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응대군 서곡 이염(永膺大君 西谷 李琰)
시흥시 향토유적 제9호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70
귀후문(歸厚門)
경효재(敬孝齋)
永膺大君諡敬孝公神道碑
영응대군시경호공신도비
朝鮮王朝第四代 世宗大王八王子 永膺大君墓所
조선왕조제사대 세종대왕팔왕자 영응대군묘소
추원문(追遠門)
경효사(敬孝祠)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은 세종대왕의 소헌왕후(昭憲王后) 청송심씨(沈氏)의 8남 2녀 중 막내아들이다. 자는 명지(明之), 호는 서곡(西谷), 이름은 염(琰)이다. 1441년 세종 23년에 영흥대군(永興大君), 1443년 세종 25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 세종 29년에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서화에 재능이 있었고, 특히 음률(音律)에 조예가 깊어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번역하였다.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총명하였으며, 세종이 승하하실 때 영응대군의 거처인 동별궁에 옮겨와 돌아가실 정도로 세종의 총애가 깊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실록에도 대놓고 세종이 영응대군을 편애했다는 기록이나 영응대군의 집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비판하는 기록 등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영응대군의 묘지문에 따르면 다른 왕자들과 달리 영응대군만 장성할 때까지 세종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응대군은 대마도 정벌 때 우군절제사를 맡아 공을 세운 이순몽(李順蒙,1386~1449)의 집으로 피접(避接)을 자주 나갔는데 이순몽 역시 영응대군을 지극히 사랑했다고 한다. 세종의 사랑은 이순몽(李順蒙)에게까지 미쳐 주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순몽을 고관대작으로 삼기도 했다. 세종이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한 뒤 뒤를 이은 문종과 세조도 막내동생을 지극히 사랑해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을 영응대군에게 내려주었다. 하지만 영응대군은 천성이 검소해 재산을 잘 쓰지 않고 사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응대군(永膺大君)의 혼인 과정은 조금 특이한데, 세종은 여산인 송복원(宋復元)의 따님과 영응대군을 혼인시켰다. 그러나 여산송씨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송씨와 이혼시키고 해주인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문제는 해주정씨의 아버지 정충경은 이미 고인이 된 상태였고, 과부가 된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여읜 자식은 혼인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당시 왕실 관행상 왕자의 아내가 될 수는 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종은 영응대군을 강제로 이혼시키면서까지 해주정씨와의 혼인을 강요하였다. 결국 세종은 영응대군을 재혼시킨 후 말년에 영응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나갔다가 그 곳에서 승하했다.
그러나 영응대군은 첫 부인인 여산송씨를 사랑하였는지, 세종이 죽자 다시 송씨와 만나기 시작했다. 이 때 도움을 준 인물이 영응대군(1434~1467)의 둘째 형 수양대군(세조,1417~1468)이었는데, 수양대군은 막내 동생을 딱하게 여겨 영응대군이 송씨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결국 영응대군은 송씨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서 해주정씨와 이혼하고 여산송씨와 다시 재결합할 수 있었다.
영응대군(永膺大君)은 이후로는 크게 정치에 관여하는 일 없이 둘째형 세조의 비호를 받으며 무탈하게 살다가 34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영응대군의 맏사위가 된 구수영은 연산군의 장녀 휘신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등 연산군 치하에서 아부하며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구수영은 사돈 연산군을 배신하고 반정에 가담했으며, 며느리 휘신공주도 쫓아낸다. 훗날 휘신공주는 작은아버지 중종의 도움으로 남편 구문경과 재결합하지만, 공주 신분을 되찾지는 못하고 '구문경의 처'로만 불린다.
