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의당(金三宜堂)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
전북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288
마이산 명려각(明麗閣)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1769.10.13.~1830)과 삼의당(三宜堂,1769.10.13~1823) 김해김씨
담락당과 삼의당은 1769년 영조45년 10월 13일
같은해 같은달 같은날 남원 유천마을 앞뒷집에서 태어나 18세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전라도 남원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나 같은해
같은날 출생하여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1769~1830) 과 혼인하였다.
삼의당(三宜堂)은 1769년(영조 45) 남원에서
사관인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의 11대 손 김인혁(金仁赫)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택호(宅號)가 삼의당(三宜堂)이다.
여성이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고 그 택호만 전한다.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가장 많은 257편이나 되는 시문을 남겼다.
기록에 의하면 남원시 향교동 처봉마을(현재의 유천마을)에서 출생하여
서당과 향교의 담벽에 몰래 붙어서서 학도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한글과 한문을 깨우쳤다 한다.
그녀는 나이 18세에
같은 마을에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1769~1830)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나이도 같거니와 가문이나 글재주가 비슷하여
주위에서 천상배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고 한다.
설레는 첫날 밤, 열여덟의 신랑신부가 서로 주고받은 시가 전해내려 온다.
삼의당(三宜堂)은 55세인 1823년 6월 20일에 죽었다고 하며,
묘는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원덕마을회관 뒷산에 그 남편과 함께 쌍봉장으로 하였다.
진안 마이산(馬耳山) 탑영지(塔影池)에는 시비 「담락당하립삼의당김씨부부시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삼의당고』 2권이 1933년에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시 99편과 1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김삼의당 부부 초상화(진안 마이산의 명려각 소재)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은 10월 13일 남원의 서봉방(교룡산 서남 기슭)에서
연산군 때 학자 김해김씨 문민공 탁영 김일손(文愍公 濯纓 金馹孫,1464~1498)의
후손 김인혁(金仁赫)의 딸로 태어났다.
쇠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김삼의당은 『삼의당 김부인 유고』 「자서(自序)」에서
“일찍이 언문으로 소학을 배웠으며, 미루어 문자를 통하고 제가(諸家)를 간략하게 섭렵하였다.”고 밝혔으니,
중국의 시문집을 비롯하여 경서와 사기를 두루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남원 교룡산공원 김삼의당시비
18세에 삼의당은 태어난 연월일이 동일한 같은 마을의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1769-1830)과 결혼했다.
하립은 세종조 영의정을 지낸 진양하씨 문효공 경재 하연(文孝公 敬齋 河演,1376~1453)의 12대손이다.
기이한 인연에 두 집안 모두 쇠락한 사대부 집안이었으니, 둘은 누가 봐도 천생배필이었다.
혼례를 치른 밤 담락당(湛樂堂)이 한시 두 수를 읊었고,
삼의당(三宜堂) 역시 두 수를 지어 화답하였다고 한다.
初夜唱和 湛樂堂(담락당)
초야창화 (첫날밤에 서로 시를 짓다)
夫婦之道人倫始
부부지도인윤시===부부는 인륜에서 비롯되어
所以萬福原於此
소이만복원어차===만복의 바탕이라
試看桃禾詩一篇
시간도화시일편===이 한 편을 마음속 새겨보오
宜當宜家在之子
의당의가재지자===온 집안 화목해야 온갖 일 이뤄지리
初夜唱和 三宜堂(삼의당)
초야창화 (첫날밤에 서로 시를 짓다)
配匹之際生民始
배필지제생민시===부부는 백성에서 비롯되어
君子所以造端此
군자소이조단차===군자의 기본이라
必敬必順惟婦道
칠경필순유부도===공경과 순종함은 오로지 아내의 길
終身不可違夫子
종신불가위부자===님의 뜻 종신토록 어기지 않으리오
담락당(湛樂堂) 신혼시
十八仙郞十八仙
십팔선랑십팔선===열여덟 선랑과 열여덟 선녀
洞房華燭好因緣
동방화촉호인연===신방에 화촉 밝히니 우리 인연 좋아라.
生同年月居同閈
생동생월거동한===같은 해 같은 달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으니
此夜相逢豈偶然
차여상봉기우연===오늘 밤 우리 만남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김삼의당(金三宜堂) 신혼시
相逢俱足廣寒仙
상봉구족광한선===우리 모두 광한전 신선으로 만나
今夜分明續舊緣
금야분명속구상===오늘 밤 분명 전생 인연 잇는구나
配合元來天所定
배합원래천소정===우리 만남 원래 하늘이 정해준 것이니
世間媒妁摠粉然
세간매작총분연===속세의 중매는 그저 꾸며진 일이라오.
김삼의당(金三宜堂)은 가난의 시련 속에서도 담락당(湛樂堂)을 향한 다수의 연정시를 남겼고,
유학을 바탕으로 한 생활시, 초연한 자연 친화의 시를 통해 조선후기 여류문학의 꽃을 피워 올렸다.
