 이부상서 거공(巨公)이 원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져

자손들이 대대로 원주에 살게 되니, 원주 김씨는 여기서 비롯하였다.

대대로 현달한 자가 많았는데, 조선왕조에 들어와 원도공 해(元度公 晐)가 있었고,

그의 5대손은 절도사 말손(末孫)이었다. 그는 절도사 박영(朴英)과 친구 사이였는데,

당시 조정에서 그를 대간으로 발탁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기묘사화때(1519)어진 이들이 실패하면서 임명되지 못하였다.

그가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이름이 안우(安祐)이며, 어려서 이름을 떨쳤으나

요절하였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이름이 영()이며, 전설사 별좌를 지낸 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이름이 두남(斗南)인데, 선조 임금대의 이름난 선비이다.

지방관으로 행적이 뛰어나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89세까지 장수하고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정부인 김해김씨로, 담양도호부사 김희필(金希弼)의 따님이다.

공은 체격이 크고 어려서부터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 기대하였다.

만력 36(1608) 선조 41, 23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또 관무재(觀武才)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훈련원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곧 법성수군만호가 되었다. 28세에는 마량첨절제사가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절충장군에 올라 인동도호부사가 되었다가,

2년 후 영주군수겸 조방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해군이 폐위된 뒤 온 나라의 기강이 사라지자, 임금이 암행어사를 각처에 파견하여

여러 군현의 불법적 행위를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 공은 고을을 잘 다스렸다는 이유로

특별히 임금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에 북도병마우후로 옮겼고,

겨울에는 회령도호부사로 옮겼다.

그곳에서도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다시 임금으로부터 옷감을 상으로 받았는데,

인동과 회령에는 모두 정청비(政淸碑)가 세워져 백성들이 공을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천계(天啓) 8(1628) 인조6, 공은 43세로 서해절도사가

되었다가 곧 체직되었고, 겨울에 중화도호부사가 되었다가 1년 만에 영남절도사가

되었다. 다시 3년 만에 절충장군의 품계로서 북도절도사에 발탁되었다.

공은 북쪽의 변방을 드나들기 10년 만에 위엄있는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으니,

군사들과 사대부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3년 뒤 어머니 정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이미 50세의 나이에 3년 간 여묘살이를 하며 슬픔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통곡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 기보우방어사(畿輔右防禦使)가 되었고, 이어 호남절도사가 되었다.

그해 겨울,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국경을 넘은 지 3일 만에 선두의 기마병이

이미 서울에 다다르자 임금은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대군이 계속 밀어닥쳐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오랑캐의 위세가 대단하여 하루빨리 군사를 불러 모아야 되자,

공은 즉시 휘하에 거느린 군사들을 일으키고 인근 고을에서 임금을 호위할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멀리까지 적의 형세를 염탐하고 무기와 군사를 정비하니,

부대를 움직임에 규율이 있었다. 그러자 오랑캐의 기병들이 사방으로부터 나왔으나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감히 덤비지 못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의

군병이 죽산에 있었는데 오랑캐가 기습을 하였다. 체찰사 종사관 박서(朴遾)가 먼저

죽산부터 구하고자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임금을 구하는 것이 급하다고 하며

따르지 않았다. 명령을 받은 지 13일 만에 용인(龍仁)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험준한

지세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이미 모든 근왕병이 패퇴하고 전라도의 군병만이

남아있었다. 남한산성에 육박하여 함성을 올리며 날랜 군사들을 선발하여 적의 기병을 격파하였는데, 

목을 벤 수가 매우 많았다. 적이 매우 근심하여 몽골병 및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 군사 수만 명을 모아 새벽 안개를 틈타 진격하여 단번에 돌파하려 하니,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 같았다. 공이 칼을 뽑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맹서하고 돌과 화살이 쏟아지는 곳에 서서 죽을 각오임을 보이자, 군사들 또한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적 또한 진퇴를 거듭하며 종일토록 힘을 다해 싸우던 중, 날랜 기마병을 보내어

몰래 고개 뒤를 넘어가 고지를 점령하고 화살을 비 오듯 쏟아부었다.