1900년 광무 4년(1900) 9월 17일에 대군의 첫 부인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해주 정씨(海州鄭氏)와 둘째 부인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묘를 현 위치로 천장한 후, 1968년에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셋째부인 연성부부인(延城府夫人) 연안 김씨(延安金氏) 및 아들 청풍군(靑風君)과 손 화림정(花林正), 그리고 증손 흥선부정(興善副正), 흥정부수(興貞副守)의 묘를 옮겨 봉안하였다. 묘는 쌍분으로 영응대군과 해주 정씨 및 여산 송씨와 합장이고 그 왼쪽에 연안 김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世宗大王第八王子 顯祿大夫永膺大君 敬孝公諱琰之墓
세종대왕제팔왕자 현록대부영응대군 경효공휘염지묘
配春城府夫人海州鄭氏祔左 配帶方府夫人礪山宋氏祔右 配延城府夫人延安金氏雙墳
배춘성부부인해주정씨부좌 배대방부부인여산송씨부우 배연성부부인연안김씨쌍분
영응대군 묘역후경
永膺大君 神道碑(영응대군 신도비)
有明朝鮮國 永膺大君 諡敬孝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영응대군 시경호공신도비명
1498년 연산군4년 건립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찬 전액(篆額), 용양위부사정 박경(朴耕) 서
//전주이씨 영응대군파 영응대군 서곡 이염(永膺大君 西谷 李琰) 가계//
부친 세종대왕(世宗,1397~1450) 8남
모친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 청송심씨, 안효공 심온(安孝公 沈溫)의 따님
영응대군 서곡 이염(永膺大君 西谷 李琰,1434~1467)
정배위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여산송씨,판중추송복원(宋復元)의 따님,단종비정순왕후고모
장녀 길안현주 이억천(吉安縣主 李億千,1457~1519)
계배위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해주정씨,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따님, 영양위 정종의 누님
삼배위 연성부부인(延城府夫人) 연안김씨, 목사 김영철(金永轍)의 따님
아들 청풍군 이원(靑風君 李源,1460~1505)
배위 배천조씨, 판부사 조원지(趙元祉)의 따님, 육1녀 류방(柳房)
배위 군국부부인 무송윤씨, 증 직제학 방헌 윤자영(尨軒 尹子濚)의 따님
손자 화림정 이단(花林正 李壇,1485~1551)
배위 현부인 광산김씨, 현령 김기(金𥜥)의 따님
증손자 흥선부정 이경상(興善副正 李敬祥)
배위 신부인 하동정씨, 증 영의정 정진(鄭振)의 따님
배위 신부인 평양조씨, 정랑 조빈(趙璸)의 따님
증손자 흥례부수 이경수(興禮副守 李敬修)
증손자 흥정부수 이경조(興貞副守 李敬祚)
배위 신부인 안동김씨, 현감 김언청(金彦淸)의 따님
배위 신부인 의령남씨, 부호군 남악(南岳)의 따님
현손 생원 이인각(李仁恪)
5대손 충의위 이여필(李汝弼)
6대손 성균생원 증 사복정 이견린(李見麟)
7대손 증 좌승지 이후익(李後益), 이후석(李後奭), 이후발(李後發)
이후상(李後相), 이후증(李後曾)
증손자 흥고부수 이천경(興古副守 李千敬)
증손자 흥복부수 이경종(興福副守 李敬終)
증손자 의춘부수 이경장(宜春副守 李敬長)
증손자 흥덕부령 이경만(興德副令 李敬萬)
손자 수성수 이순(隋城守 李洵,1497~ ?)
증손자 당진부수 이극념(唐津副守 李克念)
증손자 광진부수 이효념(廣津副守 李孝念)
손자 청연령 이수충(淸淵令 李守忠)
증손자 등림부령 이몽린(鄧林副令 李夢麟)
증손자 완천감 이몽설(完川監 李夢說)
증손자 완산감 이몽윤(完山監 李夢尹)
시흥-김준용(金俊龍)장군 묘 및 신도비, 병마절도사 충양공 김준용(忠襄公 金俊龍) (1) | 2024.08.06 |
---|---|
시흥-청풍군 이원(靑風君 李源),화림정 이단(花林正 李壇),흥선부정 이경상(興善副正 李敬祥),흥정부수 이경조(興貞副守 李敬祚),성균생원 이견린(李見麟),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 (0) | 2024.08.04 |
화성-청송감무 최책(崔策),기장현감 최지숭(崔致崇),수성최씨 (0) | 2024.07.29 |
화성-수성백 문혜공 최영규(隋城伯 文惠公 崔永圭), 수성최씨 시조, 찬성사 최흡(崔洽),평장사 봉암 최원개(鳳巖 崔元凱) (3) | 2024.07.27 |
화성-고령신씨 귀래정공 사어공 공도파, 광산김씨 사온직장공파 통정대부 김기복(金箕福), 김기덕(金箕德) (1) | 2024.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