1남 3녀의 자녀를 두었으나 첫째딸은 18살에 죽고, 셋째딸도 첫돌도 안되어 홍역으로 떠났다.
삼의당은 250여 수의 시 외에도 20여 편의 산문을 남겼다. 그의 시는 필사본과 간행본으로 전해오고 있다.
삼의당(三宜堂) 이라는 당호는 담락당(湛樂堂)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삼의당이 거처하는 집 정원에 군자를 상징하는
대나무, 소나무 등을 심어 평생 충효의 뜻 속에 살아갈 여인임을 시로 읊었고,
삼의당도 담락당 형제들의 효제와 충의가 가득하다고 응수하여 신의에 찬 부부임을 과시하였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으나,
오형제들인 이락당 하호(二樂堂 河灝), 독락당 하준(獨樂堂 河濬),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
우락당 하식(友樂堂 河湜), 화락당 하봉(和樂堂 河鳳) 모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한시 창작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혼례 후 삼의당이 이루고자 한 가장 큰 일은 남편의 과거급제였다.
당시 준수한 외모의 담락당은 몰락한 양반가를 다시 일으킬 인물로 여겼다.
20세에 남편의 등과를 위해 서울로 보내니 삼의당 부부는 떨어져 지내는 기간이 길었고,
삼의당은 남편의 영달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칼을 자르고 비녀를 팔아 남편의 생활 자금을 마련하는 등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독수공방의 긴 세월 삼의당은 시를 읊으며 삶을 추스린다.
“인적 없는 사창에 날은 저물고
꽃은 떨어져 가득한데 문은 닫혀 있네.
하룻밤 상사의 고통 알고 싶다면
비단이불 걷어놓고 눈물 자욱 살펴보오.”
감정이 고조된 시 외에도 정밀감이 높으면서 규방의 한을 형상화한 작품도 보여준다.
“맑은 밤에 물을 길러 갔더니
밝은 달이 우물 속에서 떠오르네.
말없이 난간에 서 있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오동잎 그림자”
물을 길러 갔다가 우물 속의 달이 임의 얼굴로 보이고,
흔들리는 오동잎 그림자를 또 다시 임인 양 착각하는 상사의 마음이 깊은 울림으로 전해온다.
십여 년의 공부에도 등과를 못하자
1801년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은 삼의당(三宜堂)에게
진안 마령 방화리로 거처를 옮겨 농사짓자는 제안을 하게 되고, 삼의당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그는 남편과 더불어 농사짓는 평범한 아낙의 삶을 영위한다.
입신양명의 꿈을 내려놓으니 그들 부부의 진면목은 오히려 평범함 속에서 꽃을 피운다.
삼의당은 농사에 부지런하면서도 전원생활을 무척 즐겼다.
“나란히 선 초가집들 마을을 이루었는데
뽕밭 삼밭엔 가랑비 내리고 문은 닫혔네.
마을 앞 복사꽃 흐르는 물에 떠가니
이 몸이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것 같네.”
마이산이 멀리 보이는 땅에 삶의 터를 잡은 담락당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한양에서 8년동안 공부하면서 많은 장서를 읽었으며
순조 때 영의정,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두실 심상규의 집에서 유숙했기에
학문적으로 박학다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진안으로 옮겨온 뒤에도 그는 시험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42세가 되어서야 향시(鄕試)에 붙었고 다시 회시(會試)를 보러 한양으로 가지만, 결국 낙방했다.
그의 『담락당집』에는 다수의 시문이 실려 있고,
시의 대부분은 낙향해서 달관한 태도로 자연을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양하씨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 가계//
24대조 사직공 하진(河珍), 사직공파조
12대조 진양하씨 문효공 경재 하연(文孝公 敬齋 河演,1376~1453)
형님 이락당 하호(二樂堂 河灝)
형님 독락당 하준(獨樂堂 河濬)
동생 우락당 하식(友樂堂 河湜)
동생 화락당 하봉(和樂堂 河鳳)
담락당 하립(湛樂堂 河砬,1769.10.13~1830)
배위 삼의당 김해김씨(三宜堂,1769.10.13.~1823), 김인혁(金仁赫)의 따님,
문민공 탁영 김일손(文愍公 濯纓 金馹孫,1464~1498)의 후손
자녀 1남 3녀
첫딸 18세 요절
셋째딸 첫돌전 홍역사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백두산과 조선족, 지도와 문화 (0) | 2024.09.05 |
---|---|
제2회 지도의 날 행사 백두산, 지도와 문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0) | 2024.09.03 |
진안-마이산(馬耳山),마이탑사(馬耳塔寺), 석정 이갑룡(石亭 李甲龍),처사 이갑룡, 줄사철나무 (4) | 2024.08.30 |
안산-증 이조참의 일소 나성한(一昭 羅星漢),선공감역 나준(羅浚), 나원(羅薳), 홍천현감 나원야(羅元野) (2) | 2024.08.28 |
안산-한성부좌윤 나홍좌(羅弘佐),나명좌(羅明佐),상우당 나석좌(尙友堂 羅碩佐) (0) | 2024.08.26 |