공은 급히 용사 수백명을 뽑아 앞다투어 올라가며 말하기를 지금이 바로 충신으로서 나라에 보답할 기회이다라고 하며 싸움에 임하니, 군사들이 모두 일당백이었다.

오랑캐 중 갑옷을 입고 깃대를 잡은 자가 말을 타고 봉우리에 올라 큰 깃발을 세우고

군사들을 지휘하자 적군들이 모여들었다.

공이 그를 가리키며,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적이 물러가지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더욱 힘써 싸움을 독려하였다.  포 여러 발을 발사하자, 깃발을 잡고 군사들을 지휘하던 자 및

여러 우두머리 곁에 좌우로 서 있던 자들에 한꺼번에 명중하여 죽은 자가 여러 명이었다. 

오랑캐들 가운데 죽은 자가 서로 베고 누워 쌓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우리 군사 중 죽은 자는 겨우 수십 명뿐이었다. 적군이 크게 패하여 산을 내려가 곳곳에 쌓인 시체를 태우니, 적진은 곡성(哭聲)으로 가득하였다. 밤 이경(二更,저녁10~12) 무렵 진중을 살펴보니 포환은 이미 다 떨어졌고 군량도 모자랐다. 날이 밝으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크게 쳐들어 올 것이나 당해낼 수 없을 것이므로, 진을 옮겨 군사들을 휴식시키고자 하여 횃불을 세우고 가짜 병사들을 만들어 놓은 뒤 밤에 몰래 군사들을 이동시켰다. 아침이 되자 정말 적군이 크게 쳐들어왔지만 진루가 텅 비어 있었고,

또한 복병을 두려워하여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패하여 죽은 적장 가운데 백양고라(白羊高羅)라는 자는 오랑캐의 높은 장수로, 싸움을 잘하여 전공이 높았으므로 선한(先汗)이 사

위로 삼았던 지체높은 자였다. 우리 군사들이 도중에 한 밤이 되어 소란을 일으키며 크게 외치기를, “우리가 장수를 위해 이미 힘써 싸워 이겼으니, 갑자기 변을 만나 죽어도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며 모두 흩어져 가버렸다. 공은 휘하의 기병 수백 명과 더불어 수원에 이르렀지만, 군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군사를 수습하여 뒷날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감사 이시방(李時昉)은 오랑캐를 두려워하여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내심 부끄러워하는 한편 절도사의 전공을 시기하였으므로, 도리어 말을 꾸며내어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종사관 박서 역시 예전에 공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에 분한 마음을 품고 임금에게 무함하니, 공은 결국 벌을 받게 되었다. 대신 이성구(李聖求)와 최명길(崔鳴吉)이 전투 상황을 보고한 글을 통해 전공이 많으며, 실로 죄는 없다고 힘을 다해 말해주어, 이시방은 결국 유배되고 공은 죄를 면하게 되었다.

호란이 평정되자 어영중군에 임명되었다가 집에 머문 지 몇년만에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문병 온 이들이 모두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이명(李溟)은 평소 공과 친분이 있었는데, 사적으로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공이 어찌 중국을 공격하는 것을 돕겠는가? 그 병이 깊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임경업(林慶業)과 유림(柳琳) 등은 오랑캐 군대를 따라 가도(椵島)와 금주(錦州)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숭정 12(1639) 인조 18년 김해도호부사가 되었다. 1년 만에 두 번째로 영남절도사가 되어, 군중의 일을 전날 약속한 대로 다시 정비하였을 뿐이다. 이듬해 병이 깊어져 관직

에서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십여 리를 가서 관사에서 객사하니, 공의 나이 57세였다. 이 때 남쪽에서 큰 별이 남쪽에서 떨어졌다. 영의정 김류(金瑬)와 원두표(元斗杓)가 조정에 있다가 부음을 듣고 놀라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로다. 남방에 별이 떨어지니 과연 훌륭한 장수를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임금은 특명을 내려 그의 장례 절차를 돌보게 하고, 법도에 따라 담당 관서로 하여금 부의를 전하게 하였으며, 그의 공로가 우뚝한 장성과 같다는 내용의 제문을 내렸다. 공은 만력 14년(1586)에 출생하여 숭정 15년(1642) 11 5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같은 해 12 12일 양천현(陽川縣)의 남산(南山) 선산에 안장되었다.

 

공은 침착·굳건하며 큰 지략이 많았을 뿐 아니라 겸손·공손하여 군사들을 아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에게 죽을힘을 다 바쳤다. 이천 석에서부터 연수(連帥)에 이르기까지 군사 업무를 담당한 지 수십 년 동안, 약속을 굳게 지키고 상벌을 신뢰 있게 행하였으며 법도를 반드시 지켰다. 권세있는 자들에 아부하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에 굴하지 않았으며, 관사를 집과 같이 여겨 물러나 살 집이 없었고, 주택과 의복이 마치 보통 선비일 때와 똑같이 검박하였다. 죽은 뒤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모든 장례 절차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치를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광교산의 대승을 칭찬하여도, 공은 당시 임금이 모욕을 당하였는데, 군사를 이끄는 신하가 성 아래에서 죽지 못한 것이 죄이다. 다른 일을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불행하게 세상이 뒤집혀지는 때를 만나 임금이 남한산성을 내려와 항복하였으니, 신하된 자로서 몇 번을 죽어도 부끄럽지 않으며 오랑캐를 아무리 죽여도 많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임무를 받아 사양하지 않으면서도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지 않았으니, 죽음으로써 도를 지킴이 바로 충신의 의리이다. 공은 평생토록 집에 있으면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왕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고 친구를 사귐에 신의가 있었다. 이는 곧 돌아가신 부친께서 옮음을 실천하여 이름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공이 그처럼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켜내었으니, 공의 어짊은 그 근원이 있다고 할 만하다.

부인 임씨는 본관이 순창(淳昌)이며, 군자감 주부 계()의 따님이다. 선현들의 말과 행실에 통달하여 늘 허물이 없도록 몸가짐을 삼갔으므로 집안에 뇌물과 참소가 없었으니, 이 모두 부인의 현명함 때문이었다. 공이 죽은 뒤 16년 후, 즉 효종 9(1658) 122876세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227일 남산에 함께 장사지냈다.

4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문(敬文한문(漢文인문(仁文현문(炫文)이며, 사위는 정상(鄭相)이다. 경문은 사재감 첨정을 지냈고, 80세가 되어 첨지중추부사의 관직을 받았다.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춘장(春章), 진원(振遠), 형원(亨遠)이며, 딸은 1명으로 사위는 참봉 이온()이다. 진원은 몽협(夢協)을 낳았고, 형원은 2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신필경(申弼卿)과 이익휴(李益休)이다. 한문은 해서절도사를 지냈으며, 아들 석()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딸이 둘 있었는데 사위는 이진성(李震晟)과 윤수손(尹首孫)이다. 석은 몽상(夢商)과 몽량(夢良)을 낳았는데, 몽상은 생원이며 몽량은 훈련원정이다. 딸이 둘 있었으며, 사위는 안후선(安后宣)과 진사 엄집(嚴䌖)이다. 인문은 사복시 판관을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덕원(德遠)을 낳았는데 덕원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덕원은 몽양(夢陽)을 낳았는데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딸이 둘 있었는데 사위는 진사 유헌장(柳憲章)과 한종범(韓宗範)이다. 현문은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아들은 홍원(弘遠)이고 사위는 윤해(尹楷)인데, 모두 진사이다. 홍원은 몽서(夢瑞)를 낳았으며 딸은 1명으로, 사위는 성임(成任)이다. 정상(鄭相)은 통덕랑으로 중희(重熙)와 중윤(重胤)을 낳았는데 모두 진사이다. 딸은 1명으로 사위는 정규제(鄭奎齊)이다. 이진성은 1남을 두었고, 윤수손은 2남을 두었으며, 홍원은 또 11녀를 두었고 정중희는 2남을 두었으며, 정중윤은 1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측실 소생의 자녀는 모두 6인인데, 세 아들은 내문(乃文), 전문(全文), 회문(會文)이며, 삼녀는 각각 군수 박정익(朴廷翊), 감사 원만석(元萬石), 감목 이익상(李益常)의 첩이다. 내외 적서의 자손 및 증·현손의 대에 이르러 어린 아이들까지 합하면 모두 백여 명이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우뚝하고 용맹한 신하여, 임금을 에워싼 성과 같도다.

충의를 쌓았으니 만인이 우러러 보는 도다. 그 이름이 영원토록 빛나리.

숭정 기원 후 53년 경신년(1680)에 쓰고, 58년 을축년(1685) 4월 일에 세움

 

김준용(金俊龍, 1586~1642) 장군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字는 수부(秀夫),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선조 41년(160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광해군 9년(1617) 인동도호부사, 영주군수를 거쳐 인조 14년(1636)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관할 군사를 이끌고 적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면서 곳곳에서 군사를 모아 병력을 보강하였다. 직산(稷山)을 경유, 용인의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를 이용, 포진하였다가 공경(孔耿)의 청나라 군대 수만이 공격해오자 청태조의 부마 백양고라(白羊高羅) 등 많은 적병을 사살하는 전공을 올렸다. 이후 김해도호부사,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묘는 본래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에 있었으나 도시화계획에 의해 1972년에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묘역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봉분 앞에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동자석(童子石) 한 쌍이 서 있다. 이 동자석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지 않아 문신석인이라 할 수는 없으나 도포를 입고 홀을 쥐고 있는 모양은 문신석인과 꼭 같다. 한 단 아래에 문신석인이 좌우에 서 있다.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行全羅兵馬節度使 原州金公俊龍之墓 配贈貞敬夫人淳昌林氏祔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행전라병마절도사 원주김공준용지묘 배증정경부인순창임씨부

                                          通政大夫 禮曹參議 東溟 鄭斗卿 撰

                                          통정대부 예조참의 동명 정두경 찬

병마절도사 충양공 김준용(忠襄公 金俊龍) 묘역후경

 

 

 

 

 

 

//원주김씨 병마절도사 충양공 김준용(忠襄公 金俊龍) 가계//

고조부 절도사 증 병조판서 김말손(金末孫)

증조부 증 좌찬성 김안우(金安祐)

   조부 별좌 증 이조참판 김영(金瑛)

   부친 동지중추부사 김두남(金斗南)

   모친 정부인 김해김씨, 담양도호부사 김희필(金希弼)의 따님

           병마절도사 충양공 김준용(忠襄公 金俊龍,1586~1642)

           배위 증 정경부인 순창임씨, 주부 임계(林繼)의 따님

                장남 사재감첨정 김경문(金敬文)

                배위 영인 안동권씨,

                        손자 김춘장(金春章)

                        손자 성균생원 김진원(金振遠)

                                증손 함흥판관 김몽협(金夢協)  

                        손자 김형원(金亨遠)

                차남 황해병사 김한문(金漢文)

                        손자 생원 김석(金碩)

                                증손 김몽상(金夢商), 김몽량(金夢良), 김몽설(金夢說)

               삼남 사산감역 김인문(金仁文)

                       손자 형조좌랑 김덕원(金德遠)

                               증손 김몽양(金夢陽)

                사남 병조정랑 김현문(金炫文)

                        손자 진사 김홍원(金弘遠)

                                증손 김몽서(金夢瑞)

                오육칠남 김내문(金乃文), 김전문(金全文), 김회문(金會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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